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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1/20 15:12:06
Name   烏鳳
Subject   형벌의 목적, 책임주의, 그리고 음주운전
#0. 들어가면서

예전에 범죄와 처벌에 관해서 글을 몇 개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시기 전에, 아래 글들을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혹은, 녹색 창도 좋고, 구글링도 좋고 꺼라위키도 좋으니..
[죄형법정주의][형법상의 책임] 개념을 미리 알아두셔야만 이야기가 한층 수월하게 읽힐 겁니다.

일단, 제가 전에 [죄형법정주의]에 관하여 언급하였던 아래 글이 있고,
https://redtea.kr/?b=3&n=5283

형법상의 처벌을 받기 위한 조건들을 말하면서, [책임]에 관하여 언급한 부분도 있습니다.
https://redtea.kr/?b=3&n=6432

뭐, 그냥 이 글부터 먼저 읽으신 다음에, 위에 소개한 글을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 참고로 이 글은 제 글 중에서는 역대급으로 깁니다. 재미도 별로 없습니다... orz


#1. 범죄의 성립, 그리고 책임

일반적으로 '책임'이라는 단어의 뜻은 짊어지는 것이 마땅한 부담을 의미합니다.
가장 흔하고 자주 들을 수 있는 말로는 책임져!!! 정도가 될까요?

그런데 법학의 세계에서의 책임은 의미가 좀 다릅니다.
의미가 조금 더 한정되고, 좁혀지지요.
민사상의 책임과 형법상의 책임이 또 의미가 다른데요.
민사에서의 '책임'은 일단 논외로 두고, 형법상의 책임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형법상의 '책임'이라는 단어는 범죄성립요건의 일부입니다.
일반적으로 형법은 '금지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 이를 위법하다고 가정한 다음, '일정한 처벌'을 가할 것을 규정하지요.
예를 들어, 살인죄에서는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 이를 위법하다고 가정하고
'5년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을 살해하였다'고 해서 언제나 '5년 이상의 징역,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경우는 살해행위가 [위법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내일 당장 북한과 대한민국이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전장'에서 우리 국군이 북한 병사를 사살했다고 해 보죠.
국군 병사를 살인죄로 처벌해야한다고 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국군 병사가 북한군 병사를 '전장'에서 사살한 행위는 [위법하지 않은 행위]로 볼 여지가 매우 높겠지요?

다른 하나의 경우는, 범죄자가 저지른 행위를 처벌하기 어려운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치매에 걸려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9순 노인 오봉씨가 있다고 해 보죠.
이 9순 노인 오봉씨가... 갑자기 멀쩡히 갈 길 가고 있던 지나가는 사악군 씨를(무단 까메오 출연입니다;;;) 휙 떠밀어서
사악군 씨가 넘어져서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었다고 가정해보죠.

이 치매노인 오봉 씨를 상해죄 내지 폭행치상죄로 처벌해야 할까요?


#2. 형벌의 목적, 그리고 국가입장에서의 관점

현대 사회에서, 형벌권은 국가에게만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는, 어떠한 이유로 개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형벌을 가하는 것일까요?
피해자 개개인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처벌되는 것을 보며, 복수심이 충족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만...
정작 사회 내지 국가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구성원 개개인 대신 복수해주는 것이 형벌의 목적이라 할 수는 없죠.

더 중요한 것은 [범죄 자체를 줄이는 것] 입니다. 국가 형벌권의 근본적인 목적은 이겁니다.
그 구성원들이 사회 안에서, 국가 안에서 자유와 안전을 누릴 수 있도록 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국가'가 나를 보호해준다..라고 느낄 수 있어야 기꺼이 세금도 낼 거 아닙니까.
즉, 국가가 형벌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범죄로부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보호하고,
이로써 국가 자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형벌의 [보호적 기능][사회보호적 기능]이라고 합니다.

