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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5/18 22:44:18수정됨
Name   droysen
Subject   뮌헨에 들렀다가 다하우에 다녀온 이야기
지난 주에는 뮌헨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독일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인데, 박사논문을 쓰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사료 중 하나가 뮌헨의 한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50만명 남짓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뮌헨은 한국, 특히 서울에서 살고 있는 이의 기준으로는 작은 도시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구가 10만명이 조금 넘는 독일의 한 작은 대학도시에서 공부하고 있는 저로서는 오랜만에 대도시에 들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지하철과 트램에 탄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몸을 부대낀다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독일에 오기 전 15년을 넘게 서울에서 살았는데,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뮌헨에서 들른 아카이브는 독일 현대사 연구소의 아카이브로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현대사의 주요 사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저는 Harro Schulze-Boysen이라는 인물이 1920-30년대에 부모님께 보낸 편지들을 확인하기 위해 아카이브에 들렀습니다. 부모님께 보낸 사적인 편지를 왜 후대의 역사학자가 들여다봐야하는지 궁금해 하실 수 있을텐데, 이 사람이 특이하게도 부모님께 일상에서 있었던 자잘한 일들을 모두 알렸기 때문입니다. 대략 한달 간격으로 쓴 편지에는 언제 누구를 만났는지, 그리고 누구의 소개로 또 다른 제 3자를 어떻게 만났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가 모두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은 훗날 나치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조직하려다가 나치에 의해 처형되는, 현재의 한국에는 거의 안 알려져 있지만, 1940년대의 독일에서는 꽤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인물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해당 시기를 연구하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남의 사생활이 담긴 내용을 들여다보는 것은 제법 재밌는 일입니다. 혹시 저만 그런가요? 물론 저도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남의 것을 마음대로 들여다보지는 않지만 말이죠 하하. 이 인물이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는 제가 연구를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정보 외에도 당시에 대학에서 어떤 교수의 수업을 흥미있게 듣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교수는 흔한 말로 '거품'인지, 어떤 친구들과 무엇을 하며 노는지, 어떤 이성을 사귀었는지 등이 써있었습니다. 당시 이 인물의 부모는 대학에 막 입학한 자식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아들이 혹시나 공산주의와 같은 좌파적 사상에 물들지는 않았는지 걱정을 많이 했죠. 특이하게도 이 부모와 자식은 편지를 통해서 각종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제가 들여다 본 편지의 주인공인 Schulze-Boysen은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될 것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헤겔과 마르크스의 책을 엄마가 한번이라도 들여다봤다면, 나를 유물론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발 혼자만의 생각으로 나를 판단하지 말고, 팩트에 기반한 토론을 하자"라는 말까지 합니다.
그런데 제가 편지를 읽으며 정말 재밌어 했던 것은, 이 인물이 금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Schulze-Boysen은 엄마와 아빠에게 편지를 쓰며,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은 세상 진지한 이야기를 몇 페이지 동안 쓰다가, 편지 마지막에는 갑자기 얼마만큼의 돈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다음 부모의 편지에서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쓰냐는 핀잔을 들었는지(현재 남아있는 것은 Schulze-Boysen이 부모님께 쓴 편지뿐이고, 부모가 Schulze-Boysen에게 쓴 편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디에 돈을 얼만큼 쓰는지 편지에 써서 보여주죠. "교재 사는데 몇 마르크, 새학기 시작한 김에 옷 몇벌 사는데 몇 마르크, 커피 및 차값으로 몇 마르크"등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커피값 뒤에는 괄호를 열고 "(커피에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쓰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베를린에서는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차 한잔 할래'로 대화가 시작하는 일이 많아요)"라는 나름의 정당화까지 합니다.
이렇게 연구에 필요한 부분을 찾아보고 발췌해 놓고, 중간중간 재밌는 부분을 읽으며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나는 죽기 전에 내가 남긴 메일과 카톡을 꼼꼼히 확인하고 없앨 것은 다 없앨 것이라고.

어쨌든 그렇게 할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날, 기차를 타기 전에 다하우에 다녀왔습니다. 다하우는 뮌헨 인근에 있는 소도시로, 나치 시기에 집단수용소가 건설되었던 곳입니다.

https://imgur.com/cW6ZPlc

나치의 집단수용소 입구에 새겨져 있던 문구인 "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 보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저 말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와 같은 의미인데, 초기에 나치는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용소를 건설한다는 선전을 했었죠. 이 문구는 그렇나 목적을 위해 새겨놓은 것입니다.
두시간 정도 수용소와 수용소안에 만들어놓은 박물관을 돌아다녔습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박물관의 내용을 대부분 미리 알고 있었는데, 그 중 몰랐던 것도 있었습니다. 바로 수용수들의 생활에 관한 부분이었는데요. 보통 아침 4시에 일어나서, 모든 수용수들이 공터로 나와 한시간 반 가량 차렷자세로 점호를 받습니다. 이때 움직이게 되면 해당 사람은 몽둥이와 채찍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점식식사까지 노동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한 시간 가량 행군을 하고, 다시 저녁까지는 노동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다시 한시간 가량 점호를 받다가 취침... 생각만 해도 끔직한 삶입니다.
그렇게 수용소 안을 거닐다가 마지막으로 가스실에 다다랐습니다.

https://imgur.com/L1v1n7F

문 위에 새겨진 Brausebad라는 단어는 샤워실이라는 뜻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수용되어 있는 이들을 속이기 위해서 가스실을 샤워실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런데 다녀온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수용소의 담장에 걸린 설명문이었습니다. 수용소의 인원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치는 담장을 설치했는데, 어느 시점 후에는 담장 근처로 접근하기만 해도 바로 그 자리에서 조준사격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수용소에서 적지 않은 인원이 일부러 담장으로 향했습니다. 수용소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담장으로 향했던 이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많은 생각에는 "지금의 나는 어쨌든 당시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와 같은 안도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역사학자로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도 있었습니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후로 한동안 눈앞의 논문만 보였는데, 오랜만에 제가 하는 나름의 직업적 활동에 관한 근본적 고민을 해볼 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뮌헨에 다녀오고 일주일을 보내면서, 매주 한 편 씩 역사를 주제로 만들고 있는 영상의 주제를 생각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하우에서 찍어온 사진을 가지고 영상을 만들고 싶었는데,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관해서는 도저히 10분 내외의 분량으로 만들 자신이 없었습니다. 10분이 아니라 100분쯤은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보다 더 많은 사람이 희생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지 못하는 사건에 대해 짧게나마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벨기에의 식민지 콩고에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벌어진 학살입니다. 이 사건만은 가급적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하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제가 만든 부족한 영상을 올립니다.

https://youtu.be/n29GEJmRdk8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5-2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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