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10/11 16:27:02
Name   머랭
Subject   약간의 일탈과 음주 이야기
모 소설에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어렸을 때 나는 위로는 부족하고 아래로는 충분한 그런 아이였다. 그말인즉슨, 적당히 공부는 했지만 금지된 무언가를 굳이 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뭐 거창한 걸 하기엔 내 담이 그만큼 크지 않았으니, 이 이야기는 고작해야 미성년자 음주 이야기일 뿐이다.

내 첫 번째 공식적인 ‘금지된’ 음주는 열다섯살 때였다. 그렇지만, 이건 순전히 내 충동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담임 선생님은 전교조 출신의 열혈 남성 교사로, 대단히 열정적이었지만 사랑의 매를 놓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여름방학이었던가. 선생님은 우리들을 불러, 이틀간 학교에서 캠핑을 하게 해 주었다. 공포 영화도 봤고, 뭐 늘 그렇듯이 카레도 해 먹고, 뻔하지만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무려 여름방학에 굳이 아이들을 불러모은 선생님의 노력과 열정에 보답해야 되겠지만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당시 우리 반은 단합이 잘 되는 편이었다. 망 보는 애 서넛을 빼고는 선생님을 빼놓은 채 어느 교실에 모였다. 어떤 아이가 검은 비닐봉투를 꺼냈다. 그건 소주였다. 그 방 안에서는 좀 논다는 아이도 있었지만 그걸 접하지 못한 아이도 여럿이었다. 다같이 눈을 떼굴떼굴 굴리다 우리는 순서대로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 한 1/3쯤 마셨을까. 갑자기 교실 문이 열렸다. 무척 화가 난 선생님이 거기에 있었고, 곧 있으면 내 순서가 올 참이었다. 즐거운 여름방학 캠프는 결국 모두 기합 비슷한 것을 받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나는 무척 억울했다.

나쁜 짓을 하더라도 난 나서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때는 뭐랄까. 벌만 받고 내가 받아야할 상은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술에 대한 열망이라거나 동경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걸 마시지 못한다면 분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당시 친하던 친구 넷을 불렀다. 그 친구들도 나의 이 억울하고도 분한 마음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돈을 모았고 놀이터에 모였다. 누군가가 가져온 휴대용 라디오에서 당시 유행하는 그룹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놀이터란 공간은 상징적이었다. 집 근처 ㅇㅇ공고의 누구오빠라든지 누구언니가 이런 데서 모인다고들 했다. 실은 전혀 아니었지만. 우린 아주 우등생도 아니고 특별한 불량학생도 아니었다. 그당시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듯 싶다. 흑이든 백이든 무슨 상관이람. 적어도 회색보다는 낫지.

심정적으로 한밤중(사실 여덟시쯤이었다)에 미끄럼틀 밑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검은 봉투를 열었다. 그때 우리 반 친구가 사온 건 소주였지만 이번에도 우리는 그건 좀 겁이 나서 맥주를 샀다. 맥주 한 피처를 나눠서 꿀꺽꿀꺽 마셨는데 솔직히 그렇게 맛이 좋지는 않았다. 뭐 엄청 취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꽤 어중간했지만 그날 술을 마시지 못한 나머지 2/3의 반 친구들보다는 앞서나간 것이다.

애초에 묘한 경쟁의식으로 벌인 일이었기 때문에 그 뒤로 술을 마실 일은 없었다. 하나는 알았다. 나는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또 대규모로 일을 벌리기에는 뭔가 크게 충족되는 것도 없었다. 술을 다시는 안 마시겠다는 다짐같은 건 없었지만 뭐 또 마실 날이 오겠어 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두 번째 공식적인 음주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영국에 있었으니 10학년 때라도 해도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 나는 어중간하게 괜찮은 쪽이었지만 영어를 하나도 모르고 간 영국에서는 거의 변두리라고 봐도 좋았다. 부모님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를 어학원이 아닌 공립학교에 보냈고,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반 년정도는 준 벙어리로 지냈다. 그래도 혼자 다니리라는 법은 없는지 친구가 두 명은 생겼다. 한 명은 이탈리아 혼혈 친구로, 어순과 문법이 전혀 맞지 않는 내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줄 정도로 괜찮은 친구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영국 국적의 홍콩 친구였는데, 그 학년에 아시안이 나와 그 애 단 둘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인종적 의리를 지켜준 게 아니었나 싶다.

영국 공립학교의 비행은 뭐랄까. 한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잘 나가는 아이들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와 술은 잘 나감의 상징이랄까 아니면 일진의 상징이랄까 뭐 그런 거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이들이 담배처럼 보이는 대마초를 피웠다. 냄새가 하도 지독해서 영국 놈들은 담배도 뭘 저런 걸 피우나 투덜거렸더니, 친구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해 준 이야기였다.

첫 육개월은 거의 죽을둥살둥 했지만 나머지 육개월은 괜찮았다. 제법 친구와 농담도 하고 한 시간이면 못 돌아볼 곳이 없는 조그만 시내에도 구경을 다니다 보니, 이탈리아 친구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잠깐 딴 이야기를 하자면, 그 친구의 이름은 로라였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에 키가 170쯤 되는, 퍽 예쁜 친구였다. 한번은 학교 밴드부 남자애와 사귀었는데, 그 남자애가 나를 말도 못하는 아시안 어쩌고저쩌고라고 하자 그 남자를 뻥 차버렸다. 의리와 미모 둘 모두를 갖춘 훌륭한 친구였지만, 당시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감사인사는 땡큐와 판타스틱 혹은 베리베리 땡큐 정도였기 때문에 내 마음을 잘 전할 수는 없었다.