이 쯤에서 등장하는 것이 형벌의 위하적 효과.. 입니다.
예를 들어 중동의 모 국가에서는 아직도 살인범을 공개처형한다던가요?
아... 나도 만약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나도 저 사람처럼 광장에서 다른사람의 구경거리가 되면서 처형당하겠네? 착하게 살아야겠다...
이렇게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겁을 먹고서는 '알아서 기도록'만드는 것을 형벌의 위하적 효과라고 합니다.


#3. 응보형주의, 그리고 그 한계

이 대전제 하에서,
최초로 국가가 그 구성원에 대한 형벌을 책정할 때에는 응보형주의..에 의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또한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손해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죠.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 언뜻 보기에는 - 이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즉, 응보형주의에 따라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그에 겁을 먹고(형벌의 위하력), 범죄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응보형주의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데에는 구성원들의 직관적인 공감을 이끌어 낼 수는 있는데요.
똑같이 갚아주는 식의 처벌이 언제나 가능한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사람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피해자와 똑같이 신체를 상해하거나,
(조금 발전한 사회라면) 몇 대 이상의 태형에 처한다. 이런 식입니다. 여기까진 그래도 그럴 듯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장발장이 빵을 훔쳤습니다. 그 처벌은? 기계적으로는 빵의 값어치만큼을 장발장이 돌려주는 거겠죠.
그런데... 이게 처벌 맞나요?
장발장 입장에서는 빵을 훔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 그걸 돌려주는 거라면,
안 들키면 장땡이고, 걸려도 그냥 빵 돌려주면 끝... 이네요? 범죄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될리 없습니다.

뭐 빵이야 두배, 세배 혹은 그 이상으로 갚게 하면 처벌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장발장이 이미 그 빵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수중에는 돈이 없네요.
돈이 없어? 그러면 피해자의 노예로 만들어도 될 일이고...
피해자가 노예를 먹여살릴만한 재력이 없다면 국가의 노예로 만들어도 되겠죠.
즉, 일해서 몸으로 갚아라... 할 수도 있는데요.

그런데 하필 장발장이 오늘 내일하는 노인이거나, 병이 깊어 곧 죽을 환자라면 어떨까요.
오히려 범죄자가 국가나 피해자의 밥만 축내게 되는 상황이네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지요.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은촛대를 훔쳤다가 경찰에 잡혔습니다.
미리엘 주교는 수사관에게 'ㅇㅇ 그 은촛대 내가 장발장 준 건데?' 하고 말했습니다.
미리엘 주교는 범인인 장발장이 처벌받는 것을 면하게 하려는 목적 하에 허위의 진술을 했네요.
범인도피 내지 범인은닉죄가 성립할 수도 있습니다.

자.... 응보형주의에 따른다면, 이걸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요?
국가가 미리엘 주교에게 거짓말을 세 번 하면, 미리엘 주교에 대한 처벌이 될까요???

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어차피 이미 버린 인생 막 가보자... 하는 잭더리퍼 같은 살인범이 있다면 어떨까요.
이 사람 입장에서는 한 명을 죽이나, 백 명을 죽이나... 어차피 처벌은 똑같습니다. 사형이죠.
결국 한 건의 범죄로 끝나면 다행이겠는데.... 백 건 이상의 살인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그만큼 사회는 더더욱 혼란해지겠죠. 범죄 피해자는 더더욱 늘어날테고요.
그 연쇄살인마를 잡아서, 교수형을 백 번 해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미 처음 목을 매달았을 때 이 범죄자는 죽었는데 말이죠.

이처럼, 응보형주의에 의한 형벌은 대개 필요 이상으로 엄격해지게 되거나, (그 반작용으로) 필요이상으로 가벼워지게 됩니다.
물론, 필요이상으로 무거운 경우가 훨씬 많고, 필요이상으로 가볍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죠.


정말 문제는, 이렇게 필요이상의 엄격한 처벌이 효용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말입니다....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손발을 자르거나... 범죄자가 노예로 하기에 적당하지 않으면 그 가족을 연좌제로 처벌한다든가...
이게 국가 형벌권의 근본목적인 [범죄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은 아니라는 겁니다.

