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3/12/14 16:46:52
Name   하얀
File #1   danae_gustav_klimt_500x500w.jpg (46.7 KB), Download : 7
Subject   비오는 숲의 이야기



그 날은 비가 촉촉히 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날 비가 올 거라는 걸 몰랐어요. 그래서 비가 오자 숲 속에서 총총 뛰어 숲속 도서관을 꾸며놓은 정자로  들어갔어요.
비가 조금 오다 폭우에 가깝게 내렸지만 그저 즐거웠어요.

오랜만에 만난 사랑하는 친구와 보내는 시간과 좋아하는 숲이라는 공간이 모두 더할나위없이 좋았어요.  

오전에 운동화를 신고 레깅스와 후드점퍼에 작은 배낭 하나 매고 우리가 학창시절을 보낸 동네에서 만났어요.
친구도 저도 그 동네에 더 이상 살지 않지만, 친구가 몇년 전 결혼하기 전까지 오래 살았고 친구의 부모님은 아직도 그 동네에 살아서 짧은 학창시절 이후에도 자주 찾았는데 그 날은 느낌이 남달랐어요. 제가 출산과 임신 그리고 육아 이후 처음 찾는 거였거든요. 분명히 평생을 기다려온 운명같은 아기를 품에 안아 축복같은 시간일텐데 제가 사라진 그 시간은 행복만큼 너무 힘들었고, 저는 지쳐있었죠.

우리는 그 때 그 학창시절처럼 지하철역 몇번 출구 앞에서 약속을 정해서 만나 버스를 타고 산으로 갔어요.
또 그 시절처럼 버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수다를 막 떨었어요.

비에 젖은 숲의 공기와 가벼운 발걸음,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고, 빗 속에서 비를 맞으며 뛰고, 비를 구경하며 까르르 웃으며 즐거웠어요.
그 날의 촉촉한 공기와 저를 둘러싼 신선한 숲의 향기가 생생해요. 오랜 가뭄 끝에 물을 잔뜩 머금고 피어나는 풀잎처럼 스스로가 싱그럽게 살아나는게 느껴졌어요.

…좋았는데…정말 좋았는데...

지난 주 금요일, 그 이후 저를 처음 본 친구의 동공은 마구 흔들렸어요. 제가 일부러 말안하고 피한 것도 있었어요.
당황하며 어떻게 된 거냐는 친구에게 그 날이나 그 다음날 어쨌든 그 연휴, 그 기운이 깃들었다고 했어요.

친구는 탄식하며 말했어요.
친구 : “그 날 네가 정말 너무 기분 좋고 행복해 보이기는 했어…”
나 : “좋았지. 근데 이 정도로 좋았기를 바란건 아니야….”

잠시 침묵 후 친구는 물었습니다.
친구 : “그래 너야 그럴 수 있어. 근데 그 날 하루 종일 돌지난 아이를 돌본 네 신랑은 도대체 뭐가 좋았던거니…”
나 : “…그러게 말이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둘째라, 너무 당황했습니다. 첫째와 다르게 테스트기를 숨기고 혼자 병원에 가서 아기집까지 확인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내 인생에 두번째 아기가 있다고? 회사다니면서 어떻게 애 2명을 키워? 하나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 과정을 또 겪으라고? 말이 되나…

돌이 지나 활발한 소통이 되기 시작한 첫째에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아무도 모를거예요. 혹시 동생의 자폐가 유전일까봐 임신부터 근 2년간 한번도 마음 놓은 적이 없는데. 지금도 퇴화라는 무서운 일이 있을까 아직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는데. 자기 아기는 아무 이상없이 건강하리라 믿는 다른 산모들의 그 순수함이 미울 정도였는데. 아 나보고 그 시간을 다시 견디라고…

제 동생도 둘째였죠. 나이차이도 2살. 그 비슷함이 불길했어요.
그렇지만 ‘비오는 숲’의 날에 함께한 제 친구도 둘째예요. 제가 아는 둘째들은 어쨌든 형제 중 외모가 제일 괜찮았고, 착하고 부모님 옆에 가장 오래 있었어요.

시소처럼 오락가락 하는 마음을 다잡아 그 날의 공기를 다시 떠올렸어요.

촉촉하고 신선한 숲의 공기…저희 둘째의 태명이 정해진 순간이었어요. ‘비오는 숲(雨林)’
저에게 가장 필요한 속성인 물의 기운을 타고난 아기일거야. 나를 감싸는 촉촉한 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림이가 제게 속삭이는 거 같아요. 괜찮아요. 모두 괜찮아요.

오늘 오후, 일하는 중 니프티검사 결과로 저위험군이라는 문자를 받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다시 겪는 임신은 어떤 면에서는 첫째보다 더 힘들거든요. 그래도 (첫째 때도 안 난) 눈물이 날 줄은 몰랐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하나하나의 고비마다 견딜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니 부디 나와, 우리와 함께해줘. 우림아…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25 08:3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56
  • 모두가 건강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새 생명을 축복합니다.
  • 축하드려요~~~~~~ ???? ???? ???? ???? ???? ????
  • 둘째 임신 축하드립니다. 순산을 기원합니다!
  •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축하드립니다 다 잘될거에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기타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841 31
1417 기타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24 31
1416 기타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04 20
1415 기타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33 18
1414 기타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31 36
1413 기타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545 40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48 16
1411 기타『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42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18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74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12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41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76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3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39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06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685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81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87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60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79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29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76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49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51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