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06/30 13:02:23
Name   여름 소나기 후
Subject   급식소 파업과 도시락
오늘 급식소 파업이라 도시락 싸야한다. 많은 인원이 모두 학교 밖에서 사먹기 힘드니까 애들한텐 전부 밥을 싸오라고 했다. 아침에 도시락 검사 한다고 했다. 라면 가져온 애들도 있고, 오니기리나 김밥 사온 애들도 있고, 직접 싸온 애들도 10명 정도 있었다. 도시락 통 들어올려 검사 받는 모습이 귀여웠다.

옛날에 도시락 싸서 책가방 옆에나 위에 넣고 다니던게 생각난다. 중학교 때 교실에서 아님 밖에서 2교시 끝나고 먹던 기억. 그리고 점심 땐 애들꺼 같이 먹고 운동장에서 농구만 했던 기억. 초등학교 때도 언제부턴가 점심을 쌌던거 같다. 애들은 모두 고기랑 소세지 반찬 싸올 때 나만 만날 김치랑 멸치 같은거만 있어서 내 반찬은 두고 교실을 돌아다니며 애들 반찬을 같이 먹었었다. 맛있는거 많이 싸오던 애들 반찬은 뚜껑 열자마자 젓가락 전투가 벌어지고 승자들만 소세지를 먹었다.  그 때는 반찬에 불평이 많았는데 내가 그걸 엄마한테 말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아마 집에서는 투정이 없던거 같다. 가끔 반찬 많이 안먹고 가져올 땐 엄마가 뭐랑 먹었냐고 물었던 기억은 난다. 엄마는 그 때 아침마다 누나들꺼랑 내꺼 도시락을 3개나 싸야 했고, 누나들이 고등학생이 되고는 저녁 도시락까지 쌌으니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거다. 여러 반찬을 싸야 하니까 늘 고기나 소세지를 마련하기도 힘들었겠지. 그래서 언젠가 집에서 돈까스를 직접 만들었다. 누나들이랑 다같이 모여서 고기에 계란이랑 밀가루 묻히고 빵가루 찍어서 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보관했다. 그걸 종종 꺼내서 후라이팬에 달궈 도시락에 넣었었다. 그 때도 나는 그걸 잘 먹지 않았다. 물론 돈까스가 반찬인 날엔 다른 아이들이 평소 반찬통 꺼내던 자랑스러운 마음은 조금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직접 만든 돈까스가 더 질도 좋고 맛있지만, 그 때는 집에서 만든 반찬이 창피했다. 집에 돈이 없어서 파는 소세지나 동그랑땡 반찬을 못 싸오는거 같아 보일까봐 싫었다. 그리고 엄마는 사다가 싸주는 반찬이 싫다고 했는데 난 그 말이 싫었다. 나도 한번이라도 비엔나 소세지가 들어있는 반찬통을 자랑스럽게 열고 싶었다. 그리고 내 반찬을 먹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아이들을 보고싶었다. 그런데 정말 절대 비엔나 소세지나 공산품 반찬은 한번도 없었다. 내 반찬통은 언제나 관심 없는 변두리에 꺼냈고, 애들도 가끔 김치가 먹고싶을 때만 먹었다. 자라면서 큰누나가 분홍색 소세지를 좋아한다는걸 알았다. 다 커서는 가끔 마트에 같이 가서 그런 얘기 하면서 사다가 먹기도 했지만, 아마 누나는 친구들이 싸올 때 먹던 그 소세지 맛이 평생 남아서 그런걸꺼다.

오늘 엄마는 친구분들과 여행을 가셔서 도시락 싸달라고 말을 못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에 오시겠지만. 오늘 만약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셨다면 옛날과 같을 것이다. 집에서 만든 애호박 볶음이나 마늘과 멸치 볶음, 그리고 김치가 반찬이었을거다. 점심을 싸오지 못한 오늘 왠지 그 도시락이 그립다. 아주 맛있게 잘 먹었을텐데.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7-10 10:39)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5
  • 으왕 글잘쓰신당..
  • 춫천
이 게시판에 등록된 여름 소나기 후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75 일상/생각괜찮아. 스로틀은 살아 있으니까. 3 틸트 17/07/19 5471 16
472 일상/생각고시낭인이라 욕하지마라. 17 tannenbaum 17/07/14 6828 26
464 일상/생각내가 만난 스승들 #3 - 너 내 반장이 돼라 13 SCV 17/07/03 6106 7
463 일상/생각'인생을 게임하듯이 사는 법' 그리고 어른 6 삼성갤육 17/07/02 5998 11
459 일상/생각급식소 파업과 도시락 3 여름 소나기 후 17/06/30 4915 5
458 일상/생각냥님 입양기 – 나는 어떻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가 22 *alchemist* 17/06/27 6355 9
457 일상/생각간만에 끓여 본 미역국이 대실패로 끝난 이야기. 15 빠독이 17/06/22 5339 19
456 일상/생각내가 만난 스승들 #1 - 1994년의 예언가. 22 SCV 17/06/20 5788 18
455 일상/생각여사님을 소개합니다 (스압, 일기장류 징징글. 영양가X 뒤로가기 추천) 31 알료사 17/06/19 6679 20
452 일상/생각숙제 무용론 국딩의 최후 11 Homo_Skeptic 17/06/14 6170 7
449 일상/생각아재의 신비한 디시갤러리 탐험기. 14 tannenbaum 17/06/10 7083 7
448 일상/생각우연한 합석 8 Liebe 17/06/10 6279 17
446 일상/생각어떤 변호사의 이혼소송에 관한 글을 보고. 11 사악군 17/06/05 8035 26
442 일상/생각누워 침뱉기 17 tannenbaum 17/06/01 5342 24
437 일상/생각[회고록] 그녀의 환한 미소 17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5/24 4905 13
435 일상/생각백일 이야기 7 소라게 17/05/16 5483 21
434 일상/생각가난한 연애 11 tannenbaum 17/05/15 6662 18
431 일상/생각가끔은 말이죠 1 성의준 17/05/14 4526 9
428 일상/생각'편 가르기'와 '편 들기' 17 소라게 17/05/12 6539 25
426 일상/생각논쟁글은 신중하게 28 기아트윈스 17/05/09 5561 11
424 일상/생각나도 친구들이 있다. 3 tannenbaum 17/05/03 4837 14
407 일상/생각김치즈 연대기: 내 반려냥이를 소개합니다 52 lagom 17/04/06 5763 33
406 일상/생각호가호위 12 헬리제의우울 17/04/06 6292 11
402 일상/생각쉽게 지킬 수 있는 몇 가지 맞춤법. 25 에밀 17/03/30 5686 10
400 일상/생각부쉬 드 노엘 18 소라게 17/03/28 5979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