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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12/05 20:09:09
Name   joel
Subject   미식축구와 축구. 미국이 축구에 진심펀치를 사용하면 최강이 될까?
월드컵이 되면 축구팬들이 으레히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은 월드컵에 별 관심 없다면서?"
"미국은 4대 스포츠가 인기 있어서 그래"
"미국에서 축구 인기가 올라가면 다 씹어먹을 걸? NFL 괴물들이 축구한다고 생각해봐."

이런 이야길 하다보면 미국에서도 점점 축구 인기가 오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뒤를 잇습니다. 그러다보면 또 좌중에서는 머지않아 미국이 전세계 축구를 지배할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지요. 그런데 이 소리 한 10년도 더 전부터 들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님 언제 세계 지배하시나요? 하프라이프 3는 언제 나옵니까? 한국 출판시장에서 전자책은 언제 종이책 밀어내고 대세가 되죠?

그 대답은 흐르는 바람 속에 있다 치고, 정말 미국이 '크하하 내가 축구에 조금만 힘을 줘도 피파는 죽는다' 가 사실일지 봅시다. 이 얘길 하면 항상 들먹여지는 것이 미식축구의 탈인간급 괴물들입니다. '100kg이 넘는 거구들이 100m를 10초에 달린다더라 ㅎㄷㄷ 저 재능으로 축구하면 어떻게 막냐' 라는 거죠.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왜 NFL이 아닌 다른 종목에는 저런 괴물들이 없는 걸까요? 왜 축구는 저런 괴물들을 볼 수 없는 걸까요? 흔히 인터넷에선 그 대답을 최고의 운동 재능들을 NFL이 다 쓸어가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아예 미국 내에서 최고 유망주는 NFL로 가고 그 다음은 NBA, 또 다음은 MLB로 간다 라는 카스트 제도스런 도식마저 있는 판이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NFL의 인기는 미국 밖을 나서지 못 하거든요. '미국인'이 인종적으로 타 대륙인들과 구분되는 초사이어인도 아닐진대, 그저 최고의 선수들이 NFL로 몰리기 때문에 다른 종목엔 저런 선수가 없다? 그건 이상합니다. NFL이 전세계에 빈틈없는 스카우트의 그물을 뿌려두고 전 세계 최상위 유망주들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애시당초 최고의 운동재능들을 NFL이 쓸어간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스포츠 유망주 라는 것이 무슨 줄기세포나 라바처럼 어느 종목으로건 마음대로 분화해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닐진대, 어떻게 종목간의 재능들을 카스트제도처럼 줄 세우겠습니까? 심지어 같은 종목 안에서도 포지션에 따라 요구하는 재능과 신체 조건이 다른데 말이죠. 따라서 NFL이 좋은 재능들 다 쓸어가서 그렇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방금 언급했습니다. '종목에 따라 요구하는 특성과 재능이 다르다'

미식축구는 정규시즌이 17경기입니다. 여기에 플레이오프를 합치면 3~4경기를 더 합니다. 딱히 국제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니 1년에 21경기를 뛰는 것이 최대인 셈이죠. 워낙 거친 종목 특성 탓에 이 21경기조차 선수들이 힘들다고는 합니다만. 1경기의 정규 시간은 15분 씩 4쿼터로 60분, 중간에 20분짜리 하프 타임 1회와 2분짜리 휴식시간 2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식축구는 공격팀과 수비팀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공격팀은 아군이 수비를 할 때는 휴식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기본적으로 턴제 방식이다 보니 경기가 멈췄다 이어졌다를 반복합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미식축구는 오래 뛸 필요가 없습니다. 짧은 순간 힘을 쏟아내는 것이 중요하지요. 지구력보다는 근력, 순발력, 속도가 훨씬 중요합니다.

반대로 축구는 어마어마한 지구력을 요하는 종목입니다. 1경기 90분에 쉬는 시간은 한 번 밖에 없고 작전타임으로 경기가 끊기지도 않으며 실시간으로 불규칙하게 급가속과 감속을 반복하며 뛰어야 하죠. 클럽에서의 리그 경기만도 38경기에 컵대회와 유럽 대항전, 국가대표 경기를 합치면 최상급 선수들은 1년에 못해도 50경기 이상, 심하면 6~70경기를 뛸 수도 있죠. 시즌 중에 A매치가 되면 비행기 타고 멀리 날아가서 국대 경기 뛰다 돌아오는 건 덤이고요. 축구 선수로서 뛰기 위해 필요로 하는 기본 지구력 능력치 하한선이 매우 높습니다. 아무리 힘이 좋고 덩치가 크고 빨라도, 이걸 버텨낼 체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거든요. 이게 중요합니다.

이따금 축구를 보는 사람들조차 이 사실을 너무 경시한다 싶은데, 조기축구라도 뛰어보면 축구가 죽어라 힘들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반인 수준에선 축구 이기고 싶으면 공 잡고 연습할 필요도 없어요. 죽어라 뛰어서 체력만 늘려도 다 씹어먹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건 선수들에게도 사실 힘든 거죠. 저 짓거리를 1년에 60번씩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물인 거에요.