로라의 집은 전형적인 영국 주택이었다. 폭이 좁고 층이 많으며 손바닥 한뼘쯤 되는 앞뜰과 뒤뜰이 딸려있는 그런 집 말이다. 방이 좁아서 우리는 뒤뜰로 나갔고, 로라는 주방에서 라자냐를 만들어 내왔다. 감사인사를 좀 멋지게 하고 싶었던 나는 머릿속으로 이 단어 저 단어를 마구 조합해 보다가 결국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것으로 끝냈다. 로라는 싱글싱글 웃으며 엄마가 사둔 싸구려 와인을 땄다. 두 번째 음주는 첫 번째 음주만큼 일탈 행위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교 가는 길목에서 대마초를 뻑뻑 피우는 친구들이 있는데 음주가 뭐 대단한 일탈행위라고.

우리는 계단에 앉아 잔도 없이 포도주를 돌려 마셨다. 싸구려 포도주는 무척 달았고 조금 이상한 맛이 나기도 했지만 기분이 확실히 괜찮아졌다. 술이 깨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앉아 오래도록 수다를 떨었다. 누구랑 누구가 사귄다는 얘기라든지, 몇 학년 누구누구는 양다리였다든지. 시덥잖은 얘기 끝에 로라가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갈거야?
응.
거기 가서 우리 잊어버리면 안 돼.

다행히 약속하다라는 단어는 크게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다. 우리는 종종 로라네 집에서 모였고 새빨개진 얼굴이 진정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로라네 뒤뜰은 술 마시기 좋은 공간이었다. 선선한 공기, 아이들이 술 마시는 것 정도는 비행이라고도 여기지 않는 이웃들(이건 중요했다), 그리고 잔 없이 병으로 돌려마시는 것 특유의 분위기라고 해야하나.

영국에서 나는 종종 술을 마셨고 그러면 말을 좀 잘하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 봐야 시끄러운 부부싸움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지금 나에게 고르라고 해도 로라네 뒤뜰을 고르지 이른 귀가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거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좀 더 어중간한 학생이 되었다. 영국 생활 일년이 더해진 덕분이었다. 난 순조롭게 원래 생활로 돌아갔고 음주를 하거나 영국제 신문물을 소개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뒤로 십년동안, 살아가는 것이 정말 버거웠다는 기억밖에 안 든다.

어제 홀로 적당한 가격의 와인 한 잔을 따르면서 문득 그 때 생각이 났다. 예전에는 누구에게라도 말을 하고 싶을 때 술을 마셨는데 요새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기 싫을 때 술을 마시다니. 로라네 뒤뜰이 없다는 게 사람을 이렇게 퇴보시킨다.

맛이니 향이니 숙성이니 뭐니 해도 결국 나에게 술은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니 술을 마실 때는 약간의 일탈이라도 곁들여야지. 막 나가는 건 이제 좀 힘든데, 뭐 좋은 거 없으려나.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10-26 07:2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9
  • 담담한 글에는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16 일상/생각기록하는 도구에 대한 욕망... (1) 25 *alchemist* 22/06/22 4126 18
1242 IT/컴퓨터망사용료 이슈에 대한 드라이한 이야기 20 Leeka 22/09/30 4127 9
1171 기타이어령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7 아침커피 22/02/27 4131 53
1165 정치/사회한국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의 역설 - 행복해졌는데 자살, 자해가 증가? 7 카르스 22/02/03 4132 8
1199 꿀팁/강좌전자제품에 참 좋은 BW-100 11 자몽에이드 22/05/09 4134 13
1255 체육/스포츠미식축구와 축구. 미국이 축구에 진심펀치를 사용하면 최강이 될까? 19 joel 22/12/05 4153 18
1039 요리/음식고구마 스프를 만들어봅시다~! 13 whenyouinRome... 20/12/13 4156 14
1163 일상/생각그 식탁은 널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2 Erzenico 22/01/22 4162 29
1258 IT/컴퓨터(장문주의) 전공자로서 보는 ChatGPT에서의 몇 가지 인상깊은 문답들 및 분석 9 듣보잡 22/12/17 4163 19
1306 문화/예술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반복 대사들 22 서포트벡터 23/06/14 4167 8
1206 정치/사회연장근로 거부에 대한 업무방해죄 건 헌법재판소 결정 설명 4 당근매니아 22/05/26 4168 15
1215 여행[베트남 붕따우 여행] 중장년 분들에게 추천하는 여행지. 긴글주의 18 사이공 독거 노총각 22/06/19 4173 15
1135 일상/생각약간의 일탈과 음주 이야기 3 머랭 21/10/11 4184 19
1303 일상/생각난임로그 part1 49 요미 23/05/21 4189 69
983 여행나무를 만나러 가는 여행 3 하얀 20/07/14 4193 11
1194 문화/예술2022 걸그룹 1/3 17 헬리제의우울 22/05/01 4201 19
1073 일상/생각그냥 아이 키우는 얘기. 5 늘쩡 21/03/25 4210 19
1270 경제인구구조 변화가 세계 경제에 미칠 6가지 영향 14 카르스 23/01/27 4215 10
1131 여행[스압/사진多]추석 제주 여행기 20 나단 21/09/27 4222 25
1027 일상/생각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고 4 아복아복 20/11/05 4262 12
1006 기타온라인 쇼핑 관련 Tip..?! - 판매자 관점에서... 2 니누얼 20/09/16 4329 12
1157 일상/생각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2021년 결산) (스압주의) 24 쉬군 21/12/31 4339 32
1168 일상/생각길 잃은 노인 분을 만났습니다. 6 nothing 22/02/18 4341 45
1305 창작서울에 아직도 이런데가 있네? 7 아파 23/06/01 4386 24
987 일상/생각천하장사 고양이 3 아침커피 20/07/21 4396 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