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 16/04/08 06:26:50 |
Name | Moira |
Subject |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의 이름은 수상 직후 1990년대 말에 고려원에서 번역 전집을 내면서 한국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네, <영웅문>을 냈던 그 고려원입니다. 고려원은 이 두 번역 사업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만한 출판사지요). 안타깝게도 이 소설가의 문체가 간명하지 않아 번역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소실되는 부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저도 몇 권을 집에 가지고 있지만 독해가 쉽지 않아요. 오에의 에세이는 읽기가 훨씬 낫습니다.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는 오에의 에세이 중에서도 퍽 간명하고 아름다운 글입니다. 타겟 독자가 아이들인데,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자신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듯이 쓴 글입니다. 어른의 젠 체하는 느낌('우리 때는 지금과 달라서 말이죠...' 류)이나 아이들에게 아부하는 느낌('여러분은 미래의 희망입니다...'류)이 전혀 없다는 점, 힘을 빼고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하면서도 진지함과 긴장감이 살아 있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 에세이는 <'나의 나무' 아래서>(까치)에 실려 있습니다. 번역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지만 무난하게 읽을 수 있어요. 에세이의 첫 도입부는 이렇습니다.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나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두 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중요한 문제는 고통스럽더라도 골똘히 생각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만일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골똘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것은 뒷날 그 일을 회상할 때마다 그 자체가 의미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린 독자들을 타겟으로 글을 썼는가 하면, 출판사의 상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좀 긴 사연이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상을 받고 난 뒤라 당연히 여러 강연이나 초빙 프로그램에 불려다니고 있었습니다. 1999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초빙을 받아 독일로 갔을 때, 그는 베를린의 일본인 교포사회와도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일본인 부모들은 오에 겐자부로에게 일인학교에 한번 나와서 외국에서 일어를 배우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강연을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오에는 이에 대해 역제안을 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잘 모르는 어른이 찾아와서 강연을 해준다고 아이들이 재미있어할까요? 이야기를 하러 오는 사람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 앞에서 무엇을 실마리 삼아 이야기해야 좋을지 알 수 없습니다.' 오에의 제안은 '빨간펜 선생님'이 되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아이들은 미리 작문을 써서 제출할 것, 작문의 주제는 '독일인과 일본인의 비교'로 할 것, 그러면 자신이 빨간 만년필로 작문 하나하나를 다듬어 교정해 주겠다, 그리고 아이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로 오에 자신도 작문을 하나 해서 가져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오에가 써서 읽은 작문이 바로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에세이입니다. 일인학교 학부모들은 나중에 이 원고들을 모아 오에가 어디를 어떻게 교정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인쇄 방식을 써서 작문집을 펴냈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아이들의 서툰 작문을 교정하는 와중에 쓴 에세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제쳐 두더라도, '왜 아이들은...'은 그 자체로 퍽 인상적인 글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학교에 가기 싫을 때마다 이런 질문을 던졌고, 대학 때도 마찬가지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그랬습니다. 왜 그 모든 모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에, 대학에, 노동시장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런 삶을 유지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에는 이에 대해 철학적이거나 사회과학적인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작가들은 비유로 이야기하죠. 그는 두 가지 예를 듭니다. 첫 번째 예는 열 살짜리 오에의 이야기입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은 산골 초딩 오에의 삶에도 대격변을 가져왔습니다. 여름까지만 해도 학교 선생님들은 '천황은 신이다' '미국인은 귀신 짐승이다'라고 말했는데 가을이 오자 아무렇지도 않게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천황은 인간이다' '미국은 우리 친구다'라고 말이죠. 지금까지 선생님들이 가르친 것은 잘못된 것이었으니 반성한다는 말도 전혀 없었습니다. 