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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12/24 12:09:30
Name   joel
Subject   만화)오직 만화만이 할 수 있는 것. 아트 슈피겔만의 <쥐>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겪고 살아온 작가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워낙 유명한 만화라 다들 읽어보셨거나 대강 내용은 알고 계실 겁니다. 30여년 전에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예술로서의 만화'를 논할 때 첫 머리에서 거론되는 명작이지요. 

미리 고백하자면, 저는 '예술로서의 OO' 라는 표현을 싫어합니다. '예술'과 '예술 아님'을 구분 지으려는 것은 등급을 나누어 한 쪽을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쉽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예술인가 하는 논의는 제외하더라도 말이죠. 

물론 <쥐>를 향한 저 찬사가 무엇을 함의 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쥐>를 높이기 위해 구태여 예술이라는 단어를 빌리지는 않겠어요. 단지 '이 만화가 보여준 만화로서의 가능성과 힘이 무엇인가'를 써 보겠습니다. 


<쥐>가 명작인 이유로는 많은 것들이 거론됩니다. 작가의 아버지이자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블라덱의 처절한 삶의 이야기 자체가 주는 매력이 으뜸가는 이유일 것이고, 그럼에도 인종차별을 자행하는 블라덱의 모순적인 태도와 지독한 편집증에 걸린 수전노로서의 모습, 어머니의 자살 등등을 숨김 없이 그려나가는 작가의 솜씨 또한 <쥐>를 명작으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이런 것만이 <쥐>의 매력이라면 <쥐>는 꼭 만화일 필요가 없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등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어쩌면 '블라덱 평전' 또는 '소설 블라덱'이 훨씬 더 적합할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가 독보적인 찬사를 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오직 만화로만 가능한' 것들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 예시들을 들어봅시다. 








<쥐>의 정체성이자 상징이나 다름 없는 것이 바로 동물의 의인화로 인물들의 국적을 표현한 점이죠. 유대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미국인은 개. 이 비현실적인 표현이 오히려 작중에서 극한의 현실주의를 보여줍니다.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된 블라덱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폴란드인으로 위장하고 열차의 차장에게 자신을 숨겨달라 부탁하는 장면. 쥐가 돼지의 가면을 쓰고 벗는 것 이상으로 이 상황을 잘 그려내기란 쉽지 않을 거에요.




아우슈비츠에서 '나는 독일인이오! 황제에게 훈장도 수여받았소! 내 아들은 독일 군인이오!' 라며 강변하는 수용자의 모습. 그의 정체가 쥐의 탈이 씌워진 고양이였는지 고양이가 되고 싶었던 쥐였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 당시 수용소의 독일군들에게는 그 또한 '쥐 한 마리' 였겠지요. 





'아냐와 난 갈 곳이 없었어. 우린 소스노비에츠 방향으로 걸었지.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게토에서의 학살을 피해 간신히 탈출한 블라덱과 아냐. 두 사람의 앞에 하켄크로이츠 모양의 갈림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두 사람의 처지를 이 한 컷으로 정리해버렸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붙잡히고, 빨리 달리면 총에 맞을 거야!'

2차 대전 당시 본격적인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기 이전, 독일 점령지의 모든 유대인들은 외출 시 다비드의 별을 표식으로 달아야 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배경에 그려진 땅이 극도로 좁아집니다. 그 모양새는 다비드의 별이고요. 






<쥐>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작가가 듣는 방식이라 전달해야 할 정보가 많지요. 자칫 그림이 글에 먹혀버리기가 쉬운데 이걸 해결하는 작가의 연출이 탁월합니다. '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난 건물 안으로 숨었지. 거기 있던 사람들 중 5할은 사라졌을 거야.' 이 말을 세 토막으로 나눈 후 독일군 너머로 당황하는 블라덱->독일군은 그대로 두고 사라진 블라덱->시선의 흐름에 따라 왼 쪽에서 오른 쪽으로 사라져가는 독일군의 모습과 함께 담아냅니다. 이러면 정지된 그림으로 시간의 흐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고, 각 컷마다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꼭 이 장면만이 아니더라도 <쥐>에는 이런 식의 기법이 자주 사용됩니다. 역동적인 움직임 대신에 독자의 시선을 활용한 정적인 그림의 연속으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죠. 






'넌 어떻게 지내고 있니? 네가 그린다던 만화는 잘 되어 가니?'

'전 아버지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폴란드 시절부터 전쟁 까지요.

'긴 이야기가 될 거다. 그런 건 누구도 듣고 싶어하지 않을 거야.'



작가와 아버지가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첫 컷에서 독자의 시점 기준으로 아버지는 가깝게, 하지만 빗금이 쳐져 어둡게 그려지는 반면 작가는 멀지만 밝은 빛 속에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어서 '아버지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 라고 말하는 장면부터는 아버지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가운데 작가가 조그맣게 그려지며 원근과 명암이 대조되지요. 마지막 컷에서는 지금껏 좌->우로 넘어가던 컷이 갑자기 위-> 아래로 내려가며 독자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듯 아버지의 얼굴 아래 모습이 비춰집니다. 그리고 슬그머니 아버지의 팔뚝에 새겨진 죄수번호가 드러나지요.  

이 장면은 제가 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데, 곱씹어 볼 수록 감탄이 나옵니다. 

젊어서 생지옥을 겪은 아버지와 전쟁 이후에 출생하여 끔찍한 기억이 없이 살아온 아들, 자식이 '만화 같은 돈 안 되는 거' 그만두길 바라는 아버지와 그 만화를 통해 아버지를 담아내려는 아들, 이 모든 감정들을 관통하는 과거와 현재 라는 화두가 원근, 명암, 컷의 흐름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연출되고 있지요. 위의 장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따로 떼어놓고 한 번은 아버지, 한 번은 아들에게만 집중해 보세요. 자식 걱정에 살짝 낙담하다가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자 '얼굴을 숨기며' 이야기를 꺼리는 아버지와 천진난만하게 벽에 붙은 사진(아마도 자신의 어머니일듯) 옛날 이야기를 조르는 아들이라는 구도를 확연하게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화룡점정으로 저 죄수번호가 드러나는 연출은 만화적 허용의 극치죠.



흔히 훌륭한 만화의 연출을 칭찬할 때에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대표적으로 '마스터 키튼'이 이런 찬사를 듣는 작품이죠.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솜씨를 칭찬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하지요. 영화와 만화는 둘 다 이미지와 시각에 기반하는 매체이기에 만화보다 훨씬 앞서서 발전을 해온 영화로부터 만화가 차용할만한 기법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화와 만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만화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모두 사용하는 매우 독특한 매체이고, 시간과 공간의 흐름마저 작가가 마음껏 조절할 수 있지요. 위에서 예시로 들은 것들을 어쩌면 영화로도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만화로 하는 것만큼 세련되고 아름답기는 힘들 겁니다. 


아트 슈피겔만은 <쥐>를 통해 오직 만화만이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만화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던져주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쥐>는 위대한 만화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겁니다. 





3줄 요약

<쥐>를 보고 나면 
소세지가 먹고 싶어집니다. 
왠지 영어공부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1-08 22:25)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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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있게 봤던 만화인데 그 깊이와 디테일을 알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이런 점들 때문에 만화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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