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게시판입니다.
Date | 17/01/10 19:01:49 |
Name | 나방맨 |
Subject | [내포 저자]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
여태껏 문학 청년임을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요즘 부쩍 내가 너무 재미 없고 안이한 태도로 소설을 읽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보다 첨예한 독서를 위해 내포 저자의 개념을 이해하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 웨인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이면 충분할까요 ? 추천 부탁드립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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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내적 자의식입니다. 채만식의 <치숙>에서 화자는 숙부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독자는 없죠. 작가를 대신해서 굳이 내포 저자란 개념을 상정하는 건... 뭐,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건 스킵하고(구조주의 비판과 관련합니다) 그게 학적 개념이라서죠. 작품 분석이 작가론의 연장선으로 전락하는 걸 경계하기 위함이고요.
사실 소설을 어느 정도 읽은 독자라면 어련히 의식했을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특정하는 건 내포 저자 개념 자체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이 개념을 특정함으로서 해당 영역이 포괄... 더 보기
사실 소설을 어느 정도 읽은 독자라면 어련히 의식했을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특정하는 건 내포 저자 개념 자체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이 개념을 특정함으로서 해당 영역이 포괄... 더 보기
작품의 내적 자의식입니다. 채만식의 <치숙>에서 화자는 숙부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독자는 없죠. 작가를 대신해서 굳이 내포 저자란 개념을 상정하는 건... 뭐,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건 스킵하고(구조주의 비판과 관련합니다) 그게 학적 개념이라서죠. 작품 분석이 작가론의 연장선으로 전락하는 걸 경계하기 위함이고요.
사실 소설을 어느 정도 읽은 독자라면 어련히 의식했을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특정하는 건 내포 저자 개념 자체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이 개념을 특정함으로서 해당 영역이 포괄하는 다른 맥락들이 드러나기 때문인데요. 첫째가 내포 저자의 제 1 캐릭터로서 재정립되는 화자이며(3인칭을 포함하여), 둘째가 내포 저자에 대응될 내포 독자의 존재입니다. 화자의 캐릭터화를 상술하자면 소설을 담는 매체, 즉 텍스트의 미적 구현에 방점을 두면서도 새로운 기능성인 내러톨로지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죠. 판소리를 떠올리시면 쉬울 겁니다. 우리가 판소리에서 듣고자하는 건 스토리/줄거리가 아니라 내러티브/이야기(함)이죠. 한편 내포 독자는 작품의 자의식이 겨냥하고 있는 작품의 표준적인(일반적인이 아닙니다) 독자를 말하는데요. 뭐, 간단히 이 댓글을 예로 들면, 제가 쓰는 댓글이 상정하는 명시적인 청자는 나방맨님입니다. 허나 내포 독자로 말할 거 같으면 순문학 읽기가 취미인 중등 교육 이상을 이수하여 채만식의 치숙을 상식으로 받아들일만한 한국인이며, 제가 티타임게시판에 얼마 전 올린 게시글과 알료사님께서 링크하신 글을 읽은 홍차넷 유저가 될 겁니다. 그러나 실제 독자가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죠. 이 글을 본 누군가가 자기 블로그나 다른 커뮤니티에 퍼갈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 이 사이트에도 제가 상정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순 있으니까요. 퍼가는 경우까지는 몰라도 위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 홍차넷 유저라면 분명 제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독자입니다.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그 모든 감상자를 상정하지는 않습니다. 음악이 만국의 언어라지만 당장 대부분의 오페라들은 명백히 오페라가 쓰인 언어의 사용자를 상정해서 집필되었죠. 독일어나 이태리어 모르면 내용 파악도 어려운 작품 천지고 음악은 상황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전개됩니다. 오늘날에야 극장에서 자막까지 달아주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고요. 더불어 해당 시대의 종교적/사회적 관습들이 반영되는 경우도 있는데 후대 감상자 입장에서는 생산자가 표현하고자했던 정보 중 일부를 포기할 수밖에는 없죠. 작품 외적으로 배경지식을 얻은들 자연스레 체화되는 것과 미적 감흥이 다를 수밖에 없고요. 이런 경우까지 배려하는 생산자는 거의 없고, 따라서 그 경우에 해당하는 감상자들은 (설혹 자기 작품이 초역사성을 얻어 후손들도 즐기리라 자신했고 따라서 그네들 역시 감상자 일반으로 생각했을 바그너 같은 예술가라도) 생산자가 표준적으로, 즉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배려했을 어느 감상자와는 다른 지점에 있을 겁니다. 이때 어느 감상자가 내러톨로지에서 말하는 내포 독자에 해당하며, 작가가 임의로 상정했다는 점에서(그에 완벽히 대응될 사람이 현실에 있을지언정) 내포 저자와 마찬가지로 작품내에 갇힌 개념입니다.
