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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7/26 02:53:09
Name   프렉
Subject   인생은 다이어트.


#1.

나는 30대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가 30년을 살았다는 걸 체감하기 힘들다. 체내 시계가 열 아홉에 멈춰있는 느낌마저 든다.
다만 내가 사는 집 우체통에 어김없이 꽂히는 각종 고지서, 꼬박꼬박 내야하는 월세, 1년에 한 번 내는 자동차 세를 보고 있노라면 30대를 부정할 순 없다.

각설하고.

다이어트는 살만 빼는 행위가 아니라는 생각을 요새 점점 한다.
몸무게를 덜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나라는 개체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 무엇들을 떼어버리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벼워지는 것이 다이어트라 생각한다.

요컨대 살을 빼면서, 같이 정신적으로 무엇인가 덜어내는 것이다.
궁극의 다이어터라고 부를 수 있는 프로 보디빌더들은 고기 끊은 중처럼 지낸다고 하는데, 범인의 입장으로선 올려다보기도 까마득한 경지일 것이다.


#2.

20대 후반에, 그러니까 복학하고 한 1년 놀고 나를 돌봐주셨던 친할머니가 등짝을 매섭게 후려칠 무렵에 나는 인생 첫 직장을 가졌다.
모 교회와 연계되어 있는 장애인복지관. 나름 입김이 있었던 친할머니. 바보가 아니면 들어갈 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힘들었어도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그걸 믿고 열심히 철없이 굴었고 몇몇 경험들로 인해 빠르게 사회 스킬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2012년. 여수 엑스포가 열린다며 한창 시끄럽던 무렵에, 관장님은 당연하게도 관내 장애인들을 데리고 엑스포 관람을 가자는 계획을 지시했다.
우리 복지관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기존의 선생님들이 퇴직, 이직, 영전하는 바람에 관내 직원들은 대부분 20대 초반~30대 후반이었다.
힘 쓰는 일, 뒤치닥거리 하는데 체력에는 문제가 없는 젊은 복지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복지관 전 직원은 자신의 담당 파트와는 관계없이 몸 안에 축적되어 있는 모든 육체적 능력을 끌어내야 했다.
일행을 통제해야했고, 휠체어 장애인들을 들었다 놨다 해야했고, 사진을 찍어야했고, 티켓을 끊어야 했고, 중간에 밥도 먹고.
중간에 간간히 실금, 실변하시는 분들 바지를 갈아입혀야 했고, 미아를 찾아야했고, 인원 체크를 해야했고... 뭐 그랬다.

도착했던 그 순간까지 내가 살던 동네는 여름 소나기가 신나게 퍼붓고 있었고, 선생님들 중 막내 축에 속했던 나는 바닥체력까지 긁어서
장애인 이송에 나섰다. 흠뻑 젖은 비가 무거웠고, 집에 가자마자 드러누웠다. 옷 꼬락서니를 본 할머니는 아무 말 하지 않으셨다. 깜박 잠이 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꿈을 꾸었다.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던 분이었다.

#3.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도 전혀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이 퍼뜩 떠졌다.
엑스포에서 일찍 귀가하는 바람에 눈 뜬 시간이 아직 아홉시를 채 넘기지 않은 시각이었다.

나는 복지관 2층에서 컴퓨터 강사로 근무했는데, 3층의 전문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여선생님한테서 문자가 와있었다.
근처 덩X도나X에 있다. 친구랑 같이 있는데 나와 줄 수 있느냐. 문자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2분 걸렸다.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갔다. 꼴에 뜨는 머리 들킬까 싶어서 옆 머리에 뭘 좀 발랐다.
좁디 좁은 도시였다. 걸어서 5분이면 번화가에 도착한다. 번화가라고 하면 좀 그렇고 나름의 시내였다.

도착한 그 곳에는 그 여선생과 여선생의 친구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브랜드는 알아도 별로 먹어보지 못한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나는 팔자에도 없는 도넛을 세 개나 먹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대화에 따라가야할 것 같아서 열심히 떠들었다. 타인에게 잘 생겼다는 말을 들은게 난생 처음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여선생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저 애 착하고 좋은 친구라는 알 수 없는 어드바이스를 접수했다.

다시 테이블엔 셋이 앉아서 떠들었고, 대화 소재의 한계에 봉착했을 때 그녀의 친구가 포켓볼을 치러가자고 말했다.
나는 당구장에 여섯살 무렵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손당구 친 이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여선생이 재밌겠다며 가자고 했다. 빠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다고 큰 소리 쳤다. 커피랑 도넛 값은 각자 계산했다.

#4.

어쨌든 당구장에 와서 포켓볼 치는게 목적이었으니까.. 포켓볼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웠다.
여선생이랑 친구는 척척 홀에 잘도 집어넣는데 나만 큐대 삑사리를 내니까.. 창피하기도 했고.
그런데 뭐가 좋다고 저리 깔깔 웃어대는지, 챙피하다며 뭐라하니까 더 웃는다. 어이가 없어서 따라 웃었다.