꼭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강력한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라 해도 마찬가집니다.
예를 들어, 어느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라 해도 반역죄는 사형입니다. 반역자 본인 사형 플러스 가족까지 보너스로 처형되죠.

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역사상 반란이 안 일어나던가요?

살인자를 사형에 처한다고 해서... 살인의 죄를 저지르는 이가 없어지던가요?

즉, 응보형주의에 따른다 해도,
아무리 처벌이 무거워도 범죄 저지를 놈은 저지른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에서는 응보형주의
다시말해 피해자의 복수를 국가가 대행해 준다는 개념을 사실상 포기합니다.
(대놓고 포기한다기 보다는... 부차적인 개념 정도로 격하된다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지 싶습니다.)
형벌은 범죄자를 '교화'하는 방법을 통해 범죄를 줄이는 수단으로 포지션을 정립합니다.


#4. 형벌의 효과 - 범죄자의 교화

즉, 범죄자가 죄를 저지른다면... 이 범죄자를 잘 다독여서 범죄자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럴려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고 해서 똑같이 다치게 할 것이 아니다.
차차리 가둬놓자. 가둬놓는 기간 동안 '교화'를 시켜야 한다.

이 쯤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자유형입니다. (수영의 자유형이 아니라, 자유刑입니다.)
범죄에 비례하여, 범죄자를 일정한 기간 동안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범죄를 반성하게 한다..는 것이죠.

물론, 정도를 넘는 흉악범이라거나... 도저히 교화가 될 것 같지 않은 악인이라면 사형에 처할 수 밖에는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일단 가둬놓고 반성하게 만들자는 개념입니다.

이로써 사회 입장에서는 일정 기간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사회 구성원의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내부 구금시설에서 '갱생'을 시도하여 범죄자를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시킨다..는 것이죠.
여전히, 죄를 지으면 '감옥 간다'는 프로파간다로 형벌의 위하적 효과는 유지할 수 있고요.

물론, 이러한 자유형의 개념이 언제나 합당한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 인류사회가 그보다 나은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교화'개념의 자유형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붙습니다.

범죄자가 자신의 행위(범죄)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형기를 마친 다음에 출소하면, 과거 처벌에 비추어,
같은 행위를 하면 또 다시 처벌받게 된다는 공포 내지 두려움을 가질 만한
그런 사리를 분별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또한, 근대 이후에 추가된 개념으로,
이러한 지적 능력이 갖추어지기 이전인 아이와 청소년,
혹은 각종 장애로 이러한 지적능력을 갖출 수 없었던 이들은 달리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붙습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책임주의'입니다.


#5. 책임 -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자가 부담해야 마땅한 비난가능성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자의 행위와,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자의 행위를,
과연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 있는가.

현대 형법계에서의 '책임주의'의 핵심은 위의 질문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견해는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알려진 국가의 형법에서, 
정상적인 사리분별이 가능한 자의 행위와 그렇지 못한 자의 행위를 동일선상에 두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 형법도 마찬가지이고요.

국가가 형벌권을 독점하는 이상에는, 그 행사는 신중하여야 마땅한데,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수 없는 자의 행위마저도 일반인의 행위와 동일하게 처벌할 수는 없다.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자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나누어
적어도 일반인보다 가볍게 처벌하거나, 혹은 아예 처벌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중증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설령 타인을 살해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각하지 못하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반성할 능력 자체가 없다.
이 사람을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 보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보안처분이라고 합니다.)
이 자를 '범죄자'로 처벌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아직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아이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받는지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상태다.
때문에, 어린 아이는 아예 형사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거나,
불가피하게 처벌한다고 하더라도, 성인을 처벌하는 것처럼 처벌할 수는 없다.

