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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12/30 08:03:01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산타가 없다는 걸 언제쯤 아셨어요?
1.

때는 89년 겨울, 제가 저희 삼촌이 만 5세를 막 넘겼을 무렵이었어요. 삼촌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성탄절 기념 이벤트 같은 걸 마련했나봐요. 크리스마스에 즈음하여 원장선생님의 남편분이 산타분장을하고 원생들의 집에 방문하여 선물을 준다는 내용이었어요. 

삼촌은 산타클로스가 어쩌구 크리스마스가 어쩌구 하는 이야기들을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산타를 보는 건 처음이라 무척 신기했대요. 어 그런데? 실제로 산타를 보고나니 뭔가 마음 속에서 의심이 드는 거예요. 어쩐지 위화감이 들어서 선물을 받고 나서도 신경이 쓰였고, 그래서 산타가 나가자마자 베란다로 뛰어나가 창문 밖을 유심히 살폈대요. 그런데 그 산타가 승용차 문을 열더니 그걸 타고 부웅 가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이럴수가. 루돌프는 어딨고 썰매는 어딨냔 말이죠. 그래서 그날로 산타이야기가 모두 허구라는 걸 깨달았대요.

보통 어떤 일의 허구성을 의심하게되는 계기는 작지만 뚜렷한 모순, 위화감, 비일관성 같은 것들을 발견하는 거예요. 저희 삼촌의 경우는 당시엔 아직 너무 어려서 왜 산타를 보자마자 마음 속에 의심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야 그 이유를 차츰 알게 되었대요. 예컨대 드문드문 비치는 검은 머리카락이 희고 풍성한 가짜수염과 대조를 이루었다든가 등등. 그리고 이제는 뚜렷이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전라도의 어느 소도시에서, 그것도 80년대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높았을 리 없다는 점도 중요했을 거래요. 만약 온 도시가 크리스마스로 흥분해 마지않은 상태였다면, 그래서 매일매일 보고 듣는 것들이 고도의 일관성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산타를 직접 보게 되었을 때 의심스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대요.


2.

클리포드 기어쯔 (Clifford Geertz, 1926 - 2006) 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쯤 되는 인류학자가 있었어요. 이 양반이 [문화]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거슨 거미줄과 같다고 했어요. 여러 요소들이 거미줄처럼 서로 다 얽혀있어서 어느 한 곳만 건드려도 거미줄 전체가 그 영향을 받아 진동한다는 거지요. 

(나중에 이양반 후배들이 아니다 거미줄은 너무 질서정연하다 그거슨 문어발과 같다고 대들어서 유명한 거미줄-문어발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거슨 나중일이니 패스)

거미줄 비유는 그 정확성 여부를 떠나서 일단 그 상호연결된 느낌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도 서로 얽혀있는 나머지 해당 문화권 안에서 살고있는 사람들마저 그게 대체 어디까지 어느 정도로 얽혀있는지 잘 모를 정도지요. 그래서 이 얽혀있음은 주로 한 문화요소가 다른 문화권으로 이식될 때, 그래서 그 이식된 버전과 오리지날이 뚜렷하게 비교될 때 분명하게 드러나요.


3.

저야 이곳에서 보내는 세 번째 크리스마스지만 애들에겐 사실상 첫 번째였어요. 그간엔 그냥 집에서 지냈는데 이제 학교를 가게 됐거든요. 그래서 전 아이들을 관찰함으로써 오리지널 크리스마스 문화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살펴볼 수 있었지요.

학교에서 정말 많은 걸 하더라구요. 애들이 캐럴을 외고 그걸 율동과 함께 공연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일부 학년은 백화점이나 크리스마스 마켓에 나가서 공연도 했어요. 학내에 크리스마스 바자회 같은 게 열리고 수업시간 중에 애들이 거기 가서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게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어요. 학교에 크리스마스 점퍼 (http://www.britishchristmasjumpers.com/collections/mens-christmas-jumpers)를 입고 오는 날이 따로 정해져있고, 어떤 날은 산타 모자를 쓰고 오는 날도 있었어요. 물론 학부모들이 자기 애들거 다 사서 입혀 보내야 했지요 (췌...). 하루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고 학부모들이 음식과 물품을 마련해오면 수업시간에 그걸 먹고 노는 일도 하고, 다른 하루는 아예 산타가 교실별로 방문해서 선물을 나눠줬어요.