사실 소설을 어느 정도 읽은 독자라면 어련히 의식했을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특정하는 건 내포 저자 개념 자체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이 개념을 특정함으로서 해당 영역이 포괄하는 다른 맥락들이 드러나기 때문인데요. 첫째가 내포 저자의 제 1 캐릭터로서 재정립되는 화자이며(3인칭을 포함하여), 둘째가 내포 저자에 대응될 내포 독자의 존재입니다. 화자의 캐릭터화를 상술하자면 소설을 담는 매체, 즉 텍스트의 미적 구현에 방점을 두면서도 새로운 기능성인 내러톨로지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죠. 판소리를 떠올리시면 쉬울 겁니다. 우리가 판소리에서 듣고자하는 건 스토리/줄거리가 아니라 내러티브/이야기(함)이죠. 한편 내포 독자는 작품의 자의식이 겨냥하고 있는 작품의 표준적인(일반적인이 아닙니다) 독자를 말하는데요. 뭐, 간단히 이 댓글을 예로 들면, 제가 쓰는 댓글이 상정하는 명시적인 청자는 나방맨님입니다. 허나 내포 독자로 말할 거 같으면 순문학 읽기가 취미인 중등 교육 이상을 이수하여 채만식의 치숙을 상식으로 받아들일만한 한국인이며, 제가 티타임게시판에 얼마 전 올린 게시글과 알료사님께서 링크하신 글을 읽은 홍차넷 유저가 될 겁니다. 그러나 실제 독자가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죠. 이 글을 본 누군가가 자기 블로그나 다른 커뮤니티에 퍼갈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 이 사이트에도 제가 상정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순 있으니까요. 퍼가는 경우까지는 몰라도 위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 홍차넷 유저라면 분명 제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독자입니다.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그 모든 감상자를 상정하지는 않습니다. 음악이 만국의 언어라지만 당장 대부분의 오페라들은 명백히 오페라가 쓰인 언어의 사용자를 상정해서 집필되었죠. 독일어나 이태리어 모르면 내용 파악도 어려운 작품 천지고 음악은 상황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전개됩니다. 오늘날에야 극장에서 자막까지 달아주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고요. 더불어 해당 시대의 종교적/사회적 관습들이 반영되는 경우도 있는데 후대 감상자 입장에서는 생산자가 표현하고자했던 정보 중 일부를 포기할 수밖에는 없죠. 작품 외적으로 배경지식을 얻은들 자연스레 체화되는 것과 미적 감흥이 다를 수밖에 없고요. 이런 경우까지 배려하는 생산자는 거의 없고, 따라서 그 경우에 해당하는 감상자들은 (설혹 자기 작품이 초역사성을 얻어 후손들도 즐기리라 자신했고 따라서 그네들 역시 감상자 일반으로 생각했을 바그너 같은 예술가라도) 생산자가 표준적으로, 즉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배려했을 어느 감상자와는 다른 지점에 있을 겁니다. 이때 어느 감상자가 내러톨로지에서 말하는 내포 독자에 해당하며, 작가가 임의로 상정했다는 점에서(그에 완벽히 대응될 사람이 현실에 있을지언정) 내포 저자와 마찬가지로 작품내에 갇힌 개념입니다.
좀 와 닿을만한 이야기로 바꿔보죠.