즉, 현대 사회에서는... 적어도 선진국으로 알려진 국가는 범죄자에게 정상적인 사리분별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집니다.
러프하게... 이 사회 평균 기준 일반인의 정상적인 사리분별능력을 '책임능력'이라고 합니다.
(물론 학자에 따라 학설과 주장과 반론이 난무합니다만... 대학원에서 형법 전공하실 거 아니면 이 정도만 아셔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이 '책임능력'을 갖춘 이에게만 국가의 형벌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책임주의'입니다.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을만한 이에게만 형벌을 주겠다는 것이지요.

너는 적법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너를 형벌에 처하겠다!!


#6. 대한민국 형법상의 책임무능력자 / 제한책임능력자

그런데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이 정상적인 사리분별능력의 판단기준을 애매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형사상 책임이 없는' 사람, 다시 말해 책임무능력자로 정한 게 두 가지 경우입니다.

첫번째는 형사미성년자입니다. 만 14세 미만(즉 만 13세까지)의 아이와 청소년이죠.(형법 제9조)
물론, 어른 뺨싸대기 치는 아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이들을 '형법'으로 처벌하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두번째는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형법 제10조 제1항)
앞서 예로 들었던 중증의 정신장애인이라거나, 사리분별하지 못하는 중증 치매노인 같은 경우이지요.

여기에 해당하면, 형사상의 벌은 받지 않습니다.
다만 소년범죄의 경우에는 '소년보호사건' 취급을 받게 될 수 있고,
중증 정신장애인이나 중증 치매노인 같은 경우에는 치료감호시설 내지 보호시설...로 가게 될 수 있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제한책임능력자입니다. 형사상 처벌은 가능하지만, 처벌을 "감경"해 주는 겁니다.
첫번째는 심신미약자입니다.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자를 의미합니다.(형법 제10조 제2항)
제일 쉽게 들 수 있고, 흔한 예가 술에 취한 사람입니다. 가벼운 정신분열증 환자, 살짝 치매끼가 있는 노인 등도 여기에 해당하죠.

두번째는 농아자입니다. (형법 제11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은 하는데 듣지는 못하는 귀머거리, 듣기는 하는데 말하지는 못하는 벙어리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벙어리와 귀머거리 양쪽 모두에 해당하여야만 합니다.
정상적인 사리분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교육을 받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겠지요.



#7. 왜 술먹고 한 범죄는 형벌을 깎아주는거야? 음주운전은 처벌하잖아?

먼저 형법 조항부터 보시지요. 형법 제10조 제3항입니다.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전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여기에서의 전2항의 규정은
심신상실(사물 변별능력, 의사결정 능력이 아예 없는 경우)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규정과(형법 제10조 제1항)
심신미약(변별능력이 있기는 한데, 미약한 경우)자의 처벌은 감경한다는 규정입니다.(형법 제10조 제2항)


예를 들어, 술 먹은 다음 만취상태에서 서로 치고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 보죠. 
취해서 싸우기 전까진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음날 술 깨서 보니, 경찰서 유치장인데,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고... 옆 방에는 어제 시비붙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자... 이 사람이 처음부터 
'음.. 난 술만 먹으면 개가 되어서 옆 테이블에 시비를 걸고 치고 받아' 하는 걸 미리 예상하고 술을 먹었을까요?
아마 그건 아닐겁니다. 술 먹다가 취해서는 '객기'로 시비가 붙고 싸움까지 벌어진 거겠죠. 실제로도 이런 케이스가 많을 겁니다.
때문에 이 때에는 형법 제10조 제2항이 적용됩니다.
취기에 변별능력이 떨어졌던 것으로 보고 형벌을 깎아주는 것이죠.

즉, 일시적으로, 미리 예측하지 못한 상태의 제한책임능력자의 범행이므로, 형벌을 감경해 주는 겁니다.


반대로 이런 경우도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봉이에게는 평생의 원수가 있습니다. 이 원수를 죽이기 위해서 밀수한 권총도 한 자루 구했죠.
그런데 막상 결행하기로 한 날이 되니... 용기가 나질 않는겁니다.
그래서 오봉이는 술김에라도 저지르자!! 하고 편의점에서 쏘주 세 병을 사서 깠습니다.
그리고 원수의 집으로 쳐들어가 원수의 심장에 총탄을 박아주었지요.

