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2/12/18 18:05:24
Name   열한시육분
Subject   4가지 각도에서 보는 낫적혈구병
1. 중등교육 과학 시간: 첫 만남
겸형적혈구빈혈증은 적혈구의 존재를 배우고 몇 년 후 멘델유전과 우성, 열성에 대해 배울 때 대표적으로 접하게 되는 유전질환입니다. 우성이 좋은 것이고 열성이 못난 것이 아니라는 선생님들의 잔소리를 들으며, 훌륭한 과학자들이 어떤 유전자를 찾아서 그 유전자 두 짝 모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상염색체 열성 유전)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단백질 이름 (베타글로빈)이나 악독한 경우 아미노산 자리나 이름 (6번 아미노산이 글루탐산에서 발린으로) 같은 것이 시험에 나오죠. 아무튼 이렇게 형태가 변화한 적혈구는 뭉치기가 쉬워 혈류에 지장을 초래하고 수명도 짧아 빈혈도 옵니다. 돌연변이 하나가 이렇게 중요하고 이렇게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하면서 학생들을 생명공학과로 이끄는 대표적인 예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2. 고등교육에서의 두 번째 만남
그렇다면 이러한 유전질환의 존재의 이유는 있을까? 그저 불운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듯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뿐일까? 아무래도 존재의 이유가 있어보인다는 점을 대학 교육에서 배우게 됩니다. 두 짝 모두가 돌연변이 유전자가 아니고 한 짝만 돌연변이 유전자일 경우, 말을 살짝 바꿔서 낫적혈구형질(sickle cell trait)이라고 하는데 이는 낫적혈구병과 달리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고, 다만 생리적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을 때에만 증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형질이 장점인 점은, 예전부터 사람들을 괴롭혀온 말라리아에 강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까지 빈혈과 혈관 막힘 등으로 지장을 받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라리아 원충은 처음에 간으로 침투했다가 이후 적혈구를 중심으로 계속 생활사를 도는데, 이때 낫적혈구형질을 가진 사람에서 비율이 높아지는 낫형 적혈구가 말라리아원충이 침투하기에는 별로인 적혈구라 생존에 유리합니다. 결국 운빨 게임으로 상염색체 열성 유전이 된 사람은 인생이 골치 아프지만, 더 많은 수의 단일유전자 보유자는 인생에서 죽을 위기를 유전자 덕택에 넘길 수 있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내용에 추론이 섞인 매력적인 내용이라 이런 내용은 논술이나 면접 주제로도 종종 등장합니다.

3. 라디오 스토리에서의 세 번째 만남
위와 같은 이유로 이 돌연변이 유전자는 적자생존에 의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일정 숫자가 보존되어 현대에도 존재하며, 말라리아라는 예에서 보듯이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는 낫적혈구병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등교육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희귀병이니만큼 치료제도 잘 되어있고 빈혈이야 뭐, 철분제 더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 해결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안타깝게도 오산입니다. 일단 빈혈이 문제가 아니고, 예상치 못하게 매우 아픕니다. 뭉친 낫형 적혈구들이 작은 혈관들을 막고 특히 뼈로 가는 혈관을 막으면 뼈가 허혈 때문에 매우 많이 아픕니다. 뼈도 생명이고 허혈로 아픈 대표적인 때는 심근경색인데 같은 종류의 통증이죠. 통증의 타이밍은 예측이 안되고 발생시에 할 수 있는 것도 통증 조절 같은 대증치료들입니다. 낫형적혈구가 생기는 비율을 줄여주는 작용기전 미상의 약제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환자들은 어릴 때부터 갑작스럽게 몸 어딘가가 (ex. 척추뼈, 손가락뼈 등) 매우 아프게 되다보니 학교나 직장에서 자주 빠지게 되고,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지기가 쉽습니다. ("적혈구 품질 불량(Bad cell service)", https://www.thisamericanlife.org/732/transcript) 옛날에는 마귀가 나를 습격한다거나 저주를 받았다거나 하는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그것보다는 나은 듯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화자는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숨기고 사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살아왔다가, 코로나 대유행을 계기로 주변사람들에게 말해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4. 다큐멘터리에서의 예상치 못한 네 번째 만남
불쌍한 유전병 환자들, 그렇게 아플 때 병원에 가면 그래도 잘 치료받을 수 있겠죠?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렇게 글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 계기는 이것입니다. 청소년 환자가 뉴욕 Lenox Hill 병원 응급실에 왔습니다. (동명의 다큐멘터리, 넷플릭스) 나는 낫적혈구병 환자고 지금 매우 아프니까 진통제 좀 달라고 하는데, 응급의학과 의사 표정이 뭔가 동정심과는 거리가 멀어요. 환자에게 처방된 진통제 처방력을 뭔가의 시스템에서 조회해보더니 왜 평소 처방을 받던 약국으로 가지 않았는지 따지듯 되묻습니다. 존재가 잘 알려진 유전병인데 대체 왜 이렇게 쌀쌀맞게 대할까, 그건 낫적혈구병의 심한 통증을 경감시키는 것은 마약성 진통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아플 때 통증 때문에 먹었지만, 그 다음에 남은 마약성 진통제를 호기심에 먹을 수도 있고, 겸사겸사 생활이 어려울 때 팔아서 용돈을 벌 수도 있고, 통증의 존재는 객관적으로 증명이 어렵고... 하여 이 청소년 환자와 응급의학과 의사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만과 불신을 갖게 됩니다. 이 환자의 경우 결국 진통제 처방을 받긴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환자도 표정이 좋지 않고 의료진도 의심하지 않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는 착찹한 심경을 토로합니다.

단순하고 중학교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내용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또 새로워서,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싶어 종종 생각해보게 됩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12-30 06:5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22 기타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차가운 거리로 나서는 이유 4 삼유인생 24/12/08 1088 40
    1421 기타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난 다시 만난 세계,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노래 4 소요 24/12/08 909 22
    1420 기타 나는 더이상 차가운 거리에 나가고 싶지 않다. 9 당근매니아 24/12/08 1358 43
    1419 기타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6 알료사 24/11/20 4588 33
    1418 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1180 32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840 32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1083 21
    1415 정치/사회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3 매뉴물있뉴 24/10/28 2064 18
    1414 일상/생각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1083 36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심해냉장고 24/10/20 1737 41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2024 16
    1411 문학『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1073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347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193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534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196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2112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737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545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2035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792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700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940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967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198 1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