흔히 작가들 사이의 격언이라며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말이 있잖아요? 헌데 내포 저자를 의식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에겐 그저 옛날 얘기일 뿐이죠. 소설에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건 화자이며, 그러나 내러톨로지에서는 화자 또한 내포 저자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줘야할 대상"입니다. "말하지 않고 보여줘라"는 말 자체도 어불성설인 게, A가 B에 대해 떠들 때만큼 A에 대해 잘 보여줄 수도 없을테니까요. 치숙과 같은 1인칭 소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3인칭에... 더 보기
흔히 작가들 사이의 격언이라며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말이 있잖아요? 헌데 내포 저자를 의식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에겐 그저 옛날 얘기일 뿐이죠. 소설에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건 화자이며, 그러나 내러톨로지에서는 화자 또한 내포 저자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줘야할 대상"입니다. "말하지 않고 보여줘라"는 말 자체도 어불성설인 게, A가 B에 대해 떠들 때만큼 A에 대해 잘 보여줄 수도 없을테니까요. 치숙과 같은 1인칭 소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3인칭에... 더 보기
좀 와 닿을만한 이야기로 바꿔보죠.
흔히 작가들 사이의 격언이라며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말이 있잖아요? 헌데 내포 저자를 의식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에겐 그저 옛날 얘기일 뿐이죠. 소설에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건 화자이며, 그러나 내러톨로지에서는 화자 또한 내포 저자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줘야할 대상"입니다. "말하지 않고 보여줘라"는 말 자체도 어불성설인 게, A가 B에 대해 떠들 때만큼 A에 대해 잘 보여줄 수도 없을테니까요. 치숙과 같은 1인칭 소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3인칭에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가능하냐면... 작품 속에서 3인칭이란 작품이란 닫힌 세계 자체를 뜻하기 때문이죠. 즉, 이 경우 말하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케즈의 소설 <백년의 고독>을 떠올려보세요. 3인칭 작품이지만 화자의 독특한 말하기는 지시하는 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발화법 자체로 마콘도의 세계를 형상화하죠.
흔히 작가들 사이의 격언이라며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는 말이 있잖아요? 헌데 내포 저자를 의식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에겐 그저 옛날 얘기일 뿐이죠. 소설에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건 화자이며, 그러나 내러톨로지에서는 화자 또한 내포 저자를 통해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줘야할 대상"입니다. "말하지 않고 보여줘라"는 말 자체도 어불성설인 게, A가 B에 대해 떠들 때만큼 A에 대해 잘 보여줄 수도 없을테니까요. 치숙과 같은 1인칭 소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3인칭에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가능하냐면... 작품 속에서 3인칭이란 작품이란 닫힌 세계 자체를 뜻하기 때문이죠. 즉, 이 경우 말하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케즈의 소설 <백년의 고독>을 떠올려보세요. 3인칭 작품이지만 화자의 독특한 말하기는 지시하는 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발화법 자체로 마콘도의 세계를 형상화하죠.
내포 독자 역시 첨언해보자면...
연극계와 클래식 음악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컨텐츠 생산자들, 그러니까 배우와 연주자들이 내놓는 원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용인되기 때문이잖습니까? 셰익스피어고 베토벤이고 벌써 수백년 전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품이 상연/연주된 경우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 줄거리며 악상의 전개 과정을 꿰고 있기에 단지 연주를 하는 걸로는 새롭지 않지요. 연극/클래식 매니아라면 아마 골백번은 우습게 돌렸을 겁니다(저는 베토벤 5번 교향곡만 서로 다른 지휘자or악단의 연주로만 80종 넘게 ... 더 보기
연극계와 클래식 음악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컨텐츠 생산자들, 그러니까 배우와 연주자들이 내놓는 원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용인되기 때문이잖습니까? 셰익스피어고 베토벤이고 벌써 수백년 전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품이 상연/연주된 경우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 줄거리며 악상의 전개 과정을 꿰고 있기에 단지 연주를 하는 걸로는 새롭지 않지요. 연극/클래식 매니아라면 아마 골백번은 우습게 돌렸을 겁니다(저는 베토벤 5번 교향곡만 서로 다른 지휘자or악단의 연주로만 80종 넘게 ... 더 보기
내포 독자 역시 첨언해보자면...
