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1/11/16 19:44:31
Name   Regenbogen
Subject   어느 유서깊은 양반가문 이야기.

제 조부님은 술한잔 들어가시면 늘상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우리 집안은 유서깊은 양반가문이다]

하지만… 아니에요. 우리가 양반가문 아닌건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돈주고 족보 산거 알고 있었거등요.

구한말 고종시절 고조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모 문중 선산 관리하는 묘지기 외노비로 지금의 시골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세경 대신 땅 몇마지기와 산 두 답 땅문서를 받은 대신 선산을 관리하고 매년 시제 음식을 장만하는 조건이었지요.

조선시대에는 고조할아버님이, 일제시대에는 증조할아버님이 그 때 받은 전답을 길러 자식들을 낳고 키웠습니다. 근데 증조할아버지 이후로 아무도 그 묘지기를 물려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증조부께선 5남 6녀가 있으셨으나 할아버지 형제분 다섯분들 중 누구도 외노비가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신분제가 없어졌기도 하고 세상이 바뀐 탓이었겠지요. 자식들은 난 더이상 노비가 아니니 묘지기를 하지 않겠다 거부하셨고 평생을 노비로 살아오신 증조부께선 당연히 아들 중 누군가 받는게 도리라고 생각하셨던 듯 합니다.

결국 당시 막내였던 겨우 열 아홉이었던 제 할아버지가 그 문중에게서 받은 땅을 조건으로 묘지기를 이어 나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까지요. 해방 후 현행법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100년 전 증여받은 그 땅들의 소유권은 이미 할아버지것이었기에 그집 묘지기 노릇을 거부해도 아무런 법적 도의적 책임은 없었으나 할아버지는 선대로부터 받은 묘지기 역할을 가시는 날까지 묵묵히 이어가셨습니다.

결국 100년 넘게 지긋지긋하게 따라오던 외노비의 멍에는 아버지 대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문중도 그때부터 더이상 우리집에 묘지기 노릇을 하라 요구하지도 않고 알아서 하더군요. 할아버지는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그 묘지기를 해방 이후로도 십수년간 계속 하셨을까요? 저도 그 이유는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해 그 문중 사람들이 시제를 지내러 온날 본 할아버지 모습에서 막연히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알콜중독에 그 불같던 할아버지가 그 문중 사람들 앞에서 어딘가 주늑이 들어 굽신거리던 모습에서요. 늘상 입에 달고 사시던 [유서 깊은 양반가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작아진 모습. 그러다가 아버지가 일을 도와주러 오시자 급 당당해지시며 너는 이런거 하는거 아니다 정색하시고 쫒아 내시던 모습에서요.

할아버지는 그 깡시골 지지리도 못사는 동네 중에서도 못살던 집에서 아버지를 대학까지 보내셨습니다. 말이 쉬워 대학이지 60년대 도시에서도 열에 하나나 겨우 대학에 가던 시절이었고 가난한 시골에선 중학교만 나와도 면사무소 주사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리는 물론 면에서 한명 겨우 대학에 갈까말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형제 많은 깡시골 가난한 집에서 장남을 대학에 보내기 위한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고모님들이 열다섯 열여섯부터 방직공장, 고무공장에 들어가 돈을 벌었습니다. 그 돈은 고스란히 아버지 중학교 고등학교 학비에 들어 갔습니다. 고모님들의 피땀 때문인지 할아버지 치성 때문인지 아버지는 천재 소리 들으며 공부를 썩 잘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대만큼 공부를 못하는 걸 아버지는 이해를 못하셨나 봅니다. 지지리도 못난 멍청한 아들이었죠. 할아버지 바람대로 아버지는 우수한 성적으로 당시 가난한 집 아들들의 입신양명 엘리트 코스였던 육사에 지원하셨으나…  까막눈이시던 큰할아버님이 난리통에 쌀 한됫박 받고 지장 찍어준 남로당 입당원서 때문에 성분조회에서 떨어지셨습니다. 그 일로 큰 할아버님과 연을 끊기도 하셨다 들었습니다. 후 교장선생님 신원 보증으로 교대에 겨우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합격한 날 할아버지는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하셨답니다. 동리에서 몇년만에 대학에 간거였으니요. 후로도 할아버지의 자긍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우리 큰 아들 대학 보내 나랏녹을 받는 교사를 만들었다. 너희들과는 다르다. 크나 큰 자랑거리셨죠. 그토록 바라시던 공직에 나간 [양반가문]이 되었을테니까요.

