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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3/18 16:18:15
Name   nickyo
Subject   아빠와 알파고

어릴 적, 이창호 사범의 전성기 시절에는 바둑 붐이 일었었다. 당시의 나는 국민학생과 초등학생을 모두 겪었었는데 그 때가 정확히 몇학년때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바둑을 두면 애들이 천재가 될 것이다 라는 일종의 기대감이 초등학교에 흐르던 시기였다. 뭇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3대학원인 속셈, 태권도, 피아노에 1대 세외강호를 섭외한 셈이다. 미술학원과 또이가 될만한 위치를 차지한 바둑의 위엄이란! 그 당시에는 갓 방과후 수업활동 같은것도 개설되는 시기였는데, 아마 사교육비용 절감의 일환으로서 학교에서 강사를 초빙해 저렴한 가격에 방학중에나 방과후에 취미활동을 가르키곤 했다. 거기에도 바둑수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컸으니 아무렴.


스타크래프트가 갓 보급되는 시절, 오락실과 피시방과 문방구 앞 오락기와 문방구의 미니카레일과 문방구의 딱지가 공존하던 시절.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아이들에게 고루 보급되던, 바야흐로 초딩 문화의 르네상스와도 같던 시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때 우리는 바둑학원을 향했다. 사실 바둑은 생각보다 재밌다. 호구를 만들어 돌을 따먹는 것은 일종의 전쟁게임 같지 않은가. 물론 내용이 점점 늘어나서 집을 만들고, 형세를 만들고, 축이니 단이니 날일자니 눈목자니 하게되면 흥미는 급속도로 줄어든다. 하지만 학교에 붐이 일어난다는건 곧 같은 학원에 친구들이 많이 다닌다는 의미와 상통하고, 우리에게 바둑은 또 하나의 경쟁이었다. 디쓰 이쓰 컴피티션! 아, 이런 말은 몰랐었겠다. 어쨌든, 바둑학원에선 친구들끼리 대국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서로 30급인 주제에..


바둑학원의 선생님은 아마 5단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바둑보다는 장사에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아이들에게 굳이 포석과 사활을 열심히 가르칠 생각은 없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단수치고 잡아먹으면 니거야. 돌 많이 따면 이길수있지. 같은 아주 간결한 말로 아이들을 유혹했다. 물론 일주일에 한두번은 하늘색배경의 바둑기초정석인가 뭐 그런 이름의 책을 조금씩 풀게 하곤 했다. 그 책의 구성은 기보가 있고 몇 개의 돌이 놓여져 있으면 다음 돌의 진행을 퀴즈처럼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더디게 진도를 나갔고, 친구들과의 대국에서는 쉬이 수준차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많이 싸우기도 했다. 무슨 고스트바둑왕의 주인공들도 아닌데, 한 날 같은 아이에게 두세번을 지기라도 하면 바둑학원이 끝나는 길에서 주먹다짐이 왕왕 일어나기도 했다. 야, 진짜 청춘이다잉. 30급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것도 겨우 석달이다. 학원이라는건 으레 질리기 마련이고.. 아무리 천천히 진도를 나가도 석달이나 학원을 다니면 조금씩 어려운 개념들을 가르치게 된다. 몇몇은 바둑에 지속적인 흥미를 갖지만, 나나 여타 친구들은 더 재밌는 놀이거리를 찾아나섰다. 여기서 실력도 엄청나게 벌어졌다. 돌을 따는데만 급급한 아이들과, 세력바둑을 시작하고 집바둑을 시작하는 아이들.. 친구가 줄고 실력차가 늘 수록 흥미는 떨어졌다. 나는 바둑학원에 학원비만 내고 오락실로 운동장으로 친구집으로 도망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일찍 퇴근을 하셨다. 당시 40대의 아버지께서는 엄격 진지 근엄의 화신과도 같으셨다. 아침에 내가 일어나서 엄마 밥줘 하면 엄마가 니 친구냐면서 눈을 부라리셨는데, 오줌을 지릴것 같이 무서웠던 기억이난다. 아버지는 근육이 빵빵했고 기골이 장대했으며 사관학교 출신이었고 당시 일류 대기업의 과장이었다. 아버지께서 40대였을때의 우리집은 가부장적이었다는것만 기억난다. 초등학교때는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내게 아빠는 졸라 짱 센데 졸라 짱 무서워서 졸라 짱 오금이 저린 분이었다. 아빠는 바둑학원을 반년이나 다녔으니 아빠랑 바둑을 두자며 커다란 바둑판을 들고오셨다. 접이식도 아니고 네 다리가 있는, 두툼한 원목 바둑판이었다.