연극계와 클래식 음악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컨텐츠 생산자들, 그러니까 배우와 연주자들이 내놓는 원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용인되기 때문이잖습니까? 셰익스피어고 베토벤이고 벌써 수백년 전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품이 상연/연주된 경우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 줄거리며 악상의 전개 과정을 꿰고 있기에 단지 연주를 하는 걸로는 새롭지 않지요. 연극/클래식 매니아라면 아마 골백번은 우습게 돌렸을 겁니다(저는 베토벤 5번 교향곡만 서로 다른 지휘자or악단의 연주로만 80종 넘게 들어봤는데... 이게 클래식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그닥 유난스러운 경우도 아니지요.). 위에서 언어의 장벽, 시대의 장벽을 말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장벽은 그 작품을 이미 수천번 넘게 보고/들어봤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새롭지 않고, 더 이상 새롭지 않으니 가장 순수한 감상자로 돌아가기 어렵죠. 배우와 연주자들이 목표하는 건 작품을 수천번은 보았을 사람들이 마치 처음 본 것과 같은 격렬한 감동을 느끼게끔, 그러니까 작품 자체가 의도한 원형적인 쾌감을 느끼게끔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매번 새롭게(이때 새롭게란 극단적으로가 아닙니다) 해석하는 것이구요.
그리고 [내포 독자] 개념이 이러한 해석 릴레이에 존재론적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현실의 독자를 내포 독자로 이끌기위함이라고요. 물론 개별 해석자가 상정한 내포 독자가 실제 작가가 상정했을 내포 독자와 같다고 확언할 순 없습니다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위에서 내포 독자가 작품에 갇힌 개념이라고 이야기한 게 이 때문이고요. 내포 독자는 작가에 대응되는 개념이 아니라 내포 저자에 대응되며... 많은 배우들, 연주자들은 오늘도 원전에서 그 내포 저자를 찾습니다(당연히 '모든' 연주자가 이처럼 현상학적 야망을 품는 건 아니고요. 아예 전혀 다른 의도에서 접근하는 연주자들도 간혹 있긴 합니다. 연극이야 제가 잘은 몰라서 말하기 뭣한데, 주워 듣기로는 이와 맥락이 전혀 다른 연기 방식도 있다던 거 같긴 하더군요.).
연극계와 클래식 음악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컨텐츠 생산자들, 그러니까 배우와 연주자들이 내놓는 원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용인되기 때문이잖습니까? 셰익스피어고 베토벤이고 벌써 수백년 전 죽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품이 상연/연주된 경우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그 줄거리며 악상의 전개 과정을 꿰고 있기에 단지 연주를 하는 걸로는 새롭지 않지요. 연극/클래식 매니아라면 아마 골백번은 우습게 돌렸을 겁니다(저는 베토벤 5번 교향곡만 서로 다른 지휘자or악단의 연주로만 80종 넘게 들어봤는데... 이게 클래식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그닥 유난스러운 경우도 아니지요.). 위에서 언어의 장벽, 시대의 장벽을 말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장벽은 그 작품을 이미 수천번 넘게 보고/들어봤다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새롭지 않고, 더 이상 새롭지 않으니 가장 순수한 감상자로 돌아가기 어렵죠. 배우와 연주자들이 목표하는 건 작품을 수천번은 보았을 사람들이 마치 처음 본 것과 같은 격렬한 감동을 느끼게끔, 그러니까 작품 자체가 의도한 원형적인 쾌감을 느끼게끔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매번 새롭게(이때 새롭게란 극단적으로가 아닙니다) 해석하는 것이구요.
그리고 [내포 독자] 개념이 이러한 해석 릴레이에 존재론적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현실의 독자를 내포 독자로 이끌기위함이라고요. 물론 개별 해석자가 상정한 내포 독자가 실제 작가가 상정했을 내포 독자와 같다고 확언할 순 없습니다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위에서 내포 독자가 작품에 갇힌 개념이라고 이야기한 게 이 때문이고요. 내포 독자는 작가에 대응되는 개념이 아니라 내포 저자에 대응되며... 많은 배우들, 연주자들은 오늘도 원전에서 그 내포 저자를 찾습니다(당연히 '모든' 연주자가 이처럼 현상학적 야망을 품는 건 아니고요. 아예 전혀 다른 의도에서 접근하는 연주자들도 간혹 있긴 합니다. 연극이야 제가 잘은 몰라서 말하기 뭣한데, 주워 듣기로는 이와 맥락이 전혀 다른 연기 방식도 있다던 거 같긴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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