상황이 이러하니 아이들 입장에선 보고 들은 것들 모두가 고도의 일관성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마치 거미줄처럼요. 산타를 의심? 어떻게 의심해요. 세상이 다 크리스마스 뽕에 취해있는걸요. 심지어 주변 집들이 다 오래된 주택들이라 모두 굴뚝과 벽난로가 있기까지하니 산타가 굴뚝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마저 일관성을 갖게 돼요. 그래서 이쯤 되면 애들은 크리스마스 흥취(hype)로 정신이 반쯤 나가요. 선물을 안사줄래야 안사줄 수가 없음.


4.

그런데 어른인 제가 가장 신기하게 느꼈던 건 바로 집 앞에서 발견한 이놈이었어요.


이걸 한국에선 서양호랑가시나무라고 부르고 여기선 홀리(Holly)라고 부르는데요, 상록수고, 잎이 뾰족하고, 빨간 열매가 저렇게 2~3개씩 모여서 열려요. 그리고 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겨우내 저렇게 매달려있지요. 모양이 구체에 가까운데다 선명한 붉은 빛이 짙은 초록 잎사귀와 대조가 잘 되어서 얼핏 봐도 예쁘다는 느낌이 들어요. 열매가 매우 단단해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구요. 게다가 흔해요. 엄청 흔해요. 길가다가 심심하면 보이고, 집 앞에도 보이고, 남의 집 마당에도 보이고, 여튼 무지무지 많아요. 아무 때나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조금씩 잘라갈 수 있어요.

그러니 저걸 잘라다가 대문 앞에 매달아 놓는다든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으로 쓴다든가 하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오히려 저걸 잘라다 장식용으로 쓰는 문화가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저 장식품을 보았을 땐 저게 맥락 없는 문화처럼 보였는데, 이제 보니 상호 긴밀하게 연결된 거미줄의 한 부분이었던 거예요.


fig. 1. 홀리를 모티브로 한 크리스마스장식.


5.

사실 당연한 거예요. 영국 크리스마스는 오리지날이니만큼 거미줄이 촘촘히 잘 연결되어있는 거고 한국 크리스마스는 이식된 거니만큼 데드스팟, 즉 건드려도 거미줄의 다른 부분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이 여기저기 있는 거 아니겠어요.

여기까지만 보면 약간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거미줄의 한 폭을 잘라다 다른 거미줄에 옮겨붙여두면 처음엔 데드스팟이 많아서 막 어색하고 안어울려요. 그래서 다들 흉내내느라 바쁜 꼴이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노노 네버. 한 문화의 이식은 새로운 문화 탄생의 자양분이라는 걸 잊으면 안돼요. 문화는 살아있는 거라 데드스팟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아요. 이식하는 순간, 이식된 문화는 새 거미줄 속에서 분주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촉수를 뻗어요. 그러다보면 뜬금 없는 곳에 연결되는 경우가 생기고, 그렇게 해당 문화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지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 이식된 문화는 또 하나의 끔찍한 혼종 오리지날이 돼요.

일본의 카스테라가, 우리나라의 부대찌개가, 중국의 불교가, 그리고 영국의 크리스마스가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했어요. 그러니 여러분은 결코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원래 문화창조는 이렇게 슥삭 훔쳐와서 뻔뻔하게 입을 씻으면 되는 거예요. 굳이 차은택씨한테 예산까지 줘가며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의미에서! 저희는 부대찌개를 해먹었어요. 히히. 부대찌개 짱짱. 열라 맛있음.

누가 아나요. 온 가족이 모여 부대찌개를 해먹는 한국의 성탄 문화를 훗날 영키들이 부러워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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