포켓볼 다치고, 목이 따가울 만큼 웃어대고 밖으로 나왔더니 여선생의 친구가 이쯤에서 빠지겠다며 갑자기 돌아선다.
뭐지 싶어서 물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더 이상 묻지마라." 라는 느낌이라 뭐라 말은 못하고 친구를 보냈다.
여선생이 자기 집은 주공아파트라고 이야기한다. 주공아파트, 전국에 있지. 우리 동네에선 주공아파트는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택시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서로 공유하고 있는 장애인 프로그램, 장애인 목록, 행사 뒷이야기.
지금 누구랑 누구 선생님 사귄다더라 혹시 아시느냐, 아뇨 몰랐어요 진짜에요? 그 둘 조금 있으면 백일이래요.
3층에는 결혼한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유일한 처녀는 여선생 뿐이었다.

다리 건너 주공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서 한 5분간 말 없이 걸었다.
걸으면서 가로등 불빛에 비친 여선생 얼굴을 봤다. 이 순간에, 나는 냉정해질 수 있었다.
못 생겼다. 이쁜 얼굴은 아니다. 그런데 웃으면 귀여운 얼굴이고, 말씨가 착하고 공손한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난 그냥 문자받고 나왔을 뿐인데. 이상한데.
난 냉정하니까 속으로 나를 달랬다. 저 선생은 못 생겼어.

#5.

오빠 나 이런 거 잘 모르는데.

샴푸 냄새가 진했고, 목덜미에는 달리 잡티가 없었다. 끌어안고 한 10분은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복지관은 그 무렵에 젊은 사람 투성이라 호칭에 격의라던가, 직급 같은게 없었다.
나이 많으면 형, 오빠. 나이 적으면 동생.

뇌 회로가 정지한 것 같았다. 내가 왜..? 외로웠나, 이유가 뭐지.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는 걸 그날 밤에 처음 알았다.

그 날이 1일이었고, 우리는 백일을 채우지 못했다.

#6.

나는 2년차 조금 넘는 시점에서 복지관 일을 그만 두었다. 솔직히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지쳤고. 페이는 적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좋다고 해도 급여명세서를 받아들면 한숨 밖엔 나오지 않았다. 노동 강도대비 턱 없이 적었다.

젊은 혈기에 시골을 벗어나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정말 다른 곳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그 친구와는 진작 헤어졌다.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지갑만 묵직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할머니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13년 여름에 대전으로 향했다.

#7.

결론부터 말해서 대전에서의 생활은 처참했다. 뽑는 회사가 없었다. 나는 피시방 알바로 연명했다.
나는 내가 작다못해 먼지같은 인간이라는 걸 그 무렵에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엔 잘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보다 잘나지 않은 존재는 만원에 네 캔하는 수입맥주 정도였고, 열심히 마셨다. 몸무게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렇게 인생이고 뭐고 J까라고 지낼 무렵에 친구에게서 회사 면접을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평소 정말 가고 싶어한 회사였다. 그 친구는 회사의 중역이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떨어진 끈 붙잡기 바빴다.
내 생활터는 이제부터 성남이었다.

#8.

인턴으로 지내는 3개월 간, 또다시 능력의 부족함, 본인의 부족함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나보다 세 살 적은 사장이 와서 간곡한 눈빛으로 탈락이라 말했을 때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더 많은 것을 기대 했었다, 좋은 분이라는 걸 알지만 회사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대도시의 젊은 사장은 세련된 해고 멘트를 남겨주었다. 기분 나쁘지 않게 나올 수 있었다.
친구에겐 너무너무 미안했다. 다만 너무 잘난 친구이기에 조만간 나는 잊고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내 거주지는 여전히 성남이다.

#9.

자고 일어났더니 수염이 덥수룩해서 깎으려고 거울을 봤더니 왠 돼지가 한 마리 서 있었다.
얼굴 옆에 덕지덕지 뭔가 붙어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거운 그런 것들. 고향에서부터 내가 달고온 짐들.
수염을 깨끗이 닦고 강변 도로를 달렸다. 왔다갔다 세네번하니 온 몸이 땀에 젖는다. 집으로 돌아가서 찬물 샤워를 했다.

바로 잠들었다.

#10.

그 뒤로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난 여전히 성남에 살며, 중간중간 취직을 했지만 현재는 직업이 없다.
다만 말 할 수 있는 것은 살이 좀 빠졌다는 것. 예전보다 옛 여친 생각을 안하게 되었다는 것.
내 스스로에게 변명하기를 그만두었다는 것, 그게 정말로 비참하고 나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
선비처럼 굴었지만 쥐뿔도 없었다는 것. 난 참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아직 덜어내고 떼어내고 빼야할 부분이 많은 인간이 나다. 인생의 군살을 빼고 싶다, 내 뱃살을 빼고 싶다.
강가를 달리면서 나는 "덜어내고 홀가분해진" 나를 꿈꾼다. 나는 좀 더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
가벼워지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8-0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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