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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8/16 20:44:10
Name   그리부예
Subject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 합니다.
1년하고도 몇 달 전에 퇴사하고 출판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얘기지만) 저는 학부 전공이 경영학이었는데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아서 대충 다니다가 투고를 맞았더랬습니다. 졸업은 해야겠단 생각에 계절학기 꼬박꼬박 다 듣고 정규 학기도 하나 더 들어서 간신히 졸업은 했습니다. 전공을 살린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으므로 뭘로 밥벌이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가 책읽기이니 책 관련으로 가자고 준비해 출판사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들어간 출판사에서 6년을 다녔고 작년에 퇴사해서 출판사를 차렸습니다. 원래는 퇴사하면 어디 물가 싼 나라에 방 하나 구해서 틀어박혀 읽고 싶던 책 실컷 읽고 가끔 번역(독학 일본어인데 아주 전문적이거나 문학성이 높은 책 아니면 그럭저럭 번역을 합니다)이나 하며 살아 보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리 되었네요.

혼자 하는 출판사는 아니고 같이 퇴사한 두 사람과 함께라서 이른바 1인 출판사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은 면도 있어요. 1년 남짓 운영을 해보니까 회사 다닐 때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각종 서류 관리, 세금 문제가 항상 머릿속 일부를 점유하게 되는데 1인 출판사 입장이라면 이런 잡무들에 치여 책 만드는 일은 거의 못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작년에 설립했지만 아직 나온 책은 없고요, 이것저것 만들고는 있습니다. 예정된 책 중에는 번역서가 많고 제게 홍차넷 소개해 준 모 씨가 저희 책을 한 권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 이 모 씨는 책을 쓰기로 한 것도 있긴 해요. 그런데 번역 마감도 한참 어겨서 뭐... 어느 세월에 책을 쓰겠다는 거냐고 매질이라도 하고 싶긴 합니다만.

아무튼 드디어 다음 달에는 첫 책을 낼 계획이고 머릿속과 마음은 매우 복잡합니다. 동시에 네 권을 낼 거거든요. 그중 한 권이 위의 모 씨가 번역하는 책입니다. 네 권이 한 시리즈라서 한꺼번에 내는 거고요. ‘오브젝트 레슨스’라는 시리즈이고 하나의 ‘오브젝트’에 대해 각 책의 저자가 자유롭게 썰을 푸는 그런 책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브젝트는 넷이 되죠.

재밌게도 제가 홍차넷에 가입한 시점의 티타임게시판 첫 화면에 그 넷 중 두 오브젝트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Dr.Pepper님의 호텔 리뷰(https://redtea.kr/?b=3&n=6002), Patrick님의 웹보안 이야기(https://redtea.kr/?b=3&n=6002)가 그것이에요. 즉 ‘호텔’과 ‘패스워드’가 네 개의 오브젝트 중 둘입니다. 이런 오브젝트들에 대해 어떤 책을 쓸 수 있을까 하니...

<호텔>은 굉장히 사적인, 이 저자만이 들려 줄 수 있는 어떤 ‘썰’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아직 번역 소개된 적 없는 여성 소설가 조애너 월시가 저자인데요, 첫 문장이 이겁니다. “한동안 호텔을 전전하며 살던 때가 내 삶에 있었다.” 단박에 뭔가 보통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도입이죠. 그녀는 왜 호텔을 전전했는가. 왜 집에 머물 수 없었는가. 답은 파경입니다. 결혼 생활의 이른 종착지. 예상치 못한 사랑의 종언. 집을 나와 호텔을 떠돌며 호텔 리뷰어로 지낸 시간을, 그 시기의 어떤 정서를, 도저히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스타일로 이 책 안에 부려 놓았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자전인데 픽션의 요소도 섞여 있어서 딱 잘라 정확히 장르가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책이에요.

<패스워드>는... 음, 일단 본문 시작 전 헌사가 이렇습니다.

For He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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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author royalties from this book will be donated to Arthritis Research UK.

그렇습니다, 헌사부터가 암호입니다(개발자 분들이라면 피식하실 수 있겠네요). 당연히 저건 저자가 재치를 좀 부린 대목인 거고 책 내용까지 암호는 아니에요. 말하자면 에세이적으로 풀어낸 암호학 안내서 같은 느낌의 책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영화나 ‘해리 포터’ 시리즈, 튜링에 관한 일화 등을 다루면서 일반인에게 낯선 암호/보안의 개념과 역사를 꽤나 알기 쉽게 설명해 줍니다. 패스워드라는 게 워낙 우리 일상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패스워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노력까지는 잘 안 하게 되죠. 그런 점에서 무척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어 번역 계약을 했던 책입니다(아, 이제야 말하게 됐는데 영미권에서는 이 시리즈가 계속 나와서 지금 한 20~30권이 쌓였을 거예요).

얘기가 길어지니 홍보색이 짙어지는 것 같네요. 제 일상이 온통 얘네들로 잠식당해 있다 보니 다른 쓸 말이 별로 없네요... ‘신입회원인 저는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합니다’ 정도의 의미로 읽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아무튼 다른 오브젝트가 둘 더 있겠죠? 그중 하나가 위에 언급한 모 씨가 번역 중인 책입니다. 모 씨 직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오브젝트여서 번역을 맡겼는데... 저를 말려죽이려고 작정했는지 네 명의 번역자 중 작업 진행 속도 꼴지를 절대 양보하지 않고 있네요.

소규모 신생 출판사라 재정적으로 풍족한 편이 못 되어서 요즘 유행하는(?) 텀블벅 클라우드펀딩에 도전 중입니다. 다행히 목표액은 일찍 달성할 수 있었네요. 제가 하는 일, 그리고 이 책들 이야기를 더 일찍 쓰고 싶기도 했는데 역시 어떻게 해도 홍보성이 될 거라 미루고 미루다가 목표액도 채웠고 펀딩 마감 날짜도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아서 ‘소개’의 의미로 링크만 남겨 둡니다(무...물론 밀어주시면 감사하죠!). 여기서 위에서 소개해 드리지 못한 두 오브젝트를 확인해 보실 수 있어요. 또 이 텀블벅 소개 글 자체를 워낙 오래 공들여서 고생하며 쓴 거라(저 혼자 쓴 건 아니지만요) 후원으로 이어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한 분이라도 더 읽어 주시면 좋을 것 같단 마음도 있습니다.
https://tumblbug.com/objectlessons

후,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나네요.

아, 혹시 출판사 창업이나 그런 관련된 부분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언제든) 말씀 주시면 제가 아는 한에서는 최대한 답을 드릴게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8-28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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