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11/13 01:03:12
Name   nickyo
Subject   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 무지막지한 인파에 비해 정말 말도 안되게 높은 질서가 유지되었습니다. 이 인원이 모였는데 부서진 차, 깨진 유리 이런건 고사하고 쓰레기마저 알아서 챙겨가고 모으고.. 게다가 길 터주고 서로 각자 방향 맞춰서 움직이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남여/여남 할것없이 서로 부딪히고 쓸리고 하면서 불쾌할법도 한데 이 상황에 대한 높은 이해와 공감으로 다들 굉장히 잘 발맞춰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단... 개인적인 감정으로 굉장히 기쁩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위 자체가 어떤 힘을 갖고 있을지가 좀 의아했습니다. 가령 국민의당/정의당/더불어민주당은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결국 광화문과 청계광장 근처에서 연설을 하고 문화제에 참여하는 수준이었는데... 제가 4시부터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내가 콘서트를 보러온건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너무나 질서정연하고 반응 좋고 구호 잘 외쳐주고 행진 잘 되고.. 그런데 결국 경복궁 라인으로 가두리 된 곳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원들과 돌고 도며 밀치고 밀쳐지며 좋았다..고 생각'해야'했습니다.

3. 개인적으로 과거의 폭력적인 민중의 분노나 저항권의 행사가 실제로 공권력에 대해 엄청난 위력을 지녔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로 따져본다면, 그렇게 과격한 운동이 유일하게 계승된 노조들의 단일 파업에서 지는 일이 더 적었겠죠. 하지만 그런 폭력 시위가 노조단위에서까지 물러나고 나서도 우리는 매번 지기만 했습니다. 굴뚝위에 올라가 수백일을 버티고, 길거리에서 천몇백일을 버텨도 지는.. 그런 싸움들이요.

4. 평화 집회를 고수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게 의미있다고 믿는 것, 저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집회들에서 막말로 우리가 그렇게해서 대체 이긴적이 있나...하면 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실제로 못이겼으면 뭔가 저항과 승리의 마음이라도 느껴야 하는데 집회를 많이 열심히 다닌 사람일수록 여러분의 고생과 힘이 슬프게 느껴질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민 일반이 평화적으로 집회만 해도 되는 선결조건이 있다면 제도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상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의회와 사법부가 어느정도 괜찮은 시스템으로 굴러간다면 시민 일반은 목소리를 내어 의도를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대규모 소요에 가까운 집회나 시위의 세계적 상황들을 보면 이러한 시스템이 무너지거나 훼손된 상황에서 공권력에 대한 거부/사회계약에 대한 거부 로 이어집니다. 경찰에게 폭력쓰자는 소린가요? 같은 사람들인데? 는 논점이 맞지 않는게.. 이건 권리 단위에서 부딪히는 갈등이라 개별 주체의 손익으로 따지게 되면 민주주의와 공동체 자체는 동시존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됩니다. 상호모순적이 되는..  그럼 우리 시스템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6. 이런 제안을 해보고 싶습니다. 집회가 평화로워야 하고 우리의 시위가 즐겁고 유쾌한 주말의 행사로 끝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일상에서는 날 선 투쟁을 보여야 한다고. 자신의 소속 정당,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 지자체 등에다가 정치적 의사표시를하고, 자신이 속한 작은 공동체들에서 타인을 설득하고 정치적 영역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요. 현 정부가 제 손으로 하야나 퇴진을 하지 않아도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지 않고싶다면, 시스템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때 당신들의 권력을 돌려받겠다고 얘기해야죠. 안하면 다음 선거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네들에게 투표할 사람들을 투표하지 않도록 설득하고 다닐꺼다. 내 삶의 일상에서 나는 당신들이 지지받을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거다. 그러니 당신들이 당장 시스템을 고치고 저 부조리한 대상을 끌어내려라.

못하겠으면서, 우리에게 평화로우라 명령하지 말라.


