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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10/01 15:53:20
Name   골든햄스
Subject   살아남기 위해 살아남는 자들과 솎아내기의 딜레마
당장 밥 값이 떨어지기도 했던 로스쿨 때를 생각하면, 인턴으로 나갔던 로펌 구내식당에서 남은 밥을 모아 싸가는 내내 정말로 단 한 번도 어떤 문장으로 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긴박한 이미지, 소음의 조각들만이 있었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공부는 병행이 불가하다는 것을 그 시절 기억으로 많이 익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내내 어떻게 해야만 다음 달 생활비를 구멍 내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다보면, 수많은 플랜을 A부터 Z까지 세우느라 공부를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이 사람이 내 생활에는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 뿐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죄송할 따름입니다. 용서해주시기를.) 교내 장학 시스템과 교외장학금의 선정 문턱 앞에서 몇 번이고 좌절하면서 '도대체 왜' 하는 단말마 같은 생각이 날카롭게 뇌를 조각내기를 반복했습니다.

다음 과외 아이템에 대한 고민은 끝없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그와 함께 쏟아지는 과제, 수업, 팀플, 인턴, 대인관계 문제를 해결하느라 늘 분노 200% 상태였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먹고 살기 바쁜데 이거까지 신경 써야 해?' 하는 서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소소한 일로 서로 싸워 편을 가르거나, 누구를 흘겨 보는 아이들을 보며 '부럽다'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그런 일로 목숨이 걸린 듯 싸우는 너네가 부럽다! 난 다음 끼니가 없다!' 물론 아이들은 저도 흘겨보고 무시했습니다만, 그때마다 속상해지기도 했지만 그걸 해결할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다음 끼니가 없다, 이 놈들아!' 사회적인 문제에 신경을 쓰기에는 당장의 굶주림이 급했습니다.

이런 처지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졸업을 포기하고 자퇴했다는 것이 상담을 부탁 드린 한 교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집안의 도산이나 문제가 터져 상담을 한 아이들을 통해 나름 통계를 낸 모양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50% 미만의, 졸업에 성공한 자에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생활비 장학금을 받아냈고, 외부 장학금을 받아냈고, 끝없이 과외를 했으며, 친구들에게 빚을 졌다 갚았고, 좋은 애인을 만나 결혼을 약속했고, 무너진 건강을 회복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도박을 실패했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부는 본질적으로 목숨을 건 도박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네가 예전에 성실히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지금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해' 라고 말하는 건 너네가 예전에 목숨 건 도박을 하고 거기다 성공까지 하지 못한 죄를 묻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날것의 표현입니다만 제가 그 시절 굶고 다니며 느낀 건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폭력적이고 빚까지 얹어주는 아버지가 흔한 불운은 아니므로 정책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하위 계층에는 흔합니다. ..... 그 외에도 가족의 병환이나, 도산 등등의 별의별 이유로, 혹은 잘못된 나라 잘못된 인종으로 태어났단 이유로 "살아남기 위해 살아남는" 자들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고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진상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이는 이들을 보며 나도 그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랬던 거 같습니다. 다른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같이 선뜻 욕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분노와 슬픔과 굶주림에 그렁그렁한 눈을 한 자들을, 마냥 밀어내기가 힘든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그런 자들을 밀어내고, 끊임없이 밀어내며, 솎아내는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들 중 특히 선을 넘은 자는 감옥이나 병원에 보내면서요. 그것이 우리의 안녕과 일상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인화된 도시라는 시스템의 손과 발, 톱니이자 나사로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도시와 법과 여론은 준엄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설령 밑바닥에 떨어지더라도 너네처럼 선을 넘고 분노에 몸을 불태우지는 않을 거야'라고 선언하듯이요.

글쎄, 적어도 그 직전까지는 갔다 왔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시 그들을 밀어내는 정신적 호신술을 심리상담에서 배우고 그들을 유형화해서 감옥에 보내는 법을 공부합니다. 적어도 제 개인의 행복과 영달을 위해서는 이래야 한다고 모두가 입 모아 말하니까요. 저 또한 제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칠 거니까요. 하늘과 땅 위에서의 법도가 다른 걸지도 모르고요.

이 딜레마에 온몸이 찢어져라 괴로웠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신께 기도합니다. 제게 모를 수 있는 권리를 주십시오.

찾아낸 답이라곤 그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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