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모 때 '알료사'라는 닉네임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몇 분께 받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등장인물입니다.
타임라인에 간략하게 소개해 볼까 하다가 오늘 영화관에서 보고 온 '너의 이름은'의 감상과 겹쳐 어떤 잡상이 떠오르기에 글이 좀 길어질거 같아 티타임에 적습니다.
너의 이름을 보면 애니의 남주 여주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하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무얼 하려고?
기억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닥쳐올 무시무시한 재앙 앞에 그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서로를 기억해서, 잊지 않아서 무얼 어쩌겠다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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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을 받으려 하지 마시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오. 위안을 받으려 하지 말고 우십시오...
그리고 오랫동안 당신은 위대한 어머니의 통곡을 계속할 것이오.
당신의 쓰라린 눈물은 인간을 죄악에서 구하는 연민과 정화의 눈물이 될 것이오.
그리고 나는 평온 속에 잠자는 그대의 어린아이를 기억할 것이오."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가 세 살배기 아이를 잃고 통곡하는 엄마에게 건넨 말입니다.
이것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수도원에 머물 무렵 암브로시 장로라는 사람에게 실제로 들은 말을 옮긴 것이라 합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집필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세 살배기 막내아들 알료사를 잃는 슬픔을 당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특히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이가 자신에게 물려받은 간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개인적 슬픔은 소설 속에서 자식 넷을 모두 잃은 어머니의 고백을 통해 분출됩니다.
"그 아이는 세 살이었어요. 두 달 더 살았으면 삼 년이 되었을 테니까요. 땅속에 묻은 막내 자식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앞에 그 녀석이 서 있는 것만 같고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불쌍한 어린 것이 입던 옷과 내의, 신발을 보기만 해도 저는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그 아이를 잠깐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그 아이의 모습을 볼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저는 아이에게 달려가지 않을 거예요.
구석에 몸을 숨기고 아이가 마당에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목소리만 들을 겁니다.
그 아이가 찾아와 작은 목소리로 '엄마, 엄마는 어디 계세요?' 하고 물을 것만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동안 집필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수도원에서 암브로시 장로에게 위안을 얻고 다시 펜을 잡게 됩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초고에서 '백치'라고 불리던 막내아들은 '알료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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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크게 세 가지 줄기를 가지고 전개됩니다.
첫째는 살인사건입니다. 유산상속 문제로 갈등을 겪던 중 어느날 방탕한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살해된 모습으로 발견되고
평소에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던 장남 미챠가 범인으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재판이 열리고 추리와 변론, 판결로 이어집니다.
둘째는 복잡한 애정관계입니다.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장남 미챠는 둘 다 그루센카라는 여자를 사랑하는데 그루센카는 명확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둘을 애태웁니다. 안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은 미챠는 그루센카 때문에 생긴 질투심 때문에 더더욱 아버지를 증오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챠의 원래 약혼자 카체리나를 둘째아들 이반이 사랑합니다. 형제간의 갈등은 그렇게 크게 불거지지는 않지만 재판에서 증언을 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셋째는 신의 존재, 선악과 인간의 죄, 그 처벌에 관한 논쟁입니다. 아마 이 소설의 압도적인 스케일과 난해함은 이 부분 때문일 겁니다.
명석한 둘째아들 이반이 맹 활약을 하며 엄청난 기세로 신을 공격합니다. 초반부터 수도원에서 논쟁을 주도하고, 동생 알료사에게 소개하는 서사시 <대심문관>에서 그 공격이 절정에 다다릅니다. 이런 이반의 사상은 아버지 살해 사건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도저히 수꼴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한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캐릭터이고 많은 독자들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이반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은 수도원의 조시마 장로인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조시마 장로의 입으로 이반의 논리를 분쇄하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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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세 가지 줄기의 전개에서 작가가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알료사는 별다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수도원에 살고 있는 알료사는 가족의 불화에 숨죽이며 지켜볼 따름입니다. 복잡한 갈등관계에 얽힌 소설 속 모든 인물들에게 사랑받는 알료사인데 그들 사이를 오가며 우연히 길에서 만난 초등학생(?)들과 인연을 맺어 서브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얼핏 메인 스토리와 아무 연관이 없는 이 초딩들의 이야기는 약간 몰입에 방해되는 기분도 들고 아무튼 좀 별로였습니다.
알료사가 길을 가는데 한 아이가 다른 여러 아이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는데, 홀로 싸우던 그 아이가 알료사에게 돌을 던지는 겁니다.
다가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묻는데 일류세치카(일류사)라고 하는 아이는 대답은 않고 덮썩 알료사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철철 흘리게 만들고는 달아나 버립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유는 이랬습니다. 일류사의 아버지가 어떤 장교에게 거리에서 수염을 잡혀 질질 끌려다니고 흠씬 두들겨 맞는 등의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일류사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모든 친구들과 싸우게 됐어요. 아이들이 일류사의 아버지를 '수세미'라고 놀렸거든요. (수염이 수세미 같다고) 그런데 일류사의 아버지를 모욕 준 그 장교가 바로 알료사의 큰형, 미챠였던 겁니다..
알료사는 일류사의 집에 찾아가 가족들 모두에게 형을 대신해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이런 과정에서 모든 초딩들과 친해지게 됩니다.
