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11/21 05:08:15
Name   틸트
Subject   [한단설] 손 없는 날
이삿짐센터 직원에게 거의 이십 년간 들어보지 못한 단어를 들은 김은 조금 당황했다. 손 없는 날이라니. 전화를 끊은 김은 이십 몇 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곤돌라가 쉴 새 없이 이삿짐을 올리고 있었다. 새 아파트의 거실 구석에 앉은 할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하필 오늘 이사를 한다고 그래. 이사는 손 없는 날 해야 되는데. 할머니는 내내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김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손 없는 날이 뭐에요? 할머니는 손자의 질문을 기특해하며 대답했다. 손이라는 건, 일종의 귀신이란다. 이사를 가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귀신이지. 그래서 이사는 손 없는 날 해야 한단다. 오늘은 손이 낀 날인데, 그런 날 이사를 하면 재수가 없어. 자꾸만 나쁜 일이 생긴단다.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함께 짐을 나르던 김의 아버지는 할머니와 김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다 옛날 사람들 미신이란다. 하지만 그런 미신이 있는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싸고 편하게 이사를 할 수 있는 거지. 어머니, 손 없는 날 이사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가격도 비싸고요. 손 있는 날 이사하는 게 더 편해요. 호기심 많은 기특한 손자 덕분에 조금 밝아졌던 할머니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나는 곧 갈 사람이니까. 재수가 없어도 너희들 재수가 없지 내 재수가 없겠니.

손이 낀 날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와 상관없이 이사는 별 일 없이 잘 끝났다. 그날 저녁, 짜장면과 탕수육의 이사 만찬을 앞에 둔 김의 아버지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다 잘 되었으니, 앞으로도 잘 되겠지. 우리 가족은 부자가 될 거란다. 반 년 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삿짐을 실어올린 곤돌라가 할머니의 관을 실어 내렸다. 한창 사업이 궤도에 오른 김의 아버지는 명당으로 소문난 산자락에 할머니를 안치했다. 이거 참, 어머니, 아들 잘 두신 덕에 평생 비싼 자리에 누우시네. 좋은 자리에 눕혀드렸으니 이제 손 없는 날 이야기는 안 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관을 묻으며 그렇게 말했다.

작은 건설 시공사를 운영하던 김의 아버지는 이듬해, 공사가 중단된 어느 빌딩의 철제 빔 끝에 목을 매달았다. 한 계절 전부터 공사는 무기한으로 중단되었고 대금 지불도 마찬가지로 무기한으로 지연되었지만, 김의 아버지의 사업 자금 대출은 무기한으로 연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스에 등장하는 종류의 사건은 아니었다. 1996년의 신문 지면이란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실어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중학생이었던 김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생각했다. 손 때문일까. 손 없는 날 이사를 했으면 IMF가 오지 않았을까. 혹은 아버지가 건설업 말고 다른 일을 하게 되었을까. 혹은 무리하게 대출을 내서 시공 입찰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냥, 운이 없었던 거지. 김은 그 때도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십 년동안 김은 여러가지를 배웠다. IMF가 온 이유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건설업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버지가 그 때 무리를 했던 사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엇인가. 그냥, 운이 없었던 거지.

김은 옛 추억을 정리하고 중얼거렸다. 손 없는 날이라니. 아직도 그런 개념이 남아있구나. 아무튼 그 날은 피해야겠군. 이삿짐센터의 상담 직원은 손 없는 날 이사를 하려면 조금 더 비용이 많이 들며, 적어도 보름에서 한 달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김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돈도 별로 없었다. 다시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건 김은 이사 날짜를 확정했다. 네. 네. 그 날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은 의자에 앉은 채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사를 가게 될 집이 원래 살던 집보다 작았기에, 버려야 할 물건들이 아주 많았다. 어디부터 시작하지. 먼저 김은 눈앞의 책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은 스탠드형 액자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세 달 전까지, 액자는 김과 애인의 사진을 담고 있었다. 왜 헤어질 때 사진만 빼서 버렸을까. 액자 통째로 버려버릴 걸. 그녀에게 남아있던 액자만큼의 미련 때문인지도 모르고, 새로운 사진으로 액자를 채우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정리를 시작했다. 손 없는 날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는 게 빠를까, 내가 언젠가 여유롭게 손 없는 날 이사를 갈 수 있는 날이 오는 게 빠를까. 쓸데없는 질문이 떠오르며 조금 우울한 느낌이 들었지만 김은 씩씩하게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일이 바빠 한동안 눈팅만 하고 있자니 조각글 대신 한단설, 이라는 말머리로 짧은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네요. 저도 슬쩍 들어와 짧은 창작글을 올려 봅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2-05 10:55)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1
  • 글이 참 편하고 좋네요.
  • 참 한국적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았어요 정말로.
  • 좋은 글이군요.
  • 좋아요.
  • "이삿짐을 실어올린 곤돌라가 할머니의 관을 실어 내렸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29 역사[펌] 글쓰기란 병법이다 14 기아트윈스 16/07/07 6093 3
425 정치/사회[펌] 대선후보자제 성추행사건에 부쳐 112 기아트윈스 17/05/04 8147 14
275 일상/생각[펌] 시대로부터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46 기아트윈스 16/10/06 5420 14
858 일상/생각[펌] 자영업자의 시선으로 본 가난요인 43 멍청똑똑이 19/09/13 10339 89
903 일상/생각[펌글] 좋은게 좋은거라는 분위기가 세상을 망쳐왔다 21 Groot 19/12/27 5231 8
289 창작[한단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8 SCV 16/10/24 6089 11
306 창작[한단설] 손 없는 날 2 틸트 16/11/21 6347 11
1389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1195 15
182 기타[회고록] 그 밤은 추웠고, 난 홍조를 띠었네. 43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4/12 5096 10
437 일상/생각[회고록] 그녀의 환한 미소 17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5/24 4428 13
341 일상/생각[회고록] 나 킴치 조아해요우 19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1/09 5252 18
4 게임[히어로즈] 이것만 알면 원숭이도 1인분은 한다 64 Azurespace 15/05/30 12699 76
1079 IT/컴퓨터<소셜 딜레마>의 주된 주장들 9 호미밭의 파스꾼 21/04/06 4028 13
599 일상/생각#metoo 2017년 11월 30일의 일기 41 새벽3시 18/02/28 6535 54
1226 정치/사회<20대 남성 53% "키스는 성관계 동의한 것">이라는 기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 보고서 원문 자료를 바탕으로 46 소요 22/07/25 4533 39
840 문화/예술<동국이상국집>에 묘사된 고려청자 3 메존일각 19/08/01 4907 7
817 과학0.999...=1? 26 주문파괴자 19/06/14 6076 19
257 문화/예술100억 짜리 애니메이션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개봉되는 이유 14 Toby 16/08/31 7842 3
179 IT/컴퓨터100점짜리 단어를 찾아서. 30 April_fool 16/04/05 10537 15
504 일상/생각10년전 4개월 간의 한국 유랑기 #완 16 호라타래 17/09/02 5389 18
1363 정치/사회10년차 외신 구독자로서 느끼는 한국 언론 32 카르스 24/02/05 2889 12
1261 체육/스포츠10의 의지는 이어지리 다시갑시다 22/12/31 2118 6
113 정치/사회11.14 후기입니다 5 nickyo 15/11/14 5354 23
301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5134 12
896 여행12월에 강릉에 가는 이유... 6 whenyouinRome... 19/12/09 5393 3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