-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Date 21/02/06 14:49:24
Name   私律
Subject   나도 누군가에겐 금수저였구나
홍길동씨라고 합시다.
제가 홍길동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전임자가 접수받아 놓은 국적서류를 통해서였습니다. 미결 건을 파악하느라 흘낏 보고, '이걸 꼭 해줘야 하나....'며 제자리에 다시 두었습니다.

얼마 뒤 홍길동씨가 제 옆자리 직원에게 체류자격 변경허가를 신청했더군요.
그 직원이 이분 건을 심사하면서, 노력해서 하나하나 쌓아가는 걸 보면 참 좋아 보인다. 조선족들 받는 것보다 이런 사람들 받는 게 낫지 않겠냐(조선족 비하가 아니라 동포정책 문제점 이야깁니다)고 하더군요. 그 때도 그냥 한귀로 듣고 흘렸습니다.

이 분의 신청 건도 처리할 때가 되어서 자료를 찬찬히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분의 서류를 꺼내들었을 때는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뭔가 문제가 있으면 걸러내는 것이 제 일이고, 거의 부정적으로 보기 마련입니다.
이 분은 작은 기업에서 생산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 어느 전문대를 나왔네? 순간 욱했습니다.
아니, 이놈이!

설명이 좀 필요한데, 그 학교는 외국인 유학생 받아서 연명하는 그런 곳입니다. 시쳇말로 똥통이라 한국인들은 잘 안 오고, 외국인 유학생 떼와서 간신히 버티는 거죠.
참고로 외국인 유학생 중 상당수는,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외국인은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입국도 어렵고 합법적으로 일하는 자격을 따는 건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 입국허가를 해주고, 수년간 한국에서 머물며 간단하게(체류자격외활동허가를 받으면) 일도 할 수 있네? 그러면 입국해서는 학생이라고 이름만 걸어놓고 돈버는 거죠. 불법체류나 불법취업은 아닙니다. 어쨌든 허가를 받았으니까. 하지만 진정한 체류목적은 유학이 아니고, 공부는 관심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탈법체류와 탈법취업 쯤 될겁니다.
똥통 대학교와 가짜 유학생의 속셈이 맞아떨어지고, 당연히 이런 대학교는 가짜유학생 천지입니다.
고학생[苦學生]과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 미국 독일 등지로 간 고학생들 많았죠. 이 분들은 공부를 하려고 고생한 것이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그 대학교를 나와서 그 일을 하는 것을 보고, 홍길동씨가 가짜 유학생으로 들어왔다가 전문가라고 거짓말해서 취업자격까지 뚫고서 (전문가가 아닌)단순노무를 하는구나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외국인근로자로 들어와서 공장에서 일하며 대학에 다닌 것이었습니다.
봉사활동도 이것저것 하면서 상도 받았더군요. 정식표창도 아니고 그냥 아무데서나 건수만 생기면 주는 상이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홍길동씨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홍길동씨는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와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숙련기능인력으로 체류자격을 바꾸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국적까지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거주자격으로 체류자격 변경허가까지 받고, 귀화신청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 분은 지금도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분이 향학열이 불타올라서 대학을 간 건지는 모릅니다. 돈만 내면 입학과 졸업이 되었을 것이고, 수업을 제대로 들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봉사활동도 마찬가지. 좋은 뜻이 있어서 한 것일 가능성보다는 체류자격 변경 등에 도움이 되니까 했을 겁니다(숙련기능인력 자격변경이나 거주자격 변경시 봉사활동 경력은 가점이 됩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공장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 노력을 하고 하나씩 이뤄낸 것입니다.
그 게 저와 옆자리 직원에게는 감동이었습니다.

귀화허가가 되고 국적증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홍길동씨는 정말 기뻐했다더군요. 믿을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국적증서를 받자 마자, 전화로 곧 태어날 아이의 국적문제를 물어봤고, 다시 찾아와서는 제게 아내의 결혼자격변경과 아이들의 국적신청 절차를 물어보더군요. 나름대로 준비를 마치고는 얼마전 아이들의 국적신청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홍길동씨가 찾아왔을 때는 모두 점심시간이었네요. 예, 공장에서 일하느라 점심시간 때 말고는 틈이 안났나봅니다.

