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2/06/01 02:00:34
Name   nothing
Subject   손절의 시대
어떤 키워드들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탄생하거나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2000년대 언젠가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웰빙]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린라이트] 라는 단어가 유행하게 된 맥락 뒤에는 남녀 문제와 성 문제를 공개적인 영역에서 당당하게 논의하게 된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습게도 지금은 좀 퇴보한 모양새입니다.) 먹고 살기 퍽퍽해진 시대에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튀어나오기도 했구요. 헬조선을 견디다 못해 [욜로]라는 새로운 종류의 라이프 스타일이 유행을 타기도 했습니다. 가상화폐와 코로나 유동성이 놓여진 시대에는 [파이어족] 이라던가, [경제적 자유] 같은 단어들이 입에 많이 오르내렸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어떨까요. 지금 시대를 대변하는 단어가 있을까요. 저는 어쩐지 [손절]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손절이라는 단어는 다들 아시겠지만 원래 주식을 매입했는데 주가가 떨어져서 손해를 감수하고 매도하는 손절매라는 단어가 원형입니다. 하지만 어쩐지 요즘에는 사람간의 관계를 끊어내는 의미로써의 신조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용례를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합니다. [친구를 손절하고, 여자친구를 손절하고, 부모를 손절합니다.]

가끔 인터넷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는 글들을 종종 봅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못돌려받고 있다, 남자 친구 핸드폰에서 전 여자친구의 사진을 발견했다, 결혼을 앞두고 장인 될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다. 어떻게 해야 되냐. 댓글들은 대부분 손절을 이야기합니다. [손절하세요. 일찍 알게되서 다행이네요. 그런 관계를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유지할 필요가 있나요. 손절하세요.]

바야흐로 그런 시대인 것 같긴 합니다. 각자에게 요구하는 도덕성, 인격, 상식 수준들은 모두 상향 평준화되었고 흠결 사유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아웃입니다. 그 대상이 공인이던, 랜선 너머의 익명의 누군가던, 20년 지기 고향친구던 이해의 여지는 없고 우리는 이제 우리의 곁을 내어주는 것을 어색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도 익명성의 힘을 빌어서 인터넷 상에 고민글을 종종 올리곤 했습니다. 대충 10여 년 전 쯤 이었을까요. 당시 여자친구와 다툼이 있었고 그 친구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 속상하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댓글이 달렸고 대부분 저의 속상함에 공감해주시며 이별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이미 손절의 시대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헤어지라는 내용의 댓글이 한창 폭발하고 있을 무렵 쪽지가 한 통 날아옵니다. 내용인 즉, "댓글로 올리면 논쟁이 커질 것 같아 쪽지로 보낸다. 나도 예전에 남자친구와 비슷한 종류의 다툼을 겪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상황에 매몰되어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남자친구에게 했으며,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는 많이 후회하고 사과를 했다. 사람이 코너에 몰리면 그 정도 실수는 할 수 있는 것 같다. 당신의 여자친구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잠깐 만나는 가벼운 관계가 아니라면 그 친구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조금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떻겠냐" 였습니다. 마음 속 무게추가 한창 이별 쪽으로 쏠려있다가 이 쪽지 한 통에 금새 이성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유부단하고 귀가 팔랑거리는 타입이라서 헤어지라는 댓글들을 봤을 때는 정말 이 사건이 용납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종류의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 쪽지를 읽고 생각해보니 '정말 이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인가, 아니면 그럴 수도 있을만한 종류의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이내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다시 다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지식이, 경험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언을 합니다. 의도와 다르게 상황에 의해 천하의 나쁜 놈이 되어 버리는 오해를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무르익은 관계는 실수와 오해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정말 그러한지, 혹은 너그럽게 보면 그려려니 할 수 있는 종류의 일들인지 모르겠습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06-12 23:4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52
  • 가즈아ㅏㅏㅏㅏㅏㅏㅏ
  • 예전부터 많이 생각하던 주제였는데 생각해볼만한 글 감사합니다.
  • ㅁㄷ
  • 재밌네요 다시 만난 이후의 이야기도 궁금... 얼마나 더 오래 만났는지, 관련된 트러블은 없었는지 등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9 기타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6 알료사 24/11/20 5137 34
1418 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1317 33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959 32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1196 21
1415 정치/사회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2307 18
1414 일상/생각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1186 36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심해냉장고 24/10/20 1817 41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2115 16
1411 문학『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1128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409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275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617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262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2165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789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608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2088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843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770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3022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2010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268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2077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285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839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