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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7/01 08:47:57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동북아 역사지도 프로젝트 폐기"에 부쳐
역설적이게도 역사는 늘 현재형입니다. 연구대상이 과거에 벌어진 일들이고 그 과거는 결국 시간 속에 박제되어있는 건데 그게 왜 현재형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답은, 연구자가 현재를 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미래의 연구자가 될 학생들은 모종의 개인적 동기를 가지고 사학과 혹은 유관 학과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동기를 때로는 조탁하고 때로는 통째로 뒤집어 엎어가면서 각자의 개성에 맞는 학자로 성장하지요. 그렇게 성장한 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투척하고, 과거로부터 그 답을 얻습니다.

학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들인지라 한 개인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그 사회에 속한 다른 개인들 역시 동시에 궁금해할 만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정말 아무도 관심 없는데 나만 그게 궁금해서 연구하고자 하는 친구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친구들의 관심사는 각종 장학재단 심사위원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기 때문에 장학금을 얻지 못합니다. 설령 돈이 욜라 많아서 자비로 공부하려고 한다고 쳐도 각급 교수들이 그 학생의 문제의식에 별로 공감하지 못해서 대학원에 잘 안 받아줍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의 문제의식은 그냥 [개인]적인 것으로 남고 끝나게 마련이지요.

따라서 사학자들의 문제의식은 개인이 아닌 전체 사회의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것이요, 그래서 이 학자들이 과거에 질의한 결과 내놓는 해답들은 해당 사회 구성원 전체가 향유하는 자산이 됩니다. 향유하다보면 변합니다. 질의응답시간이 길어지다보면 처음과는 달리 대화 내용이 산으로 가듯이 말이죠. 묻고 답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질문자가 변하고, 질문자가 변하다보니 질문도 변하고, 질문이 변하다보니 다른 답이 나오고, 다른 답을 들으니 또 신기해서 새로운 질문이 나옵니다.

물론 이런 변화의 동력은 역사학계 내부에서 오는 것보다도 외부에서 오는 게 더 큽니다. 예컨대 70년대의 명사(明史) 전공자들은 명나라의 해금 (海禁) 정책을 예로 들며 이러한 종류의 [쇄국] 정책이 명나라를 고립된 사회로 만들었다는 등의 주장을 정설로 밀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의 명사 전공자들은 이런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애초에 명나라가 전혀 고립된 사회가 아니었음을 역설하게 됩니다. 어느쪽 말이 맞느냐를 차치하고 왜 이렇게 말이 바뀌었냐를 따져보자면, 별 거 없습니다, 중국이 그 사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중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서 그렇습니다. 중국이 문 딱 닫고 외부와 거래를 안 할 때는 연구자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아 이거 쭝궈들은 뭔가 예나 지금이나 폐쇄적인 것 같은데]하고 전제를 깔게 되는 반면 중국이 문을 열어제끼고 막 탁구도 치고 닉슨도 불러서 마오타이도 멕이고 하는 걸 보면 [아 임마들은 예나 지금이나 참 사교적인 것 같은데] 하고 전혀 다른 전제를 깔게 되는 거지요.

이렇게 써놓고 나면 역사학이란 그냥 도대체가 주관적인 거라 믿을 수 없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무슨 슈뢰딩거의 쯍궈런도 아니고 폐쇄적인데 개방적이라는 게 말이 되냐는 건데요. 뭐 좀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 그래도 객관적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엄존합니다. 현재를 사는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 늘 변하는 와중에도 과거는 표연히 그 자리에 서서 질문자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과거는 마치 변치 않는 게임의 룰 같은 역할을 합니다. 늘 변화하는 게이머들과 달리, 해당 게임의 기본 규칙들은 늘 그 자리에 남아서 게이머들이 뛰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열어주고 동시에 제약합니다. 뭐랄까, 축구 전술이 늘 변해도 축구 규칙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10년이 흘러도 드라군의 공격력은 폭발형 20인 것과 같달까요.