귀신이라 불리던 미군 병사들이 지프를 타고 산골에 들어오자 학생들더러 길가에 서서 성조기를 흔들라고 했습니다. 오에의 동무들은 분위기에 들떠서 신나게 뛰어나가 헬로, 헬로를 외쳤지만 마음 속 깊이 불신을 품은 오에는 대열을 빠져나가 홀로 산 속으로 들어가서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오에는 등교거부에 돌입합니다. 오에네 집안은 숲을 관리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집에는 두꺼운 식물도감이 있어서 어린 오에는 그 책을 탐독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고 숲속에서 혼자 식물도감을 가지고 공부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밥은 벌어 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학교에는 오에의 식물오덕적인 취미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들만 공부해야 할 뿐이라고 생각했지요. 학교에 가는 척하면서 산으로 내빼는 일과를 한 달가량 계속하던 중, 어느 날 폭우가 내려 오에는 산속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의식을 잃고 나무 아래 쓰러진 채 이틀이 지나 소방수들에게 구출되었을 때 의사는 살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에는 자기가 죽는 거냐고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엄마는 아니라고 하지요. 오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내가 죽는 게 사실이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엄마는 의사의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고, 놀라운 철학적 대답을 합니다. "만약 네가 죽더라도 내가 또다시 널 낳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치만 그 아이는 지금 죽는 아와는 다른 아이가 아닐까?" "아니야 똑같아. 네가 이제껏 보고 듣고 읽은 것, 네가 해왔던 일들 모두를 새로운 너에게 이야기해 줄 거야... 그러면 두 아이는 완전히 똑같아지는 거야." 그 뒤 다행히 살아난 오에는 겨울쯤부터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에는 가끔 가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혹시 죽고 나서 엄마가 새로 낳아준 아이가 아닐까? 이 교실이나 운동장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은 죽은 아이들이 가졌던 언어를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 여기 학교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숲속에서 식물도감을 읽고 나무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가업을 이어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있겠지만) 죽은 아이들을 대신할 수 없는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아마도...? ![]() 1967년 30대 초반의 오에 겐자부로 두 번째 예는 자폐증을 가진 장남 히카리에 관한 일화입니다. 오에는 이 아이에 관해 너무나 많은 글을 썼기 때문에, 오에 겐자부로 하면 히카리를 먼저 떠올리는 독자들도 있어요. 히카리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장애가 있어서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음악에 민감해서 인간의 말보다 새 소리를 더 잘 식별했다고 합니다. 일곱 살이 되자 히카리는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급에 들어갔습니다. 늘 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기물을 넘어뜨리곤 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오에가 창문으로 들여다보면 히카리는 언제나 두 귀를 두 손으로 틀어막은 채 온몸을 굳히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에는 또다시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물음에 부딪힙니다. 히카리는 왜 꼭 학교에 가야 하는가? 나와 아내와 함께 셋이서 숲속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들새의 노래를 들으며 살면 안 될까? 그렇게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은가? 이 문제를 해소한 것은 오에가 아니라 히카리 자신이었습니다. 히카리는 교실에서 자기와 똑같이 소음을 싫어하는 아이를 하나 발견하여, 둘이 언제나 교실 구석에서 손을 꼭 잡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한 손은 친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귀를 틀어막고 있었겠죠. 그렇게 1년이 지나자 히카리는 새 소리보다 인간의 음악을 통하는 편이 친구와 좀더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음악에 대한 정보와 감상을 조용히 나누며 두 아이는 상급학교로 함께 진학했습니다. 이윽고 고등학교 3년이 지나자 더 이상 장애인을 위한 상급 학교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선생님의 설명에 납득이 가지 않은 두 아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놀라움과 저항을 표명합니다. "이상한데...." 히카리가 말하자 친구도 마음을 담아서 말했습니다. "이상한데..." 이 아이들은,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왜 (어떤)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안 되는가"라는 역질문을 던진 셈입니다. 작곡가 오에 히카리가 만든 음악. # 독일 일인학교의 일본인 아이들이 오에의 글에 감동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부모들이 감동받은 증거는 있지만요. 어차피 꼰대의 모호한 말.. 하지만 오에 같은 사람들은 동료 꼰대들에게는 적어도 약간의 경각심을 줍니다. 