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10/19 23:52:22
Name   아침커피
Subject   그러면 너 때문에 내가 못 죽은 거네 (1)
"애슐리!"
"우와, 안녕~"
"신기하다. 여기서 이렇게 보네."

은근 오래 전, 복학해서 한 학기를 마친 2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제대 후 복학 전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둔 돈에 자잘하게 적금 붓던 것을 깨서 캐나다로 배낭여행을 갔었어요.

애슐리는 그 직전 학기 때 우리 학교에 왔던 홍콩 출신 교환학생이었습니다. 광동어 이름도 있었는데 자기 홍콩 친구들도 자기를 영어 이름으로 부른다면서 그냥 애슐리라고 불러달라고 했었어요. 같은 전공 과목을 들었었는데 조별과제를 하면서 많이 친해졌습니다. 애슐리는 한국말을 굉장히 잘 했어요. 외국인 학생이 온다고 영어로 수업해야겠다며 긴장하셨던 교수님도 그냥 맘 편히 한국어로 수업하실 정도였습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어느 날 조모임에서 수다를 떨던 중에 제가 이번 방학 때 캐나다로 여행갈거라고 하자 애슐리가 놀라면서 자기도 교환학생이 끝나면 여름에 캐나다에 간다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냐, 일정이 어떻게 되냐 이야기를 해 보니 가기는 애슐리가 대략 저보다 3일 정도 먼저 가고 귀국 날짜는 똑같은 일정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귀국이라는 건 저는 한국, 애슐리는 홍콩이었지요. 자유여행인 것도 똑같고 여행 시작 장소가 토론토인것도 같길래 캐나다에 가면 한번 보자고 약속을 해 뒀었고, 실제로 이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땐 스마트폰은 커녕 노트북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제가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리 이메일로 약속을 다 잡아 놓아야 했습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약속 안 지키면 다른 한 사람이 약속 장소에서 대책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잘 만났습니다. 만난 곳은 토론토 외곽에 있는 카사 로마(Casa Loma)라는 성이었어요. 건물도 멋지고 정원도 참 잘 가꾸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성 안에서 한참 걷다가 시차적응이 안 된 탓에 너무 졸려서 잠시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습니다.

"애슐리, 여기 와서 어디어디 가 봤어? 토론토 어때?"
"어제까진 시내 돌아다녔어~ 앞으로 외곽 다니다가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고. 내일은 나이아가라 폭포 가 볼 예정이야."
"아 진짜? 어떻게 가는지 나 좀 알려줘. 나 여행 준비를 거의 못 하고 왔거든."
"그래? 그러면 내일 같이 갈래?"

그렇게 돼서 다음 날 일찍 약속장소에서 만나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게 되었습니다. 디카도 없던 시절이라 방수 케이스에 들어있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사진 매수를 한장 한장 세어 가며 사진을 찍었네요. 물이 진짜 어마어마하게 떨어지고, 그 물보라때문에 꼭 비 오는 것처럼 사방에 물방울이 튀는데 무지개까지 피어 있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교통편이랑 입장료 등을 잘 조사해놓은 애슐리 덕에 편하게 폭포 구경을 잘 했어요.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엔간하면 피곤해서 잠이 들었어야 정상이었을 텐데 시차 때문에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습니다. 시내까지 거리도 은근 멀고 해서 애슐리에게 말을 걸었어요.

"애슐리, 앞으로 여행 일정이 어떻게 돼?"
"이제 토론토는 어느정도 봤으니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서 최종적으로는 밴쿠버로 가려고~ 출국 비행기표가 밴쿠버 출발편이거든."

하면서 애슐리가 공책을 꺼내 자기 여행 일정표를 보여줬습니다. 캐나다 지도에 토론토에서 밴쿠버까지의 경로와 일정이 깔끔하게 표시되어 있었어요. 우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애슐리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너 일정은 어떻게 돼?"
"몰라."

대답하고 나니 뭔가 너무 성의없이 말한 것 같아 허겁지겁 덧붙였습니다.

"아무 계획 없이 왔어. 너무 쫓기면서 사는게 싫었거든."
"비행기표는 어떻게 돼?"
"한국 갈 때도 토론토 출발이야. 그런데 직항이 별로 없어서 국내선으로 밴쿠버까지 간 다음에 밴쿠버에서 갈아타야 하더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버스가 토론토 시내에 도착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꽤 멀리 있다 보니 토론토에 도착했을 때에는 꽤 어둑어둑해져 있었어요. 각자 머무는 게스트 하우스가 근처이기도 했고, 캐나다가 치안이 괜찮은 나라라고 해도 타지에서 여자 혼자 숙소 찾아가라고 하는 건 좀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바래다주기로 했습니다. TTC라고 불리던 토론토 전철로 근처까지 간 뒤에 내려서 걸어가는데 길가에서 역한 냄새가 났습니다. 이게 뭐지 하고 인상을 쓰다가 애슐리랑 눈이 마주쳤는데 애슐리가 말했어요.

"대마."
"아 그래? ... 근데 넌 이 냄새를 어떻게 알아?"
"홍콩에서도 외국인들이 많이 펴."

대마 냄새가 풍기는 외국의 밤길을 걷는 것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10분정도 더 걸어서 애슐리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난 내일 다른 도시로 가."
"캐나다에서 너 만나게 되니 참 신기하네. 덕분에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도 잘 했어. 남은 여행도 잘 해! 홍콩에 잘 가고."

그렇게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서 제 게스트 하우스 쪽으로 걸어가려 하는데 애슐리가 갑자기 저를 불렀습니다.

"계속 여행 같이 할래?"

혼자 여행하기에는 안전 등등이 많이 걱정된 모양이었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말에 생각을 좀 하다가, 어차피 계획 없이 온거 뭐 어때 하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습니다. 비행기표야 최악의 경우래봤자 토론토에서 밴쿠버 가는 국내선을 환불 못 받고 날리는 거고 밴쿠버에서 한국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니 괜찮겠다 싶었어요. 그러자고 대답했는데 애슐리가 좀 뻘쭘했는지 한 마디 물었습니다.

"그저께 토론토 와서 아직 구경 못 한 것 많을텐데 괜찮아?"
"뭐, 여기서 못 본 만큼 다른 곳에서 다른 것 보게 되겠지."

그렇게 다음 날 아침에 각자 짐 챙겨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간단한 인사 후 헤어졌습니다.

---

분량 조절에 매우 실패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조만간에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카테고리는 창작입니다. (__)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11-03 18:1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2
  • 이왜진?
  • 도네를 못 쏴서 일단 추천 박고 갑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기타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842 31
1417 기타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25 31
1416 기타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04 20
1415 기타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34 18
1414 기타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31 36
1413 기타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545 40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49 16
1411 기타『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42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18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75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12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41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77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3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39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06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686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81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87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61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79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29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76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49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51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