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10/24 20:17:25수정됨
Name   SCV
Subject   [한단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 [유산이래]

카톡에 떠오른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 건, 오전 아홉시 십 칠분, 아침 미팅이  끝나고 담배 한 대를 피고 나서 자리에 앉아 방금 전에 들어온 클라이언트의 메일을 열었을 때였다. [긴급] 말머리가 붙어 온 클라이언트의 메일과 무미건조하게 카톡에 찍힌 개인적인 네 글자 중에 어떤게 더 중요한 것인지는 직장인들이라면 잘 알리라. 그러나 도저히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메일을 닫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알람이 뜬 것 뿐이니 아직 읽은건 아니다. 생각하자.

내일 아침엔 상무님 보고가 있다. 오늘 저녁까지는 부장님 컨펌이 끝나야 한다. 막내가 하고 있는 파트 진척 사항도 오늘 오후 중으로는 체크가 완료되어야 한다. 내 파트 맡은 부분 처리하기도 바빠 드래프트도 못봤다. 대표님 보고는 내일 저녁이다. 내일 아침 상무님 보고가 퍼펙트하게 끝날리는 없다. 부장님 컨펌조차 밤을 샐 각오를 해야 하는데. 그러나 계산할 꺼리가 되지 못했다. 벌써 올해 세 번째, 그것도 네 명의 아이를 저 네 글자에 보냈다. 묻을 곳 조차 없어 가슴에 묻은 아이가 벌써 넷이다.

- 부장님 저..
- '어, 이대리 왜?'
- 저 집에 좀 일이 있어서..
- '무슨 일?'
- 와이프가 많이 아프답니다.
- '제수씨 임신한지 얼마 안됐잖아?'
- 그게...... 휴.... 그렇게 됐답니다.

다행히 우리 부장님은 눈치와 사리가 어두운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눈치를 챈 기세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아주 잠깐 스쳐간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 쯧' 하는, 뱉지 않은 말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라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너만 애 낳냐' '와이프가 집에 혼자 있는 애가 왜 이리 유난이냐' 소리나 안들으면 다행이다.

- '이 건 누구랑 했지?'
- 재영이랑 같이 했습니다. 제 파트는 대충 마무리 되었습니다.
- '대충?'

아차. 부장님의 말꼬리와 입꼬리, 그리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위험하다.  

- 지난번 검토하시고 말씀해주신 피드백까지는 반영해두었습니다.
- '알았어. 믿고 가야지 어떻게 해. 파일 주고 가. 재영이꺼는 일단 내가 보고... 상무님 보고는 어떻게 하지?'
- 상황 봐서 밤에 들어와서 정리하겠습니다.
- '어렵더라도 그렇게 좀 해줘. 이대리 아니면 이 보고 힘들잖아. 부탁좀 하자. 재영아!'
- '넵~~'

어렵사리 회사일을 짧게 마무리 하고 카톡을 열었다. 여전히 내가 읽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내가 읽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것 같진 않다. 답장을 찍는다.

- [정리하고 있어. 어디야?]
- ['A3 병원이야. 애들 둘 다 커서 처치 받아야 하는데 와서 싸인좀 해']
- [미안해. 빨리 갈게]

아내가 타자한 글자 중에 '애들' 이라는 글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지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고, 유지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다. 하나를 보내고 다시 가지고 둘을 보내고 다시 가지고 셋째와 넷째를 한꺼번에 가졌다. 앞서 간 두 아이가 같이 사이좋게 손잡고 오는거라 생각하며 좋아했지만, 이제 셋째와 넷째 마져 보내야 한다.

행복아, 건강아.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특별히 빠를 것 같진 않았지만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아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몸살기운은 없는데, 왜이럴까. 내 몸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밀려온 상실감 때문일까. 꽤 비겁하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수정과정에 관여하는 것 외에는 아이를 키우고 낳고 다시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희생에 달린 일이다. 그 희생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 아내의 상실감을 손톱만큼도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아이를 가슴에 묻는다는 둥 상실감이 든다는 둥 하고 있다. 구토감이 들었다. 멀미 때문인지, 혐오감 때문인지.

- [왔어]
- ['싸인 해']

병원에서 만난 아내는 이미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는 회색 클립보드에 얹은 종이와 볼펜을 똑딱거리며 내게 내밀었다. 수술동의서였다. 빠르게 훑고서 서명했다.

- [괜찮아?]
- ['........... ']
- [아니 난....]
- ['내일 회사 가?']
- [............]

서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주고 받은 뒤,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는 수술실 밖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부장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

오늘은 픽션 80%에 실화 20% 정도 되겠네요. 어떤게 실화고 픽션인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사실 많은 부부들에게 낳지도 못하고 가슴에 묻은 아이들이 꽤 있을 걸로 압니다. 천진하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매년 기일이 되면 절에 가서 태명을 걸고 안부를 전하는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많은 부부들이 슬픔을 극복하고 살아갑니다. 가끔은 그 슬픔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크기도 하고, 또 그 큰 슬픔이 점점 작아지기도 하고, 다시 커지기도 합니다. 그 크고 작은 슬픔들을 안고 사는 많은 부부들에게, 별거 아닌 이 글을 바칩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1-07 09:42)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1
  • 저희도 지금 아이들 가지기까지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유산은 출산만큼 힘든 일이라는 걸 그 때 알았지요.


