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06/10 16:36:41
Name   nickyo
Subject   회한
지나고보면 20대에는 오로지 남의 노동자였던 기억이다.
피자집에서, 웨딩홀에서, 마트에서, 학원에서, 노래방에서, 피시방에서, 커피샵에서, 아파트 경비실에서, 학교에서, 독서실에서..
혹은 어디 거리에서라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일을하고 돈을 쥐어다 어딘가에 쓰곤 했다.
매 계절 옷은 사입어야 하고, 매 달 핸드폰 요금은 내야하고, 친구들은 주기적으로 밥을 먹어야 하고, 가끔은 술도 먹어야하고.
어떤때는 조금 피곤한대신 조금 여유있게, 어떤때는 조금 덜 피곤한대신 조금 빠듯하게.
그래도 20대에 벌어서 사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에 그냥 그러고 살았다.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삼일 전부터 독서실 사장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해야한다며 내게 업체에 전화를 걸어 진행하라고 하였다. 업체는 15분이면 된다는 프로그램 업데이트에만 3일이 걸렸다. 중간중간 생기는 기능적 트러블에 대해 자신들도 알 수 없다고 했다. 3일만에 발견한 해법은 놀라운 것이었다. 윈도우 xp는 관리자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나. 그 사이에 사장과 실장으로부터 지속적인 갈굼을 당한건 보너스 같은 셈이다. 때려칠때 미지급 최저임금 다 때려박고 소방법 세금 개인정보관리같은 위반사항 죄다 민원넣어버릴테다. 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책 몇 자를 읽는데, 어떤 학부형이 찾아왔다.

이를테면 그런것이다. 며칠 전 한 학생은 여기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는데, 청소중에도 나오지 않았고 분실물이 따로 접수된 것도 없었다. 그래서 없는 것 같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이 학부형은 그걸 내가 훔쳤다고 믿는 듯 했다. 좋게 말할때 내놓으라던 그의 손가락질과 흥분한 어조. 나는 다시금 그 학생이 앉았던 열람실로 안내해 일일히 사물함을 열어보며 지갑이 없는걸 확인해 줬고, CCTV를 네 배속으로 돌려 학생이 지갑을 손에 들고 나가는 것 까지 확인시켜줬다. 그 시간동안 뒤에서는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귓가를 푹푹 찔렀다. 어디 할게 없어서 도둑질을 하는지. 내가 경찰 안부르고 온 걸 다행으로 알아라. 알바야? 알바래도 일은 똑바로해야지. 당신이 가져가놓고 지금 발뺌하는거 아냐. 한시간 반이 넘는 설전은 CCTV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학부형은 바득바득, 약이 바짝 오른듯이 마지막까지 분노를 쏟아낸다. 돈 없고 공부 못해서 알바나 하는 것들이.. 의심받을만하니까 받는거지. 처음부터 없다고 정확하게 얘길 하든가. 왜 시간을 버리게 만들어? 내가 거기서 살인범이 되지 않은게 이 사회의 사회화가 갖는 위대한 기능일 것이다. 물론 수 시간내에 살인범이 될것같이 손이 떨리지만, 아직까지는 간신히 진정중이다. 뭔가 부술게 필요하다. 이왕이면 저 나불대는 주둥이가 달린 대가리라든가.


둘러봐도 내 것이라곤 핸드폰과 책 정도. 어느것 하나 부숴봐야 빡침이 덜하긴 커녕 다시 구할 돈도 없다. 내 거라곤 너무 빈약한 것들 뿐. 폭풍처럼 몰아친 진상을 견뎌내고 나서 다시 책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안들어와서 이걸 어디다 하소연이라고 할 생각에 SNS를 뒤져본다.


어떤 이들은 잘 살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이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참 인생이 충만하다고 느껴지게끔 SNS를 활용하는 듯 했다. 진짜든 가짜든 문득 나는 회한이 들었다. 남의 노동자로 성실히 살아온 10년에 가까운 시간. 그러고보니 처음 웨딩홀 알바에서 주방 이모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못 배운게 돈 없어서 저나이부터 알바나 하는거지.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얘기를 듣는다. 나도 부모 등골좀 부수고, 어학연수좀 다니고, 돈 좀 덜 벌었으면 뭐라도 떠올릴 것들이 있었을 텐데, 돌아보고 나니 온통 남의 소일거리 뒤치닥꺼리 했던 기억뿐이다. 괜한짓이라는 생각에 폰을 끄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문득, 마음 어딘가에 울화가 치밀어오른다. 이 책도 결국 남의 소일거리 하며 월급좀 타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짓인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하는거지? 부모 등골은 이미 IMF와 구조조정과 노후대책같은게 가루로 만들어버렸는데, 난 뭐 골수라도 빨았어야하나. 뭐 하나 분지르지도 못한 손이 파들거린다. 이를 빠드득 가는데 이가 시리다.


요즘은 소비하지 못하면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 소비는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한다. 난 자본가 계급이 아니니까. 이젠 이런게 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하면 안되는 일들이 지긋지긋하다. 남 탓을 하기에는 내가 덜 성실했던 탓이 많아 세상을 탓하기도 어렵다. 양심적으로 내가 그렇게 꼭 더 나아졌을만큼 필사적으로 살았냐 하면 그건 아니니까. 벌어서 필요한데 잘 쓰고 잘 살았다. 무너지지 않고 생활을 버틴게 어디냐. 다들 더 나빠지지 않으려고 산다는데. 어제까진 괜찮았다. 어제까지는. 근데 이제 오늘은 안괜찮다. 예전같았으면 씨바 똥밟았네 할 법한 말들이 머리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어디서 얼핏 본 것 같다. 절망이 자신을 죽이다보면, 그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 죽일거라고.
최근들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짜증이나 화가 자꾸 치솟는다. 해야할 일들이 잘 되지 않고, 하고싶은 일들은 점점 사라져간다.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희미해진다. 남을 죽이면 안된다. 차라리 내가 죽어야지. 이제는 다짐에 가깝다.
다들 이러고 산다. 다들 이러고 잘 살아간다는게 신기하고 존경스럽다. 무슨 에너지로, 어떤 기억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힘 있게 나아가는지 궁금하다.
나의 이십대에는 그런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뿌리삼아야 할 기억들은 죄다 최저시급으로 바뀌어 어딘가로 나가고 들어왔던 것 같다.
어지럽다. 빨리 집에가서 잠을 좀 자고 싶다. 그러고 나면 어느정도는 까먹고, 어느정도는 멍해져서. 그러면 또 책이나 강의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은 남도 죽이지 않았고, 나도 죽지 않았으니
무너지지는 않은셈이다.
그런 셈이다.

아, 담배땡긴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6-20 13:02)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1
  • 뜨거운 분노, 그대 살아 있음에...
  • 제가 nickyo님께 드릴 수 있는건 추천 1따봉. 그리고, 추천내용과 리플 하나.
  • 부잉....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기타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843 31
1417 기타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28 31
1416 기타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07 20
1415 기타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37 18
1414 기타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33 36
1413 기타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549 40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51 16
1411 기타『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44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19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75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13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42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79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5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39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07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687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83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87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62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80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30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77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50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51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