아이들에겐 구제 불가능한 꼰대와 가능한 꼰대를 식별하고 선택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오에의 빨간펜 선생님 시도는 저에게는 지식인이 수행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감동적이었습니다. # 왜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오에의 결론은 썩 개운치는 않습니다. 결국은 해답이 없어요. 하나의 당위(학교에 가야 한다)를 또 다른 당위(죽은 아이를 대신한다, 타인과 이어진다)로 덮어버린 셈이랄까요. 어떤 어른들은 모순투성이 학교를 그만두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 자퇴를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왕따라든가 학교가 너무나 큰 고통이 되어서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오에는 현실타협적인 보수주의자로 보일지도 몰라요. # 하지만 저는, 아이는 없지만, 아이가 있다면 학교에 꼭 보냈을 겁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한다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꼬드겼을 거 같아요. 1년 정도 휴학을 시켜 준다든가 하는 방법도 있겠죠.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라고 아이가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대신해 살지 않기 위해서, 부모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근대의 학교 제도는 애당초 국가가 부모로부터 아이를 빼앗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부모처럼 살아가게 될 아이들을 데려다가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인간으로 개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지요. 과거의 부모들은 학교가 아이의 계급상승을 위한 제도라고 생각했고, 현재의 부모들은 학교를 아이의 계급하락을 경고하는 알리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성장을 위해 학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놓는 것이라고, 아이에게 부모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만일 학교라는 제도 이외에 다른 어떤 대안적인 길을 선택한다면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격리 속에서 가능성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어린 오에 겐자부로가 아버지의 가업 대신 가상의 죽은 아이를 대신하는 삶을 받아들인 것처럼, 히카리가 아버지의 다소 퇴행적인 질문에 대해 스스로의 답을 찾은 것처럼. # 책에는 이 에세이 말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나름 스테디셀러로 2001년에 나온 책이 아직도 팔리고 있네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권하지는 않습니다. 제 주변에서 이 책을 읽혀본 결과 아이들은 다 지겨워 죽을려고 했다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4-17 21:08)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6
이 게시판에 등록된 Moira님의 최근 게시물 |
글쎄요..
근데 분명한 건,
똑같이 자신의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홈스쿨링한다고 했을 때도, 일반인 부모보다 전공이 교육학 관련인 부모가 성공률이 더 높겠죠.
그리고 더 분명한 건,
그 교육 전문가들도 결국 자신의 아이들을 어느 형태이든지 제도권 교육에 편입시키는 경우갸 대부분이란 것. 왜냐하면 단수의 전문가보다 복수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시스템이 낫겠죠.
전 개인적으로
비전공자가 새로운 이론을 만들거나, 기존의 이론을 아무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아이의 인생을 가지고... 더 보기
근데 분명한 건,
똑같이 자신의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홈스쿨링한다고 했을 때도, 일반인 부모보다 전공이 교육학 관련인 부모가 성공률이 더 높겠죠.
그리고 더 분명한 건,
그 교육 전문가들도 결국 자신의 아이들을 어느 형태이든지 제도권 교육에 편입시키는 경우갸 대부분이란 것. 왜냐하면 단수의 전문가보다 복수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시스템이 낫겠죠.
전 개인적으로
비전공자가 새로운 이론을 만들거나, 기존의 이론을 아무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아이의 인생을 가지고... 더 보기
글쎄요..
근데 분명한 건,
똑같이 자신의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홈스쿨링한다고 했을 때도, 일반인 부모보다 전공이 교육학 관련인 부모가 성공률이 더 높겠죠.
그리고 더 분명한 건,
그 교육 전문가들도 결국 자신의 아이들을 어느 형태이든지 제도권 교육에 편입시키는 경우갸 대부분이란 것. 왜냐하면 단수의 전문가보다 복수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시스템이 낫겠죠.
전 개인적으로
비전공자가 새로운 이론을 만들거나, 기존의 이론을 아무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아이의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하려 하면 안돼요.
근데 분명한 건,
똑같이 자신의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홈스쿨링한다고 했을 때도, 일반인 부모보다 전공이 교육학 관련인 부모가 성공률이 더 높겠죠.
그리고 더 분명한 건,
그 교육 전문가들도 결국 자신의 아이들을 어느 형태이든지 제도권 교육에 편입시키는 경우갸 대부분이란 것. 왜냐하면 단수의 전문가보다 복수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시스템이 낫겠죠.
전 개인적으로
비전공자가 새로운 이론을 만들거나, 기존의 이론을 아무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아이의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하려 하면 안돼요.