명백히 형법 제10조 제3항이 적용되는 사안입니다.
위험의 발생(원수의 살해)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쏘주 세 병을 깜)했지요.
그러니 이 사건 재판에서... 오봉이의 변호인이 아무리 애걸복걸을 하더라도
오봉이가 책임무능력자 내지 제한책임능력자로 취급되지는 않는 겁니다.


음주운전을 처벌하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대법원 1992. 7. 28. 판결 92도999)
음주운전을 하려면.. 일단은 차를 술 마시는 곳까지 가지고 가야 할 테고, 차의 열쇠도 있어야지요?
위험의 발생(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는 행위)을 예견하였으면서도, 내지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으면서도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것으로 보겠다는 것이죠.

때문에.. 겉보기에는 둘 다 술을 마시고 한 범죄인 건 같은데도,
음주운전은 엄히 처벌하면서도... 술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형벌을 깎아주는 것이지요.


#8. 책임주의의 관철

다시 말해, 왜 똑같이 술마시고 한 건데 법원의 평가가 다른가.. 하는 것은 형법 규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법 규정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정상적인 사리분별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를 처벌하겠다는 이념이
세대와 세대를 거치면서 켜켜이 쌓여 그 바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고요.

취한 상태에서의 폭행 내지 상해는,
맨 정신이라면 그렇지 않을 충분한 사리분별능력이 있었을 사람인데,
취했기 때문에 그 사리분별능력이 일시적으로 감퇴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형벌을 깎아주는 겁니다.

반대로 음주운전은,
충분히 맨 정신에서... 오늘 저녁 술자리에 차를 가지고 갔다가는 음주운전을 하게 될지 몰라... 하는 예측을 할 수 있었음에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끝에 자신의 의사에 따라 취해서 운전한 것이니 이를 처벌하는 것지요.


다만, 실무적으로는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폭행 내지 상해의 경우...
이전까지는 전과관계 깨끗한... 
완전무결한 모범시민인 경우에는 변호인이 책임감경 주장하면 판사가 어느 정도는 감안하여 판결합니다.
애초에 수사단계에서도 이를 감안하여 수사를 하고, 검사의 구형 또한 이를 상당히 고려하지요.

그런데 이런 음주 상태에서의 난동 내지 폭행전과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릅니다.
수사기관에서도 쌔애하게 보고, 검사의 구형 또한 주폭 상습범임을 감안해서 구형하지요.
변호인이 음주책임감경을 주장하더라도, 판사님은... 가볍게 님하 상습범이네 책임감경 즐~~ 을 외치고 판결하시죠.

실제로 만취상태에서의 폭행, 상해, 공무집행방해로
전과 20범 - 정말 모든 전과가 만취난동....으로 정리되는 분이 있더군요;;;; -인 분을 변호해봤는데 가볍게 씹혔습니다.
판사님께서 대놓고 판결문에 그렇게 쓰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분에게는 형법 제10조 제3항이 적용된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너님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거... 너님 뻔히 알면서도 또 사고를 쳤네? 하는 느낌이랄까요.

이처럼 국가는 형법 제10조 제3항의 적용을 배제할 사안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적용할 사안인지를 두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하는 방법을 통하여...
국가구성원을 가급적 보호하면서도 그 구성원에 대한 엄벌은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딱 욕 먹기 좋은 중간선을... 우리 형벌시스템이 지키려고 애 쓰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9. 맺으며

별 생각없이 자판 두들기던 걸 주말 지나서 오늘에야 올리네요.
사실 길고 재미없는 글이라서 그냥 버릴까 하다가....  올려봅니다.


* 까메오로 출연해주신 사악군님께, 무단으로 닉네임을 빌리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


* 토비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12-06 21:09)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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