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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7/22 17:14:18
Name   j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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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워크래프트 3)낭만오크 이중헌의 이야기. 첫 번째.


한국의 게임 방송사들이 주최했던 초창기의 워3 대회는 수많은 스타와 명경기들을 배출한 최고의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 시대를 이뤘던 선수들의 이야기는 아주 단편적으로만 전해옵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선수인 이중헌 역시 그의 화려한 경력 보다는 불미스러운 사건의 용감한 폭로자로서 더 강하게 기억되는 실정이고요.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워서 몇 자 적어봅니다.



2002년 여름, 워크래프트 3가 발매되자 마자 한국의 게임 방송사들은 서둘러 워3 방송대회를 개최하면서 '워3의 스타리그화'를 추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만 나올 일이지만 그 때만 해도  방송사와 게이머, 팬들 모두 다 스타 1은 얼마 못 가서 생명이 다 해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고 워3는 스타 1의 완벽한 대체제가 될 거라는 어마어마한 기대를 받았죠.

여기서 주목할 점은 워3의 스타리그화 라는 대목입니다. 한국식 게임대회 모델인 스타리그는 선수들에게 모든 역량을 방송사 주최 대회에 집중할 것을 요구합니다. 국내 스타리그가 살아있는 동안 wcg나 ief 같은 해외 대회가 우승하면 좋고 아님 말고 수준의 비공식전 대우를 받았던 것 처럼 말이죠. 이게 가능했던 것은 타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높았던 인기와 자본 덕분이었습니다. 스포츠로 치면 미국식 스포츠 같은 거죠. 미국 스포츠가 해외와 호환되지 않는 드래프트, FA, 독자 규칙 등을 제정하는 것처럼 한국의 게임방송사 역시 구단들과 합의하여 자체 제작 맵을 사용하고 팀 대항전을 여는 등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워3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큰 기대와 투자를 받았기에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임 발매 후 약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양대 방송사에서 주최한 대회가 10개나 되었죠. 확장팩으로 넘어와서는 제법 큰 규모의 프로리그도 개최되고, 클랜들에게 기업 스폰서도 붙고, 야외 결승전도 치러지는 등 스타 1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모든 것은 오래가지 못 하고 사상누각처럼 무너졌습니다. 04년 중반 무렵부터 게임단은 줄줄이 해체하고 스폰서들은 떠나갔으며 온게임넷은 마지막 워3 대회를 한 번 주최한 후 손을 뗐습니다. 이는 한국의 워3 대회가 더 이상 게이머들을 한국에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05년에 접어들며 한국의 워3 게이머들은 좋건 싫건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려야 했습니다. WEG, W3 처럼 국내에서 주최한 대회들이 명맥을 잇긴 했으나 이미 워3의 중심은 해외로 이동해 있었죠. 선수들은 저마다 해외 게임단에 소속되어 해외의 워3 대회에 활발히 출전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국내 주도의 워3 대회는 실패로 끝났어도 한국은 오랫동안 워3의 세계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어느 나라 보다도 많이 보유한 하나의 대륙이었습니다. 특정 종족에서 한국 최고가 곧 세계 최고라 해도 결코 허언이 아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유수의 재능들이 모여들어 불꽃을 태웠던 한국의 워3 대회는 세계 대회에 결코 뒤지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자 거대한 이야기의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이 짧았던 황금기를 관통하는 워3의 슈퍼스타이자 전설이었던 선수가 바로 Dayfly, 이중헌입니다.

이중헌은 원래 워3 이전에도 스1, 쥬라기 원시전 등을 비롯한 여러 RTS 게임들을 해오던 게이머였습니다. 그러다가 02년에 워3가 발매되자 다른 게이머들이 그랬듯 그 또한 기회의 땅을 찾아 워3로 넘어옵니다. 그와 비슷하게 워3로 넘어온 게이머 가운데 정인호(hiki) 라는 게이머가 있었습니다. 초창기 오크의 빌드를 거의 혼자서 만들다시피 했다는 정인호는 게임 실력도 뛰어났지만 좋은 리더십과 야망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고,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그와 의기투합한 이중헌은 정인호가 창설한 Pooh 클랜에 가입합니다.

후일 정인호의 회고에 따르면 허름하고 좁은 방을 얻어서 클랜원들이 합숙하며 연습에 몰두해 실력을 길렀다고 하니 당시 타 클랜들이 취미의 연장선에서 운영되었던 것에 비하면 확연한 목적이 있었던 셈이죠. 이중헌 역시 이런 환경에서 연습에 매진하며 실력을 키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중헌이 최초로 시청자들 앞에 이름을 보인 것은 겜비씨에서 열린 한빛소프트배 2차 워3리그였습니다. 이 때 이중헌은 본선 진출만으로도 꽤 주목받는 선수였습니다. 왜냐하면 16인의 진출자 가운데 유일하게 오크로 예선을 통과한 게이머였기 때문이죠.

게임 발매 직후에 열린 1차 워3리그 까지만 해도 오크는 강한 종족이었습니다. 블러드 러스트를 쓰는 마법 유닛 샤먼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샤먼만 뽑으면 모든 종족을 상대할 수 있었죠. 스1로 치면 히드라에게 특수 기술로 체력 대신 에너지를 소모하는 스팀팩이 주어진 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 대회의 예선이 치러지기 3일 전에 1.03 패치가 행해지고 샤먼이 하향되며 오크는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사기 유닛 하나 너프되었다고 왜 종족이 몰락하는가 싶겠지만 오크는 기본 공격 유닛인 그런트가 스1의 스카웃처럼 값비싼 쓰레기 취급을 받는 유닛이었습니다. 그 대안으로 빠르게 테크를 올려 샤먼을 뽑는 것이 해결책이었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진 거죠.