맞아요. 저도 초원님과 비슷한 생각이에요. 비전공자..라기보단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대안에 심취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요. 그런데 제가 이 문제를 떠올렸던 것은 좀 다른 맥락이에요. 어린 오에가 가졌던 의문과도 비슷하게, 만일 어떤 아이가 스스로 학교에 대해 의문과 불신, 고통을 표명하며 제도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고통을 해소하는 방식은 꼭 학교를 벗어나는 것이어야 할지, 아이의 인권과 의사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어디까지 동조하고 어느 선에서 거부해야 하는 ... 더 보기
맞아요. 저도 초원님과 비슷한 생각이에요. 비전공자..라기보단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대안에 심취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요. 그런데 제가 이 문제를 떠올렸던 것은 좀 다른 맥락이에요. 어린 오에가 가졌던 의문과도 비슷하게, 만일 어떤 아이가 스스로 학교에 대해 의문과 불신, 고통을 표명하며 제도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고통을 해소하는 방식은 꼭 학교를 벗어나는 것이어야 할지, 아이의 인권과 의사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어디까지 동조하고 어느 선에서 거부해야 하는 것일지... 특히 평소에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부모들, 어릴 때 고통스런 학교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는 부모들이면 고민이 더 크겠지요.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저는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오에의 자문자답을 말하자면 그런 고민을 하는 부모들에게 하는 말로 읽었어요. 전문가와 공교육을 신뢰하라든가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라는 조언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조건을 만들어주건 아이가 제도와 맞부딪히는 것을 피할 수는 없고, 아이는 당신의 의지나 희망과 상관없이 당신과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라는 경구 비슷한 말로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질문은 왜 아이들이 제도의 폭력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질문과 비슷한 거죠. 오에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견디는 것이 인간으로서 의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요. (자식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상당히 보수적이긴 하지요.
그러니까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질문은 왜 아이들이 제도의 폭력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질문과 비슷한 거죠. 오에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견디는 것이 인간으로서 의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요. (자식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상당히 보수적이긴 하지요.
저는 이런 류의 고민의 상당한 근원 중 하나는 이거라고 생각해요.
\"남보다 앞설 것, 상위 그룹에 들 것\"이 이 제도가 가르치는 지상목표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가르치든,
제도권 안에 들면서도 충분히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자기주도학습을 하려면, 결국 다양한 분야, 다양한 관점의 체계가 잡힌 전문적인 책, 논문을 많이 봐야 합니다. 교양서적도 좋지만.. 개론이나 가벼운 30페이지짜리 논문 등.
또 그러려면 먼저 글, 텍스트를 해독하는 기술을 가르쳐줘야 ... 더 보기
\"남보다 앞설 것, 상위 그룹에 들 것\"이 이 제도가 가르치는 지상목표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가르치든,
제도권 안에 들면서도 충분히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자기주도학습을 하려면, 결국 다양한 분야, 다양한 관점의 체계가 잡힌 전문적인 책, 논문을 많이 봐야 합니다. 교양서적도 좋지만.. 개론이나 가벼운 30페이지짜리 논문 등.
또 그러려면 먼저 글, 텍스트를 해독하는 기술을 가르쳐줘야 ... 더 보기
저는 이런 류의 고민의 상당한 근원 중 하나는 이거라고 생각해요.
\"남보다 앞설 것, 상위 그룹에 들 것\"이 이 제도가 가르치는 지상목표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가르치든,
제도권 안에 들면서도 충분히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자기주도학습을 하려면, 결국 다양한 분야, 다양한 관점의 체계가 잡힌 전문적인 책, 논문을 많이 봐야 합니다. 교양서적도 좋지만.. 개론이나 가벼운 30페이지짜리 논문 등.
또 그러려면 먼저 글, 텍스트를 해독하는 기술을 가르쳐줘야 하죠.
글 읽는 기술.. 인터넷이나 시중 잡다한 책에는 별로 좋은 게 없고, 네이버 전문정보 학술논문 같은 데서 \"글, 텍스트, 구조, 분석, ..\" 이런 키워드로 검색하면 쏟아져나와요.
\"남보다 앞설 것, 상위 그룹에 들 것\"이 이 제도가 가르치는 지상목표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가르치든,
제도권 안에 들면서도 충분히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자기주도학습을 하려면, 결국 다양한 분야, 다양한 관점의 체계가 잡힌 전문적인 책, 논문을 많이 봐야 합니다. 교양서적도 좋지만.. 개론이나 가벼운 30페이지짜리 논문 등.
또 그러려면 먼저 글, 텍스트를 해독하는 기술을 가르쳐줘야 하죠.