홍길동씨의 아이들 국적신청을 받으면서..
'아, 이 사람은 발버둥을 쳐서 올라온 것이 중소기업 생산직이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염라대왕이 최선을 다해서 살았냐고 물어보면 '글쎄요...' 하겠지만, 나름 놀지는 않고 노력을 해서 올라온 것이 말단 공무원입니다. 아마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중소기업 생산직에 있었겠죠.
그런데 이 사람은 노력을 해서 올라온 것이 -제가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내려갔을- 그 자리입니다.
이 분이 나를 보면, 나름 금수저로 생각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들더군요. 그 느낌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전 이민자들의 아이들을 볼 때면 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아이들은 나중에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할까, 아니면 증오할까.
유럽에서 멀쩡한 것 같았던 이민자들의 자녀들이 어느 날 갑자기 폭탄테러범으로 돌변하는 걸 보면서, 귀화나 영주권 부여는 그 사람만 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홍길동씨의 아이들은 생긴게 우리와 비슷하니 훨씬 낫겠습니다만, 그래도 어찌될지 모르죠.
하지만 이렇게 노력을 한 홍길동씨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홍길동씨 노력의 결과를 홍길동씨의 아이들이 누리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홍길동씨의 딸 국적신청 건을 처리할 때, 문득 윤창중 사건이 떠올랐습니다-'그게 어떻게 키운 딸인데 네놈이 감히 그런 짓을 하냐!'고 재미교포들이 격분하셨던.
그때는 그냥 딸 가진 아버지들이 으레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홍길동씨의 딸 국적신청 건을 처리하면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홍길동씨의 모든 노력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윤창중은 그 모든 노력의 결과물을 짓밟은 것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십몇년쯤 뒤엔 홍길동씨 아이들도 홍길동씨 속을 썩일 겁니다. 어쩌면 흙수저라며 아버지 탓을 하기도 하겠죠?
그 아이들이 저를 볼 것 같지도 않고, 본다고 제 말을 들을리도 없습니다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나마라도 해주려고 느이 아버지가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아늬?
아마 제 아버지도 비슷한 몸부림을 쳤겠죠. 맨주먹으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집 한칸을 마련했으니...

정말 두려운 것은 홍길동씨가 함께할 사람들입니다.
그 쪽에는 태어나서 노력이라곤 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이들도 나름 사정이 있고, 울분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호감은 홍길동씨에게 갑니다만, 딱 잘라서 누군 좋고 누군 나쁘다고 보기 어렵고, 누군 맞고 누군 틀렸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거기에서 번져나올 거대한 갈등... 우린 뭘 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인생 모르는 거죠.
홍길동씨가 다니던 직장 인수해서 기업인으로 잘 나갈 수도 있는 거고, 무슨 일로 나락에 떨어져 소주병과 함께 굴러다닐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홍길동씨가 잘되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당신 그거 누릴 자격 있는 사람이다.
안되면?

당신 할만큼 했다. 난 당신 비웃지 못한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2-13 16:1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62
  • 멋져...
  • 이런글은 추천해야죠
  • 새롭게 또 한 가지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천 추천..
  • 좋은글이네요.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글..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60 여행1박 2일 서울 방문 단상. 13 whenyouinRome... 21/02/12 906 16
1059 일상/생각나도 누군가에겐 금수저였구나 14 私律 21/02/06 1832 62
1058 문학오늘부터 5월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는 20 순수한글닉 21/02/04 1069 23
1057 일상/생각Github Codespaces의 등장. 그리고 클라우드 개발 관련 잡담. 18 ikuk 21/01/26 1461 20
1056 IT/컴퓨터주인양반 육개장 하나만 시켜주소. 11 Schweigen 21/01/24 1285 40
1055 게임랑그릿사와 20세기 SRPG적 인생 14 심해냉장고 21/01/23 1166 31
1054 일상/생각내가 맥주를 마실 때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하는 수칙 44 캡틴아메리카 21/01/21 1954 22
1053 일상/생각34살, 그 하루를 기억하며 8 사이시옷 21/01/21 1021 29
1052 정치/사회건설사는 무슨 일을 하는가? 13 leiru 21/01/13 1354 16
1051 정치/사회미국의 저소득층 보조, 복지 프로그램 칼웍스 5 풀잎 21/01/13 865 6
1050 일상/생각자다 말고 일어나 쓰는 이야기 7 Schweigen 21/01/05 1200 23
1049 요리/음식평생 가본 고오급 맛집들 20 그저그런 21/01/03 1775 17
1048 게임체스 글 5편 - 세기의 게임, 바비 피셔 vs 도널드 번 8 Velma Kelly 21/01/03 600 5
1047 일상/생각열아홉, 그리고 스물셋 15 우리온 21/01/01 1594 43
1046 정치/사회만국의 척척석사여 기운내라 15 아침커피 20/12/29 1723 33
1045 요리/음식(내맘대로 뽑은) 2020년 네캔만원 맥주 결산 Awards 34 캡틴아메리카 20/12/27 1646 34
1044 영화홍콩의 화양연화(2) 꿈의 시공간, 2046 간로 20/12/26 844 14
1043 일상/생각어느 택배 노동자의 한탄 14 토비 20/12/26 1808 40
1042 정치/사회편향이 곧 정치 20 거소 20/12/23 1727 33
1041 영화홍콩의 화양연화[香港的 花樣年華](1) 4 간로 20/12/18 1263 21
1040 일상/생각아이들을 싫어했던 나... 32 whenyouinRome... 20/12/15 1646 35
1039 요리/음식고구마 스프를 만들어봅시다~! 13 whenyouinRome... 20/12/13 903 14
1038 역사두 번째 기회를 주는 방탄복 6 트린 20/12/11 1296 22
1037 역사생존을 위한 패션, 군복 9 트린 20/12/10 1245 11
1036 정치/사회판결을 다루는 언론비판 ㅡ 이게 같은 사건인가? 4 사악군 20/12/06 1251 16
목록 이전 다음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