할아버지께서는 세상이 두번 바뀌었어도 100년을 넘게 져온 노비의 멍에를 아들대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는 유서깊은 양반가문]이라 그토록 자랑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평생 소원을 겨우 이루셨을테니요.





뱀발. 우리 시골 개발 안되나… 나도 그 땅 팔아서 돈벼락 맞아보게요. 이히히히~~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11-30 07:5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5
  • 훈훈하다고 해야하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24 정치/사회양심적 병역 거부 무죄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25 Danial Plainview 18/11/04 6118 8
266 기타양자역학 의식의 흐름: 더 퍼스트 어벤져 37 Event Horizon 16/09/16 6525 13
533 과학양자역학 의식의 흐름: 아이러니, 말도 안 돼 25 다시갑시다 17/10/24 8854 18
269 과학양자역학 의식의 흐름: 월급 D 루팡 31 Event Horizon 16/09/22 8802 12
1087 일상/생각어느 개발자의 현타 26 거소 21/05/04 7291 35
236 IT/컴퓨터어느 게임 회사 이야기 (1) 26 NULLPointer 16/07/19 21916 29
1023 창작어느 과학적인 하루 5 심해냉장고 20/10/27 4997 14
1 의료/건강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오 65 레지엔 15/06/01 11865 0
209 일상/생각어느 시골 병원 이야기 35 Beer Inside 16/05/28 7374 12
1144 일상/생각어느 유서깊은 양반가문 이야기. 18 Regenbogen 21/11/16 5240 35
1043 일상/생각어느 택배 노동자의 한탄 14 토비 20/12/26 5216 40
663 여행어두운 현대사와 화려한 자연경관 - 크로아티아 12 호타루 18/07/15 6013 21
353 요리/음식어떤 백작과 짝퉁 홍차 10 사슴도치 17/01/24 6621 16
446 일상/생각어떤 변호사의 이혼소송에 관한 글을 보고. 11 사악군 17/06/05 7869 26
782 의료/건강어떻게 의사는 사고하는가 - 1. 단어 정의 21 세란마구리 19/03/21 8208 15
787 의료/건강어떻게 의사는 사고하는가 - 2. 진단=사후확률Up & 진단의 두 축 3 세란마구리 19/04/03 5649 10
783 의료/건강어떻게 의사는 사고하는가 - 번외. ROC와 카파통계량 9 세란마구리 19/03/22 6299 11
1005 일상/생각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27 Schweigen 20/09/07 7392 70
1314 창작어쩌다 보니 그림을 그리게 된 건에 대하여 61 퐁퐁파타퐁 23/07/25 3425 15
917 일상/생각엄마 덴마크가 나 놀렸어요 ㅜㅠ 69 구밀복검 20/01/29 12480 122
362 일상/생각엄마. 16 줄리엣 17/02/09 5151 27
1094 일상/생각엄마는 내 찢어진 츄리닝을 보고 우셨다 3 염깨비 21/06/04 4620 35
1190 일상/생각엄마의 틀니 13 풀잎 22/04/23 3585 65
1266 의료/건강엄밀한 용어의 어려움에 대한 소고 37 Mariage Frères 23/01/12 3730 29
1369 정치/사회업무개시명령의 효력 및 수사대응전략 8 김비버 24/02/21 2084 16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