글 읽는 기술.. 인터넷이나 시중 잡다한 책에는 별로 좋은 게 없고, 네이버 전문정보 학술논문 같은 데서 \"글, 텍스트, 구조, 분석, ..\" 이런 키워드로 검색하면 쏟아져나와요.
글쎄요.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교육학만으로는 부족해요. 일단 지성적으로 누군가보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중학교 국어 교사가 지식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교육학적으로 충분한 지식이 있다고 시를 읽는 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어요. 일단 본인이 시를 읽을 줄 알아야, 그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학이 의미가 있겠죠. 지식은 없고 교육학만 있다면 전달할 수 있는 건 잘못된 지식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학교수로 교육학 전문가가 아니라 각 전공과목의 전문가를 쓰고 있는거구요. 중고등학교 교사임용시에 교육학뿐만 아니라 수학이든 국어든 ... 더 보기
글쎄요.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교육학만으로는 부족해요. 일단 지성적으로 누군가보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중학교 국어 교사가 지식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교육학적으로 충분한 지식이 있다고 시를 읽는 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어요. 일단 본인이 시를 읽을 줄 알아야, 그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학이 의미가 있겠죠. 지식은 없고 교육학만 있다면 전달할 수 있는 건 잘못된 지식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학교수로 교육학 전문가가 아니라 각 전공과목의 전문가를 쓰고 있는거구요. 중고등학교 교사임용시에 교육학뿐만 아니라 수학이든 국어든 각 전공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도 동일해요 . 그런데 안타깝게도, 학교 교사들을 모두 각 분야의 전문가로 쓰기에는 급여조건이 맞지 않고 따라서 학교 교사들 대부분은 수준미달의 지적수준을 가지고 있어요. 중고등학교에서 영특한 친구들이 평범한 교사를 뛰어넘는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죠. 따라서 일부의 학생들은 자신보다 못한 지식수준을 가진 교사들과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어요.
아이들 친구들끼리만의 세계라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어른들/외부인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논리들로 구성된 것 같지만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공동체인데, 어떨 때는 참 아름답고 또 어떨 때는 끔찍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배타적인 모든 공동체들이 그렇듯이 가장 약한 구성원들(왕따 같은)이 소리 없이 희생되는 구조이기도 하고요. 예전에 왕따 문제에 관해 평범한 중딩들이 쓴 글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아이들 절대 다수가 \'왕따당하는 아이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분명히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읽어보고 채점하는 글인데도 말이죠..
오에 겐자부로와 그 아들의 이야기는 자주 접했는데 음... 공감할 순 없지만 비범하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그 때 지금보다 더 어려서 그러지 않았을까(가르치는 쪽보다는 배우는 쪽의 나이니까)라는 생각도 있고...
저희 어머니는 교사신데, 교육, 특히 공교육에 대해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본인이 아직 의욕이 넘치고 젊던 시절에 소위 잘 살고 집에서 백업 잘해주고 애들도 이미 학습 내용 숙지가 끝난 채로 수업에 들어오는 게 그럭저럭 표준화된 동네에서 가르치다가, 슬슬 본인도 생활에 치이고 기력도 쇠하고 ... 더 보기
저희 어머니는 교사신데, 교육, 특히 공교육에 대해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본인이 아직 의욕이 넘치고 젊던 시절에 소위 잘 살고 집에서 백업 잘해주고 애들도 이미 학습 내용 숙지가 끝난 채로 수업에 들어오는 게 그럭저럭 표준화된 동네에서 가르치다가, 슬슬 본인도 생활에 치이고 기력도 쇠하고 ... 더 보기
오에 겐자부로와 그 아들의 이야기는 자주 접했는데 음... 공감할 순 없지만 비범하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그 때 지금보다 더 어려서 그러지 않았을까(가르치는 쪽보다는 배우는 쪽의 나이니까)라는 생각도 있고...