현재를 사는 게이머들은 그래서 으레 게임의 룰에 대해 불만을 갖게 마련입니다. 테란은 개사기라든가, 오프사이드 룰은 축구를 재미없게 만든다든가, 박사붐은 너프되어야 한다든가 등등. 역사학과 게임이 유비가 무너지는 부분은 아마 이 지점일 거에요. 게임의 룰은 합의 하에 바꿀 수 있지만, 역사 해석을 강하게 규제하는 저 과거라는 놈은 결코 바꿀 수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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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생시절, 그리고 석사생 초기 시절, 제 문제의식은 [한국 철학]이었습니다. 그게 뭐냐고, 그런게 있냐고들 물을 때마다 있"을"거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아무리 연구해봐도 뭐가 나오질 않더라구요. 표면화하진 못했지만, 의식의 밑바닥에선 그저 [과거]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사료를 아무리 읽어도 뭐 힌트도 안나오던 걸요. 그러다보니 "그런게 있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더 강박적으로 반응하게 되었지요. 있을 거라는 대답 대신 있다는 대답을 하는 비율이 점점 올라갔어요. 물론 거짓말이었지요. 없는데 있다고 해서 거짓말이 아니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있다고 해서 거짓말이었어요.

그러다 한 선배 연구자와 술을 마시게 됐는데, 또 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 문제의식에 대해 있어보이는 헛소리를 장황하게 늘어 놓았지요. 그러자 "얌마 확실히 해. 한국 철학이 있다는 거야 아니면 있었으면 좋겠다는거야" 라고 하시더라구요. 정곡을 찔리니까 말문이 탁 막힌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습니다. 이어서

"됐으니까, 술 깨면 가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봐. 설령 어둠이 널 삼킬지라도."

그 말에 술에서도 깨고 민족주의의 꿈에서도 깼습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지요. 그리곤 한참을 민족주의 사관 욕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또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다시 민족주의자가 되어서 그런거냐하면 그건 아니고,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과거의 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그렇게 이해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용서하게 되고, 뭐 그래서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면 전 [영광]에 목말라 있었어요. 상자 속에서 그게 나오길 바랐지요. 상자 안에 그게 없음을 확인한 뒤 저는 그 갈증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제게 원하는 답을 주지 않은 그 상자가 몹시도 미웠던 걸 보면 전 여전히 목말라있었던 모양이에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어쩐지 좀 해갈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젠 그 상자가 그닥 좋지도 밉지도 않게 되었어요. 그냥.... 상자지요. 이러저러하게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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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역사지도가 폐기처분된 이유는, 제가 실물을 못봐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 민족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그럴 거에요. 중대한 결격사유라고 든 항목들 중에 "한반도의 위치가 지도 중앙에 있지 않아서" 라는 말이 눈에 걸렸어요. 명색이 "동북아" 역사지돈데 한반도를 중앙에 놓으면 왼쪽은 중국이 지도 밖으로 터져나갈 테고, 또 그 경우 오른쪽은 바다라는 이름의 공백을 대체 얼마나 넣어야 하나요'ㅅ'. 그걸 떠나서 한반도의 위치 여부가 700매가 넘는 지도 프로젝트 전체를  파기해야 하는 중대 결격사유..음..어흠..

하지만 저 지도를 퇴짜 놓은 발주자, 동북아 역사재단의 속마음도 이해 못할 건 아닙니다. 상자 안의 물건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보고 싶은 걸 보기 위해 발주한 프로젝트일 거에요.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작했다고 하니까요.  그걸 "가치 중립 : 민족, 지역, 이념, 선호도에 따른 편향성 배제"라는 모토 하에 8년간 고생하며 만들었으니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던 거지요. 이미 쓴 연구비까지 반납하게 생긴 70여 명의 사학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연구 결과를 보고 깊이 마음 상해서 잠도 못 잤을 재단 관계자 분들께도 심심한 위로를 올립니다.


관련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01/20160701000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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