일류사가 혼자 동급생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있을 때 그를 도와준 2학년 높은 콜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콜랴가 지켜본 일류사는 작고 허약하지만 좀처럼 굴복하지 않고 싸움질을 하는 오만한, 눈이 타오르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콜랴는 일류사가 마음에 들었고 일류사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혼내주고 그를 구해냅니다.
자연히 일류사는 콜랴를 잘 따랐고 이상하게 콜랴는 오만함을 잃고 노예처럼 자신을 따르는 일류사가 싫어져 그를 방치합니다.
콜랴는 일류사가 강해지기를 바랐어요.
일류사는 다시 괴롭힘당했습니다.
한번은 아이들이 수업을 끝내고 나올 때 운동장에서 일류사가 혼자 모든 아이들을 상대로 덤벼들었는데 때마침 콜랴는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콜랴는 일류사가 너무 안쓰러워서 다시 나서서 도와주려는데,
일류사와 콜랴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일류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펜나이프를 꺼내들고 콜랴에게 달려들어 콜랴의 허벅지를 찔렀습니다.
콜랴는 꼼짝도 않고 있었습니다.
일류사는 울면서 도망쳤고 콜랴는 다른 아이들에게 선생님들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나중에 일류사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콜랴는 바로 찾아가 화해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만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전에 일류사가 장난으로 빵 속에 핀을 넣어 쥬치카라는 개에게 먹였는데 쥬치카는 빵을 삼키더니 낑낑 비명을 지르다 사라졌고
일류사는 그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콜랴는 혼자 쥬치카를 찾아 치료하고 있었어요.
쥬치카를 완쾌시켜 일류사를 놀래키고 기뻐하게 만들어 주었던 겁니다.
콜랴가 쥬치카를 데리고 일류사의 방 안을 찾았을 때, 그곳엔 반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일류사는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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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소설을 읽을 때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고 몇 번 더 재독을 했을 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살해당한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그와 불화했던 형제들의 재산 상속 문제, 죽인 사람은 한 명인데 왜 죽이지 않은 사람들까지 죄인이 되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 고통 받는 인간들을 자유라는 미명 하에 내버려 두고 있는 신에 대한 불만과 혹은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 소설이 던지는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란게 늙은 조시마 장로의 낡아 보이는 설교와 서사시 <대심문관>속 침묵하는 예수의 입맞춤 뿐이었던가, 훌륭한 작가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진다더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이렇게 질문들만 던져놓고 만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문득 도스토예프스키가 희망을 걸고 싶었던 건 저 서브 스토리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성장에 있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반은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에 분노해 신에 대한 반역을 선언했는데,
알료사는 똑같은 케이스를 경험하고 용서와 화해를 보았습니다.
이반의 아이들은 추상적 이론 속에 있었지만
알료사의 아이들은 그의 옆에서 그에게 돌을 던지고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게 만들고 피흘리게 만들었던 구체적인 존재였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일류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때까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알료사는 모여 있는 아이들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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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는 곧 헤어질 겁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헤어지는 겁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하지만 여기 일류사의 바윗돌 곁에서
첫째는 일류세치카를
둘째는 우리 서로서로를 절대로 잊지 않겠노라고 약속합시다.
훗날 우리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 우리가 앞으로 서로 만나지 못할지라도,
어쨌거나 우리가 한 가엾은 소년을 땅에 묻었다는 사실은 기억합시다.
전에 저기 다리 옆에서 이 소년에게 돌팔매질을 퍼부었던 일,
여러분들은 기억하시죠?
하지만 그 다음엔 다들 이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잖습니까.
선량하고 용맹스러웠던 소년.
명예를 존중했고 아버지의 치욕을 참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던 소년.
우리 이 소년을 평생토록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중대한 일에 몰두할지라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를지라도.
또 아무리 큰 불행을 겪을지라도.
어쨌거나 우리가 한때 이곳에서 아름다운 감정을 공유하면서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이 가련한 소년을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이여.
어른들은 여러분의 교육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을 많이들 하지만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숭고하고 강렬한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훗날 악한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고약한 행동 앞에서 버텨 낼 힘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인간의 눈물을 조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까 콜랴 군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받고 싶다'라고 외쳤죠?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 표독스러운 조롱을 퍼붓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질지라도
우리가 일류사를 어떻게 땅에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얼마나 사이좋게 함께 얘기를 나누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조차도
설령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겁니다 !!
그뿐입니까.
바로 지금 이 추억 하나만 있어도
그는 스스로를 거대한 악으로부터 지켜내며
'그래. 그 시절엔 나도 용감하고 성실한 인간이었어' 라고 말할 것입니다.
혼자 속으론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죠.
사람이란 종종 훌륭한 것을 비웃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저 잠깐의 경솔함 탓일 뿐입니다.
단언하건데, 곧바로 마음속에서는 '코웃음을 치다니. 이런 걸 조롱해서는 안돼' 라는 목소리가 들릴겁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될까 두려워서입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
절대로 서로서로를 잊지 맙시다.
이 점을 나는 또다시 반복하는 바입니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건대 여러분,
여러분 중 단 한 명도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얼굴 하나하나를 삼십 년이 지나더라도 기억할 것입니다.
일류사의 얼굴, 그 옷, 초라한 신발, 불행하고 죄 많았던 아버지를,
일류사가 아버지를 위해 혼자서 온 학급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던 것을 기억합시다.
영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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