7. 일상생활에서 많이 느끼시겠지만, 말로 해서 통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와 완전히 이해관계가 다른 이에게 말로 설득하는건 더더욱 그렇죠. 그러나 우리 시민공동체는 평화적이고 즐거운, 콘서트나 축제와 같은 시위문화를 정착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행진이 합법임에도 불법적으로 공권력이 시민을 막는 상황에서 경찰을 폭행하는 것도아니고 방패를 뺏고 스크럼을 뜯어내고 버스에 올라간다고 쁘락치다, 변질시키지마라, 나쁜놈들이다. 그러지마라 를 외치는 시민 분들은 성숙한 질서의식과 준법정신이 있는 좋은 분들이지만, '공권력이 법조차 지키지 않으면' 그건 무너진 시스템입니다. 만일 내가 통수권자나 이 민의와 정 반대에 있는 입장이라면, 이만큼 꿀맛나는 시대도 없을겁니다. 모든 갈등이 세 치 혀 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시대. 오늘 청와대의 불은 꺼져있었다고 합니다. 저라면 그냥 수면약 먹고 음악 틀어두고 잤을겁니다. 우리가 다른 세계의 피튀기는 내전이 남 일이듯, 그들에게도 우리의 민의는 남 일일겁니다.



8. 시민이 평화롭기를 바란다면, 대의자들은 싸워야 합니다. 시민이 얌전하기를 바란다면, 대의자는 선봉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법 질서를 수호하고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가 질서정연하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기준을 공권력에는 더욱 엄격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의 집회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이제 그 굉장함이 다음 한주간 어떻게 소화될지 기대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메인 언론들의 프레임에 놀아나면서 착하고 멋지고 선진적인 시민으로 남음과 동시에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는 결과와는 아무 상관이 없더라'로 흐를수도 있고, 우리의 목소리가 다행히 저들에게 닿아 누군가들이 낭중지추가 되어 저들과 제도권 내에서 더 열심히 싸우고 결과를 바꾸어 나갈수도 있습니다. 부디 우리의 이러한 선진적이고 평화로운 민의가 그렇게 닿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언제나 역사에서 그러하였듯이, 우리는 우리를 착한 아이들로 가두었을때 가장 기쁘고 이익이 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끝까지 감시하고 주목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지기 직전 마지막에 서 있는 것은 우리 시민, 민중이며 그렇기에 우리에겐 고장난 시스템을 변혁시킬 의무와 책임,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와 기쁨의 다른 얼굴로 제도권의 방식을 통해 위정자들을 압박하십시오. 대표자들을 압박하십시오. 그래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계속 착할 수 있습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1-28 10:04)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2
  • 동감합니다. 위정자들을 압박! 대표자들을 압박!
  • 동감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20 일상/생각면접으로 학부신입생 뽑은 이야기 47 기아트윈스 16/12/10 7709 22
317 일상/생각이것은 실화다. 10 성의준 16/12/06 5710 11
308 일상/생각착한 아이 컴플렉스 탈출기. 5 tannenbaum 16/11/24 5748 14
301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5602 12
299 일상/생각영화 <색, 계> (와 아주 살짝 관련된 이야기) 18 black 16/11/11 6318 19
295 일상/생각아재의 커피숍 운영기 - Mr.아네모네. 15 tannenbaum 16/10/30 5259 6
293 일상/생각꼬마 절도범 6 tannenbaum 16/10/26 5547 6
288 일상/생각골목길을 걷다가 20 마르코폴로 16/10/21 6982 5
284 일상/생각보름달 빵 6 tannenbaum 16/10/14 4943 14
283 일상/생각태어나서 해본 최고의 선물. 81 SCV 16/10/13 10391 34
280 일상/생각전직 호주 총리 만난 썰 40 기아트윈스 16/10/12 6607 8
275 일상/생각[펌] 시대로부터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46 기아트윈스 16/10/06 5822 14
262 일상/생각하나님 한 번만 더 할아버지와 대화하게 해주세요. 7 Terminus Vagus 16/09/09 5287 10
254 일상/생각온수가 나오는구만, 수고했네 6 성의준 16/08/23 5373 5
248 일상/생각미국과 캐나다에서의 술사기 17 이젠늙었어 16/08/11 9016 7
245 일상/생각아재의 대학생 시절 추억담들. 27 세인트 16/08/03 6673 5
238 일상/생각이럴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34 Darwin4078 16/07/26 7003 6
237 일상/생각아빠이야기 36 기아트윈스 16/07/24 6207 20
234 일상/생각백윤식을 용납하기 위해서 40 선비 16/07/23 7534 19
227 일상/생각. 12 리틀미 16/07/03 5266 8
224 일상/생각서로 다른 생각이지만 훈훈하게 29 Toby 16/06/28 5772 6
223 일상/생각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6 켈로그김 16/06/25 6152 14
222 일상/생각브렉시트 단상 27 기아트윈스 16/06/25 6714 9
221 일상/생각홍씨 남성과 자유연애 62 Moira 16/06/22 9303 14
218 일상/생각겨자와 아빠 7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6/06/14 6184 1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