9점 놓고 둬 보자. 아버지의 근엄넘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돌 따먹는 것 까지만 배웠으므로 열심히 보이는대로 단수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지나면 지날수록 따먹을 수 있는 돌은 없고 순식간에 내 돌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엄청나게 바둑을 잘 둔다는 점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는 바둑이 끝나고 나서, 한 판을 더 두자고 하셨다. 이번에는 25점을 깔라고 하셨다. 25점은 바둑판에 흑돌을 25개나 까는건데, 화점과 화점 두칸 사이에 바둑돌을 전부 까는 것이다. 나는 바둑판을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25점이면 이기겠지.



그리고 아버지는 자비없이 25점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25점을 두 판 이나 더 두시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셨다. 너는 왜이렇게 생각이 없냐. 너는 왜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냐. 좀 깊게 생각해라.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짜리에게 뭘 기대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6개월을 열심히 바둑학원에 다닌 실력은 아니었으니 그럴법 하다마는. 나는 그 날 하루만에 바둑이 완전히 싫어졌다. 아빠는 밥도 먹지 못하게 하고 계속해서 날 꾸짖었다. 때로는 얼마나 답답하셨는지 돌 내려놓기도 무서워하는 내 손목을 붙잡고는 여기다 놓으면 되겠냐고 야단을 치셨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그 날 마지막에는 29점을 두었다. 25점에서 삼삼에 돌을 하나씩 더 놓는 것이었다. 29점을 놓고 세판을 뒀을때 나는 처음으로 아빠를 이겼다. 글쎄, 아빠가 져준건지 내가 이긴건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게 아빠와 둔 마지막 바둑이었다. 나는 그 뒤로 바둑을 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얼마전 이세돌과 알파고가 1:4로 대국을 한 것을 보았다. 나는 아빠에게 넌지시, 저 인공지능 대단하다며 아빠도 바둑을 잘 두셨었다고 얘기했다. 아빠는 그러자 또 바둑을 시키면 생각이 좀 깊어지고 차분해 진대서 시켰더니.. 하고 혀를 찰 뿐이었다. 부들부들. 초등학교 3,4학년짜리한테 뭘 바란걸까. 하긴, 가끔 엄마아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 잘못인가 싶기도하다. 내가 1살땐가 2살때 가족 모두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했었는데 당시 나는 다행히 별로 안 다쳤던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한참 어린나이부터 글과 숫자를 깨우쳤고 사칙연산을 시작했으니 병원의 모두가 놀랐다고 한다. 이거 무슨 위인전의 도입부분 구라같은 수준인데.. 아무튼 엄마아빠말로는 진짜 그랬다고 하고 친인척들은 그래서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뭐라도 되있을거라 생각했나보다. 큰아들 대학 잘갔죠? 큰아들 공부 잘하죠? 큰아들은 걱정없겠어. ...28살 백수로서 갑자기 부모님한테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2살때까지 모든 기력을 소진한 나는.. 같은 대사를 치고 싶다. 어쨌든... 알파고와 이세돌을 보며 아빠의 기대가 문득 궁금해졌었다. 바둑학원을 다닌 꼬마에게 뭘 기대했던 걸까 하고..



다시한번 바둑을 배워볼까. 왠지 여전히 난 머리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음. 18살때는 28살때 백수에 전재산이 5만원이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여. 머리가 좋은 사람이 이렇게 쭈굴할리 없지. 하고 바둑앱을 찾다가 그만뒀다. 지금은 아빠에게 25점을 두고 이길 수 있을까? 룰은 기억하는데. 단수치고 돌따먹고. 집에 바둑판이 아직 있던가? 모르겠다. 초등학교4학년 때보다는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아빠가 얼마나 더 나이를 먹고 내가 얼마나 더 어른이 되어야 물어볼 수 있을까? 그땐 왜 그러셨어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꼭 29점을 이겨가며 꾸짖었어야 했습니까? 그 정도도 안되는 놈이었니? 뭐 이런 대화가 일어나진 않겠지... 근데 왠지 우리 아빠라면 그때 되서도 '생각이 진중하고 깊을줄을 모르니...'하실 것 같다. 쳇. 바둑 못둬서 서럽네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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