오크의 대부 정인호가 허무하게 예선에서 탈락한 후 이대로는 어렵다는 인터뷰를 남겼고, 그와 쌍벽을 이루던 오크 게이머 김대호(showtime)는 아예 휴먼으로 플레이 해서 예선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이중헌이 본선에 진출했을 때는 나이트엘프가 절대 1강이고 휴먼이 뒤를 따르며 오크와 언데드는 사이좋게 밑바닥을 긁고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오크로 예선을 뚫은 이중헌은 데뷔도 하기 전에 이미 오크의 희망이라 불리고 있었고요. 단, 이중헌 본인은 오크의 희망이 아닌 낭만오크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두고두고 회자될 그의 별명입니다.

과연 샤먼을 대체할 오크의 희망을 이중헌이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 속에서 열린 첫 경기, 이중헌은 나이트엘프 게이머 명무신(driver)과 맞붙었습니다.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이중헌은 영웅 생산조차 생략하고 일꾼을 멀티로 빼돌려 빠르게 확장을 가져갔습니다. 금광을 지키는 크립들은 AI의 특징을 이용해 타워로 잡아버렸고요. 영웅을 뽑고 사냥을 해서 레벨업을 한다는 게임의 원칙을 거꾸로 뒤집은 파격적인 전략이었죠. 명무신은 오크의 병력 공백기를 노려 몇 번이고 멀티를 공격했지만 헤드헌터를 앞세운 이중헌의 결사적인 방어로 시간이 끌리는 동안 오크 기지에서 와이번이 생산되었습니다. 서로 유닛 없이 영웅만 남는 장기전 끝에 이중헌은 파시어의 궁극기를 펼치며 승리를 가져옵니다. 2티어 유닛인 샤먼이 못 쓰게 되었다면 빠르게 테크를 올려 와이번으로 승부를 본다, 이것이 이중헌이 오크에게 제시한 대안이었죠.

당당히 승자조로 진출한 이중헌은 지난 대회 우승자 추승호(shoo)를 상대로 정확한 타이밍의 찌르기 한 방에 이어 와이번 교전에서도 최종 승리를 거두며 gg를 받아냈습니다. 승자조 4강에서는 휴먼 주정규(juju)를 상대로 와이번을 쓰는 척 하며 이젠 퇴물이 된 줄 알았던 샤먼을 다시 꺼내드는 파격적인 선택으로 1경기 승리, 2경기에서는 '쓰레기라는 그런트도 내가 쓰면 다르다'를 보여주며 승리를 거두고 승자 결승에 오릅니다.

여기서 이중헌은 자신의 게이머 인생에서 가장 큰 숙적이 될 나이트엘프 게이머 임효진(anyppi)과 만납니다. 1경기는 초반부터 강하게 그런트로 견제를 걸어온 이중헌이 승리했지만 2경기에서는 임효진이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던 전술인 건물러시를 꺼내들며 승리. 이어진 경기에서 이중헌은 어떻게든 상대를 흔들고 기습 전략으로 밀어붙여 보려 하지만 임효진의 괴물 같은 수비력에 모두 막히며 1:3으로 역전패하죠. 패자결승에 떨어진 이중헌은 나이트엘프 임준영(eurof)을 상대로 3:2로 승리하며 다시금 임효진에게 도전하지만 이번에도 임효진의 정교한 견제와 단단한 전투력 앞에 무너지며 1:3으로 패해 준우승에 머뭅니다.

비록 이 대회에서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단체전 대회인 겜비씨의 클랜팀배틀(CTB)에서도 이중헌은 승승장구를 이어나갔습니다. 승자연전의 5전 3승 팀배틀 방식으로 치러진 이 대회에서 이중헌은 두 번이나 올킬을 기록했는데 두 번 모두 0:2로 몰린 상황에서 이뤄낸 역올킬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중 한 번이 다름 아닌 결승전이었고, 결승전 상대인 werra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을 무릎 꿇렸던 임효진이 속한 팀이었습니다. 역올킬을 완성한 5경기는 임효진과의 경기였는데 여기서 이중헌은 그림 같은 그런트 컨트롤로 승리를 따냈죠. 이것이 바로 워3 팬들 사이에서 전설로 전해지는 '설원을 달리는 그런트' 경기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중헌은 더 이상 오크의 희망이 아닌 오크의 태양이자 워3 최고의 선수이자 흥행카드로 자리매김 합니다. 드라마 같은 우승, 그리고 암울한 종족으로 환상적인 전략과 정교한 컨트롤을 보여주며 종족을 구원하는 이중헌에게 팬들은 열광할 수 밖에 없었죠. 오히려 우승한 임효진이 승자 결승에서 건물러시를 쓴 것 때문에 비난받으며 곱지 못 한 시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정작 이중헌 본인은 '블리자드의 문제이지 임효진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나엘이었으면 임효진보다 훨씬 더 많이 건물러시를 썼을 것이다' 라고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헌의 시대를 여는 초입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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