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04/26 17:57:24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동성애 이슈와 팬덤정치 이야기
팬덤은 자기 오빠(언니)를 불완전한 육신의 구속에서 빼내서 순결한 이상의 모습으로 정련해내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오빠(언니)에게 거는 기대는 가히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정련은 너무나 완벽하고 이 기대는 너무도 높아서 그 어떤 오빠(언니)도 팬덤의 바람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데에 불행의 씨앗이 있어요. 연예인들은 이 기대의 충족불가능성을 잘 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대중의 시선 밖으로, 대중이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살아요. 육신에 구속된 자기 존재를 계속 노출했다간 형이상학적 기대의 붕괴를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되어있을 때만 강림하여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준 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전에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지요.

팬덤은 연예인이 살짝만 보여준 그 모습으로부터 나머지 보이지 않는 모습을 상상으로 메꿔야 해요. 이 상상의 내용이란 대개 구름 위 꿈결 같은 놈들이라 문제의 형이상학적 기대감을 헤치기는 커녕 강화하지요. 그래서 부서질 염려 없이 안전하지만 여전히 갈증은 해소되지 않기에 계속해서 연예인이 재림하기를 갈망하게 돼요. 그 갈망이 길어져 지쳐갈 때 쯤 연예인이 컴백해서 또 다시 약간의 충족감과 기대감과 상상을 불어넣어주고 가고, 다시 팬덤은 갈망하고, 또 연예인이 살짝 보여주고... 이하 반복.

팬덤 정치인의 대표주자이자 전직 대통령인 박근혜의 팬덤조련은 1급 기획사 사장님을 방불케할 만큼 노련했어요. 노출하면 무너진다는 걸 알기에 숨어있는 걸 디폴트로 하고, 간간히 중요한 순간에만 강림하여 존재감을 극대화했지요. 팬들과 밀당을 할 줄 아는 연예인이에요.

역시 팬덤 정치인의 대표주자이자 전직 대통령인 노무현의 방식은 이보다 덜 노련했어요. 더 가까이, 더 친구 같이, 가능하면 늘 하계에 내려오려고 했지요. 하지만 하계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형이상학적 기대감의 붕괴가능성이 같이 높아져간다는 걸 근본적으로 깨닫지 못했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참여정부는 보수에게 미움받아서 실패한 게 아니에요. 진보의 기대를 배신했기 때문에 실패한 거지요. 박근혜정부는 비선실세 스캔들로 실패한 게 아니에요. 무속, 비아그라, 성형, 섹스, 출산 같은 (훨씬 실체가 불분명하지만 팬덤에게는 훨씬 충격적인) 키워드의 홍수 속에 팬덤이 배신감을 느끼면서 침몰한 거예요. 그녀가 탄핵선고 전 모 인터넷 TV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 위의 키워드들에 대해 해명하려 애썼던 건 그녀의 연예인으로서의 직감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친구에게 조언을 받았다 정도는 팬덤의 용서를 구할 수 있어도 몰래 임신출산한 건 여자연예인 팬덤이 용납할 수 없는 주제거든요.

현재 한국에서 가장 강한 팬덤을 거느리고있는 정치인은 반박불가 문재인후보예요. 한 여성지지자가 그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장면은 이 팬덤현상의 심도를, 본질을, 그 전체를 잘 환유해줘요. 아마 문재인후보는 대통령이 될거고, 다른 팬덤대통령이 그러했 듯 집권내내 서서히 침식해가는 팬덤을 조련하는 게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가 될 거예요.

이번 동성애 논란을 보며 상당수의 문재인 지지자들은 '훨씬 심각한 홍준표후보도 있는데 왜 훨씬 양호한 문재인후보만 가지고 뭐라그러냐'며 불만스러워해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봐요. 매일 바지에 똥싸는 친구가 오늘도 똥을 쌌으면 그건 뉴스거리가 아니에요. 하지만 콜린 퍼스가 파티장에 도착했는데 그의 말끔한 킹스맨 스타일 양복의 엉덩이께에서 갈색 물기가 보인다면 그건 평생 따라다닐 뉴스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홍준표도 문재인도 아니고, 문제의 핵심은 기대감이란 거예요.

대선 전에 갈색 물기를 보인 건 장기적 관점에선 좋게 볼 여지가 있어요. 어차피 깨어질 기대라면 미리 깨지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지지자 대다수가 '이 사람이 최선이다'라고 생각해서 뽑은 대통령보단 '이 사람이 차악이다'라고 생각해서 뽑은 대통령이 더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고 (저 개인적으로는) 믿거든요.

전 어찌됐든 문재인후보가 당선될 거고, 또 당선 되는게 (현재로선)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 모두 이런저런 논리를 동원해 요상한 실드를 치려고하는 대신 그냥 쿨하게 그를 차악이라고 생각하며 투표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게 그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좋을 거예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5-08 08:10)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4
  • 동의합니다.
  • 명문입니다.
  • 지렸따...
  •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9 기타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6 알료사 24/11/20 5131 34
1418 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1314 33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957 32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1194 21
1415 정치/사회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2304 18
1414 일상/생각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1184 36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심해냉장고 24/10/20 1816 41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2112 16
1411 문학『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1126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408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272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614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260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2163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787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606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2088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840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769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3021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2009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268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2075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285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839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