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07/07 15:17:55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펌] 글쓰기란 병법이다
연암 박지원의 글입니다. 존경하던 선생님께서 소개해줬던 글귀인데 문득 생각나서 퍼옵니다.

-----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아마도 병법을 알았던 것인가.

글자 (=단어) 는 비유하면 군사이고, 글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은 적국(敵國)이고 전고(典故)와 고사는 전장의 보루이다. 글자를 묶어서 구(句)를 만들고, 구를 묶어 문장을 만듦은 대오를 편성하여 행진하는 것과 같다. 음으로 소리를 내고 문채(文彩)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조응(照應)은 봉화(烽火)에 해당하고, 비유(譬喩)는 유격병에 해당하며, 억양 반복은 육박전을 하여 쳐죽이는 것에 해당하고, 파제(破題)를 하고 결속(結束)을 하는 것은 먼저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사로잡는 것에 해당한다. 함축을 귀하게 여김은 늙은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사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무릇 장평(長平) 땅에서 파묻혀 죽은 조(趙)나라 10만 군사는 그 용맹과 비겁함이 지난날과 달라진 것이 아니고, 활과 창들도 그 날카로움과 무딘 것이 전날에 비해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적을 제압하여 승리하기에 충분했고, 조괄(趙括)이 대신하면 자신이 죽을 구덩이를 파기에 족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군사를 잘 쓰는 장수는 버릴 만한 군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은 이것저것 가리는 글자 (=단어) 가 없다.

진실로 훌륭한 장수를 만나면 호미 고무래 가시랭이 창자루를 가지고도 굳세고 사나운 무기로 쓸 수 있고, 헝겊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아연 훌륭한 깃발의 정체를 띠게 된다. 진실로 올바른 문장의 이치를 깨치면 집사람의 예삿말도 오히려 근엄한 학관(學官)에 펼 수 있으며, 아이들 노래와 마을의 속언도 훌륭한 문헌에 엮어넣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문장이 잘 지어지지 못함은 글자 탓이 아니다.

자구(字句)의 아속(雅俗)을 평하고, 편장(篇章)의 고하(高下)만을 논하는 자는 실제의 상황에 따라 전법을 변화시켜야 승리를 쟁취하는 꾀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비유하자면 용맹하지 못한 장수가 마음속에 아무런 계책(計策)도 없다가 갑자기 적을 만나면 견고한 성을 맞닥뜨린 것 (처럼 당황하는 것) 과 같다. 눈앞의 붓과 먹의 꺾임은 마치 산 위의 초목을 보고 놀라 기세가 꺾인 군사처럼 될 것이고, 가슴속에 기억하며 외던 것은 마치 전장에서 죽은 군사가 산화하여 모래밭의 원숭이나 학으로 변해버리듯 모두 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짓는 사람은 항상 스스로 논리를 잃고 요령(要領)을 깨치지 못함을 걱정한다. 무릇 논리가 분명하지 못하면 글자 하나도 써내려가기 어려워 항상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깨치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면서도 오히려 허술하지 않은가 걱정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항우(項羽)가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자신의 애마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과 같고, 물샐틈없이 전차로 흉노를 에워쌌으나 그 추장은 벌써 도망친 것과 같다.

한마디의 말로도 요령을 잡게 되면 적의 아성으로 질풍같이 돌격하는 것과 같고, 한 조각의 말로써도 핵심을 찌른다면 마치 적군이 탈진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저 공격신호만 보이고도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과 같다. 글짓는 묘리는 이렇게 하여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 (朴趾源의 ‘騷壇赤幟引’에서)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7-18 11:29)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
  • 이 아재는 퍼와도 연암이다...세상에!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922 32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78 31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50 20
1415 정치/사회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88 18
1414 일상/생각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55 36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 심해냉장고 24/10/20 1592 41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90 16
1411 문학『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69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48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98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43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74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2009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626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66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34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711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610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817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86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98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50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108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73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75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