저희 어머니는 교사신데, 교육, 특히 공교육에 대해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본인이 아직 의욕이 넘치고 젊던 시절에 소위 잘 살고 집에서 백업 잘해주고 애들도 이미 학습 내용 숙지가 끝난 채로 수업에 들어오는 게 그럭저럭 표준화된 동네에서 가르치다가, 슬슬 본인도 생활에 치이고 기력도 쇠하고 집의 애새끼는 말을 안 듣고(?!) 피곤하던 시절에 이전 학교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환경의 동네로 전근을 가셨는데, 당연히 처음에는 아 왜 이 애들은 이렇게 의욕도 없고 멍청하고 단순하며 짐승새끼와도 같은가라는 생각을 하셨죠. 근데 1-2년 지나면서, 특히 학생의 가정환경에 대한 면담이나 정보 습득 등이 어느 정도 쌓인 후에 내리신 결론은(아마 이것이 저희 어머니의 교육관이라고 보는데), 애가 아예 될 놈이거나 집이 방치하지 않을 여력이 있으면 학교가 있건 없건 알아서들 해나가지만 이에 해당하지 않는 애들은 그대로 망가지고 도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아마도 본문에 대한 저희 어머니의 답은, \'거기에 가지 않으면 자기의 삶이 희극인지 비극인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저 답에 저도 꽤 공감합니다. 저도 굉장히 모난 성격과 예민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 시스템이라는 건 아주 피곤하고 스트레스였거든요. 검정고시도 진지하게 고민했었고... 근데 이건, \'스탠더드\'를 경험해봤고 그렇기 때문에 스탠더드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지, 만약에 제가 미국의 특정 소수 종교 집안에 태어나서 홈스쿨링(을 빙자한 전근대적, 종교적 교육)을 받았고 제 주변도 다 그러하다면 아마 의문 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가지긴 하겠지만... 근데 사람은 타고난 것도, 가진 것도 분명히 평등하지 않고, 그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고, 그 간극에서 누군가에게는 선택일 수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단지 박탈당했을 뿐인 그런 상황도 나올 겁니다. 결국 공교육 시스템이 출현한 역사도 이 지점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 역시 그것이 현 시대의 스탠더드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걸 단편적으로라도 경험시켜주어야 기회를 박탈당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가서 보고 아니다 싶어서 때려치는 건 일찍 일찍 할수록 좋은 것이고...
저희 어머니는 교사신데, 교육, 특히 공교육에 대해서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신 바가 있습니다. 본인이 아직 의욕이 넘치고 젊던 시절에 소위 잘 살고 집에서 백업 잘해주고 애들도 이미 학습 내용 숙지가 끝난 채로 수업에 들어오는 게 그럭저럭 표준화된 동네에서 가르치다가, 슬슬 본인도 생활에 치이고 기력도 쇠하고 집의 애새끼는 말을 안 듣고(?!) 피곤하던 시절에 이전 학교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환경의 동네로 전근을 가셨는데, 당연히 처음에는 아 왜 이 애들은 이렇게 의욕도 없고 멍청하고 단순하며 짐승새끼와도 같은가라는 생각을 하셨죠. 근데 1-2년 지나면서, 특히 학생의 가정환경에 대한 면담이나 정보 습득 등이 어느 정도 쌓인 후에 내리신 결론은(아마 이것이 저희 어머니의 교육관이라고 보는데), 애가 아예 될 놈이거나 집이 방치하지 않을 여력이 있으면 학교가 있건 없건 알아서들 해나가지만 이에 해당하지 않는 애들은 그대로 망가지고 도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아마도 본문에 대한 저희 어머니의 답은, \'거기에 가지 않으면 자기의 삶이 희극인지 비극인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저 답에 저도 꽤 공감합니다. 저도 굉장히 모난 성격과 예민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 시스템이라는 건 아주 피곤하고 스트레스였거든요. 검정고시도 진지하게 고민했었고... 근데 이건, \'스탠더드\'를 경험해봤고 그렇기 때문에 스탠더드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지, 만약에 제가 미국의 특정 소수 종교 집안에 태어나서 홈스쿨링(을 빙자한 전근대적, 종교적 교육)을 받았고 제 주변도 다 그러하다면 아마 의문 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가지긴 하겠지만... 근데 사람은 타고난 것도, 가진 것도 분명히 평등하지 않고, 그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고, 그 간극에서 누군가에게는 선택일 수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단지 박탈당했을 뿐인 그런 상황도 나올 겁니다. 결국 공교육 시스템이 출현한 역사도 이 지점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하는 이유 역시 그것이 현 시대의 스탠더드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걸 단편적으로라도 경험시켜주어야 기회를 박탈당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가서 보고 아니다 싶어서 때려치는 건 일찍 일찍 할수록 좋은 것이고...
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