그런데 NFL 선수에게 필요한 힘과 덩치는, 이 지구력을 깎아먹는 요인이 됩니다. 현존하는 스포츠 종목 중 아마도 가장 큰 지구력을 요하는 종목이 마라톤일텐데, 마라토너 중 키 180이 넘는 선수가 드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마라토너는 160~170 정도의 키가 거의 대부분이죠. 이건 단순히 징크스나 현상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근거가 있는데,

1. 체중은 키의 세제곱에 비례하지만 표면적은 제곱에 비례한다. 키가 커지고 덩치가 커지면 몸무게 대비 체열발산의 효율이 떨어진다. 특정 생물의 지구력 한계를 결정하는 것이 체온의 한계임을 감안하면 이는 치명적인 단점.

2. 인간이 운동을 할 때 충격량을 감당해야 할 인대, 건, 관절의 내구도는 키와 몸무게에 정비례 해서 증가하는 것이 아니므로 키가 크고 몸무게가 높을수록 불리하다. 현재 축구계의 괴물인 엘링 홀란에게 쏟아지는 부상 우려의 목소리가 바로 이런 이유.

미국 스포츠이지만 축구 못지 않게(어쩌면 축구보다 더) 높은 지구력을 요하는 농구를 봅시다. 농구 선수들도 NFL처럼 키 크고 힘 세면 이익입니다만 그들 역시 NFL 선수들 같은 몸을 보유하진 않습니다.

NFL의 괴물들이 100kg의 거구로 100m를 10초에 뛸 수는 있겠지만 만약 90분을 저렇게 뛰어야 하는 몸을 만들라고 한다면, 미식축구 선수들의 체형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질 겁니다.

이 뿐만이 아니죠. 축구는 태클로 상대의 발 쪽을 노리는 플레이가 용인됩니다. 정확히는 발 근처에 있는 공을 향해 태클해야 용인되는 거지만 이로 인해 축구선수들은 수도없이 다리를 걷어차이는 고통을 안고 뜁니다. 이 경우도 키 크고 근육량이 많은 선수들에게 불리하죠. 나무 젓가락을 분지를 때에 길이가 길수록 더 잘 부러지듯 다리가 길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부상 위험도 당연히 커집니다.

또, 공을 손으로 쥘 수 있는 미식축구와 달리 축구는 공을 발로 차는 운동이지요. 상대 앞에서 공을 지켜내려면 그저 빠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민첩하고 방향을 바꾸고 급가속과 감속을 반복해야 하는데 체중이 높을수록 무릎과 발목에 걸리는 부하가 크게 늘어납니다. 이래서 미식축구도 모든 선수가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하는 건 아닙니다. 상대 수비를 요리조리 피해다녀야 하는 러닝백 같은 포지션은 생각보다 작고 호리호리(어디까지나 NFL 기준으로)한 체형이지요. 한 마디로 축구의 거의 모든 특성들이 미식축구와는 맞지 않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NFL이건 NBA이건 축구건, 각 종목에는 종목에 맞는 특성과 재능, 신체조건이 있으며 그 어떤 종목도 타 종목에 비해 절대적이고도 우월한 재능을 보유하지는 못 합니다. 야구는 야구 잘 하는 놈이 잘 하고, 미식축구잘잘은 미식축구잘잘이고, 축잘잘은 축잘잘이죠. 이따금 축구에서 힘과 속도, 높이가 무서운 무기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축구선수로서' 그런 것이지 이를 미식축구에서 찾는 것은 마라토너에게 100m 주자와 같은 속도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우행일 뿐이죠.

그럼 미국이 축구에 진심펀치를 쓰면 축구 강국이 될 거라는 건 잘못된 예측인가? 그건 또 아닙니다. 미국은 하나의 대륙이나 마찬가지고, 엄청난 부와 인적 자원들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축구에 쏠리기 시작한다면 당연히 어마어마한 효과를 낼 수 있지요.

그러나 인구 14억 중국과 인구 350만 우루과이의 사례처럼 중요한 것은 인구가 아니라 '해당 종목을 즐기는 인구'이고, 미국에서 굳건한 4대 스포츠의  아성을 축구가 그리 단기간 내에 뚫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곤 여겨지지 않네요. 히스패닉들의 증가로 축구가 점점 보급되고 있고 미국 내에서도 축구 저변이 넓어지고는 있다 합니다만,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죠.

훗날 미국이 축구로 브프잉독아 등등을 다 깨부시고 다니는 블록버스터 축구의 시대가 온다 한들, 그건 '미식축구 선수가 울부짖었다 크아아앙 미식축구 선수가 축구를 하니 졸라 쎄서 아무도 못 막았다' 같은 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저변의 확대와 축구에 걸맞는 재능들을 육성한 결과일 테고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12-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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