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10/29 00:54:15
Name   알료사
File #1   김애란.jpg (184.7 KB), Download : 32
Subject   김애란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고 골방에서 제 우울이나 곱씹는 나약한 젊은이 타령.

사회 참여적 작품이 눈에 띄게 줄어들던 90년대부터 슬슬 나오기 시작했어요.

죄다 방구석에서 술 마시다 섹스하고 우울해하는 얘기밖에 없다고.

<자기 얘기 말고는 관심이 없는 요새 젊은이들>중에 김애란이 나왔습니다.

김애란은 그 [방구석]과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삶을 다루었어요.

너무 좁아서 네명 모두 책상 위에 의자를 올린 뒤 연필처럼 자야 하는 독서실.

공동 욕실과 공동세탁기를 사용해야 하는 다가구 원룸.

현관이 있는 집.

김애란이 이야기하는 공간은 대부분 그와 비슷한 세대의 경제적 곤란을 겪는 청년들이 한번쯤 경험하는 장소에요.

영세한 신혼부부가 사는 재개발지역의 낡은 아파트.

싸구려 자취방.

돈을 조금 보탠 자취방.

비가 새는 반지하.

김애란은 등장인물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그들의 지위를 정했어요.


이들의 가난은 전 세대의 소설에 나오는 가난과 달라요.

김애란은 대학 진학률이 높아진 이후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에요.

당장은 먹고 살 수 있지만 나이 든 이후의 삶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종류의 가난.

대학 등록금을 비롯해 이거저거 들인 돈은 많지만 그 투자비용을 언제 뽑을지는 기약이 없어요.

그럭저럭 괜찮은 학교를 나왔지만 취업에는 영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분야를 전공한 형편 어려운(?) 집 자식들.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크게 히트했었죠.

저자는 나중에 그것을 세대론의 탈을 쓴 계급론이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책이 영향력을 미친 대상은,

사회과학도서를 읽을 형편이 되면서 계급 상승의 문이 좁아졌다는걸 실감해야 했던 젊은이들이었을거예요.

김애란은 이걸 그린겁니다.


<도도한 생활>의 주인공들은 누수가 심해서 수해를 입는 반지하 투룸에 어떻게든 피아노를 들이려고 애써요.

<성탄 특선>의 주인공들은 데이트(생활의 일부!)할 때 입고 나갈 [완벽한 한 벌]이 없어서 연인과 헤어지고

아무리 궁색해도 변기 청정제만큼은 사다 쓰고

남들만큼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겨드랑이 암내가 나는 파스타를 비싼 돈 주고 사 먹어요.

별 일 아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


김애란 소설 인물 중에서 가장 [살림살이 나아진 축]에 속하는 <큐티클>의 주인공은 외국계 제약회사를 다니는데

무언가 모자란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해요.

"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 조금 더 세련된 것,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미터 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그는 언제나 반 뼘 모자라거나 반 뼘 더한 것들 사이에서 고민을 해요.

그러다가 모자라는 것보다는 넘치는게 나을거 같아서 후자를 선택합니다.

삶을 괜찮은 궤도로 끌어올리려고 전전긍긍해요.

이런 발버둥이 허탈감을 불러일으켜요.

한 뼘을 완성하는 것은 경제적 여유가 자아내는 아우라인데 길거리 네일아트에서 기본 케어를 받으면서 '이런 사치를 부려도 될까' 하고 갈등하는 사람은 그 아우라를 절대 가질 수 없어요.


<벌레들>의 주인공은 전세대란을 맞이한 신혼부부에요.

신혼살림 꾸릴 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재개발지구의 낡은 아파트에 들어와요.

중소기업 영업직 신랑과 전업 주부 새댁은 경제적 형편 때문에 아이 갖기를 미루다가 실수로 덜컥 임신을 해요.

먼저 철거되는 다른 지역의 건물들을 보며 임신 중인 새댁은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지금의 삶은 지나쳐 갈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안락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해요.

기성세대에게 아파트란 [근대의 맛]이었어요.

자수성가의 상징이기도 했어요.

투박한 외형과 색다른 편리함은 '메마른 현대인' 그 자체였어요.

그럭저럭 먹고 살만해지니까 사람들은 그 이상의 것을 꿈꾸기 시작했어요.

속물성이 미덕?처럼 되고 너도나도 세련되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우리 김애란의 등장인물들은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합니다.

최고의 것을 탐내기엔 통장 잔고가 압박이고 돈을 아끼자니 촌스러워져요.

몸빼바지 입고 번 돈으로 시즌 트랜드인 플라워 프린트 쇼츠를 무리해서 구입하지만

주머니에 한계가 있으니 거기에 어울리는 다른 아이템을 포기하고 <스카프를 두른 오리처럼>되어버리는 거죠.


사회가 개인에게 니들은 이걸 위해 살으라고 강제하는 욕망에 발맞춰 나가고 싶은 사람들.

<물 속 골리앗>에서 남들처럼 아파트를 사고 싶은 아버지는 아파트 공사현장 인부였어요.

노동쟁의의 일환으로 크레인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죽었어요.

평범한 주부였을 어머니는 미쳐 가고 아들은 끝없는 장마 속에서 생사의 고비를 겪어요.

이런 현실 속의 욕망이 끝나는 순간 인간은 죽는 거죠.


이 때


김애란이 빼꼼 고개를 내밀면서 연민의 메시지를 보내요.


생존 레이스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가장 사소한 시간들을

정감어린 눈길로 바라보면서

그 사람들이 충분히 약삭빠르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냐고 물어봐요.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하는데

그 레이스의 생존자들이 거기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가 고민해요.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 그것은 적의로 드러나요.

나보다 형편이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깍아내리고 뭔가 찝찝하지만 대충 합리화시켜요.

나랑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나랑 구분지으려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요.

저들은 나와 뭐가 다르다고 저 앞쪽에서 달리기를 시작해?


김애란 소설속 [방구석]사람들은 그렇게 시대의 아픔을 은근슬쩍 비추어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1-13 08:23)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8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9 기타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6 알료사 24/11/20 5118 34
    1418 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1310 33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956 32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1191 21
    1415 정치/사회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2298 18
    1414 일상/생각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1181 36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심해냉장고 24/10/20 1815 41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2105 16
    1411 문학『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1126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407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272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613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258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2161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787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606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2087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839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768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3021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2008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267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2074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283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838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