픽션포함이라고 하셨지만 무거운 이야기네요.
유산은 저도 경험해 본 일이기는 합니다만 임신사실과 동시에 알게되었던 초기유산이라서 막상 아내만큼 크게 느끼지는 못했었습니다.
저한테 꽤 힘들었던 일은...... 아이 유산해서 오후 반차 내고 나가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너는 왜 애기 안 갖냐?" 라고 물어보던 옆 파트 친한 부장님의 질문이었습니다.
한동안 그 사람 얼굴도 보기 싫더라고요. (그분 죄는 아니지만...)
오후반차를 쓰고 퇴근하셨군요.

제가 근무하는 회사에서는 직원의 유산은 임신기간에 따라 5일에서 3달까지 유산휴가를 줍니다.
배우자 유산인 경우에는 임신기간 상관없이 3일 휴가를 주고요.

다른 곳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규정이라 놀랍기도 했지만, 다른 곳도 이런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좋은 회사군요. 배우자 유산까지도 챙겨준다니....
저는 와이프랑 병원을 다녀와서 집에서 마무리 못한 일을 다 보고 그다음날 새벽같이 출근해서 일을 마무리 했던 기억이납니다.
지금이야 아이도 둘 있고 지나간 일이지만, 당시 그 일을 겪고서 제가 휘리릭 나가버린 집에 우두커니 혼자 남아 몸 안팎으로 적막함을 겪었을 와이프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밀크티티
애기 키우는입장에서 보니 눈물이 왈칵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이수수께끼상자
후... 6개월만에 조산해.. 인큐베이터에서 9일만에 하늘나라간 우리 큰딸 생각나네요.
매일 점심이 병원 면회시간이라.. 회사 양해 받고 시간맞춰 가 인큐베이터 밖에 서서 면회시간 내내 울기만하던 생각 나네요.
그러다 8일째... 의사가 인큐베이터를 열더니 와서 아이 한 번 만져보시라고...아마 오래 못 있을 거 같다고 그래서 들어가서
그 작은 발끝만 만지작거리는데 난 이제 웃을 일이 평생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구만요.. 미안하다는 말만 나오고..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새벽 병원에서 전화가 오고, 직감을 한 아내는 울면서... 더 보기
후... 6개월만에 조산해.. 인큐베이터에서 9일만에 하늘나라간 우리 큰딸 생각나네요.
매일 점심이 병원 면회시간이라.. 회사 양해 받고 시간맞춰 가 인큐베이터 밖에 서서 면회시간 내내 울기만하던 생각 나네요.
그러다 8일째... 의사가 인큐베이터를 열더니 와서 아이 한 번 만져보시라고...아마 오래 못 있을 거 같다고 그래서 들어가서
그 작은 발끝만 만지작거리는데 난 이제 웃을 일이 평생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구만요.. 미안하다는 말만 나오고..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새벽 병원에서 전화가 오고, 직감을 한 아내는 울면서 받지 말라고 하다가 반쯤 실신하고.... 그래도 마지막을 봐야 할 거 같아서 아내 업고 도착했더니 아이는 이미 전신이 파랗고...

우리 딸 잘 지내니...
보고싶다. 아흐레 남짓 본 그 작은 기억이 아니라, 동생들 속에 섞여 언니 누나 노릇하고 있을 너의 미래가 그립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마지막 말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36 일상/생각여행을 나서면 집에 가고 싶다. 4 풀잎 25/01/30 827 10
1435 꿀팁/강좌스피커를 만들어보자 - 3. 인클로저 설계 Beemo 25/01/29 871 4
1434 체육/스포츠해리 케인의 무관에 대하여. 12 joel 25/01/27 1003 12
1433 체육/스포츠볼링 이야기 20 거소 25/01/19 734 5
1432 일상/생각저에게는 원칙이 있습니다. 13 whenyouinRome... 25/01/19 1598 49
1431 일상/생각집사 7년차에 써보는 고양이 키우기 전 고려할 점 12 Velma Kelly 25/01/18 1011 20
1430 일상/생각입시에 대해 과외하면서 느꼈던 것들, 최근 입시에 대한 생각 12 Daniel Plainview 25/01/17 1570 16
1429 정치/사회민주당을 칭찬한다 13 명동의밤 25/01/15 2107 34
1428 꿀팁/강좌전자렌지로 탕후루 만들기 레시피 수퍼스플랫 25/01/11 770 7
1427 정치/사회탄핵심판의 범위 및 본건 탄핵심판의 쟁점 6 김비버 25/01/06 966 14
1426 IT/컴퓨터인공지능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빨" 5 T.Robin 25/01/05 1072 8
1425 음악2024 걸그룹 6/6 6 헬리제의우울 25/01/01 961 26
1424 정치/사회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제2차 변론준비기일 방청기 8 시테 25/01/03 1307 26
1423 정치/사회그래서 통상임금 판결이 대체 뭔데? 16 당근매니아 24/12/23 1368 13
1422 정치/사회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차가운 거리로 나서는 이유 10 삼유인생 24/12/08 1634 84
1421 일상/생각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난 다시 만난 세계,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노래 4 소요 24/12/08 1222 22
1420 정치/사회 나는 더이상 차가운 거리에 나가고 싶지 않다. 9 당근매니아 24/12/08 1719 43
1419 기타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7 알료사 24/11/20 4909 33
1418 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1448 32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1042 33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1303 21
1415 정치/사회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3 매뉴물있뉴 24/10/28 2360 18
1414 일상/생각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1283 37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심해냉장고 24/10/20 1947 41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2308 16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
회원정보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