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10/30 14:30:30
Name   二ッキョウ니쿄
Subject   낙오의 경험

"죽이는 SNS를 만들러 왔습니다"

특이한 일이다. 국비지원교육과정은 받는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1차 지식노동자 보급체계에 가깝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공고를 나와서 생산직 실습 보내는거랑 비슷한. 그런면에서 죽이는 SNS라는건 마치 동네 복싱체육관에 등록한 학생이 복싱은 왜 배우고싶어요? 라고 했을때 메이웨더좀 줘 팰려고요. 와 같은 느낌이 든다. 젊은이의 패기는 즐겁지만 시선에는 냉소가 서리고, 직업병처럼 웃는 강사는 역시 직업병처럼 웃으며 열심히 해보라는 말을 남긴다. 열심히.

세상사람들은 간혹 지식노동이 당장 열심히 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혹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믿게끔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지식노동도 육체노동도 완전한 초심자를 위한 판은 없다. 노가다도, 청소도, 출장뷔폐도 근무 첫날, 이튿날, 일주일, 한달 정도는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피로감이 전신을 짓누르며, 요령껏 쉬고 요령껏 일하고 요령껏 효율적으로 몸을 굴리는 일은 그 이후의 일이다. 몸을 꾸준히 단련하거나 써 온 사람은 한달이 하루나 이틀로 줄어들 수 있고, 몸을 전혀 쓰지 않은 사람은 꽉 차게 한달이 걸릴 뿐이다. 그리고 어떤 절박한 이유가 없다면, 대체로 후자는 한달이 되기전에 다른 일을 하러 떠난다.

그 친구는 지식노동에 있어서는 정확히 같은 상황이었다. 대체로 지식활동을 어떤식으로든 꾸준히 해 온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자신의 학습능력을 파악하고 있고, 모르는 것을 익히는 자기만의 방식들을 나름대로 체화하고 있다. 누군가는 여러번 읽는걸로, 누군가는 쓰는 걸로, 누군가는 쓰고 읽고, 설명하고, 개념도를 그리고, 문제를 풀고, 복습시간은 얼마나 잡아야하고, 오늘 미루면 내일 얼마나 버벅일지를 알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아니었다.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했고, 이해하기 위한 작업 역시 더뎠다. 누가봐도 열심히 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누가 봐도 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못했다.


하루 9시간이 넘는 지식노동을 강제받는 상황에서, 그 친구는 자신에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해 준 강사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이미 교실에서는 지식노동에 익숙한 이너 서클 그룹의 냉소와 비웃음에 한참 노출되어 있었고, 또 다른 나머지에게는 그 친구의 질문이나 버벅임이 방해처럼 느껴졌으며, 이도 저도 아닌 이들에게는 그저 프로젝트에서 엮이고싶진 않은데.. 하는 소극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고립되어 있었고,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그러한 공기와 자신을 짓누르는 이해하지 못한, 따라가지 못한 지식의 양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열심히하는데, 열심히하는데 안됩니다. 뭇 사람들은 거기에 또 한번 냉소를 보냈고,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찡그린 얼굴을 삼을 뿐이었다.


낙오의 경험은 어떤것인가. 그건 공포이기도 하고 혐오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가치는 땅바닥 위로 철푸덕 하며 떨어지고, 힘겨운 존엄의 포기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공포는 이를 악물게 한다. 이를 한번, 두번, 세번, 네번 악물다가 이내 낙오해 버릴때에는, 죽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낙오의 경험이 없는 이는 축복받은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순간에 낙오를 한 경험이 있었고, 다만 운이 좋아 잘 지나왔다는 생각을 한다. 이를테면, 나이 서른이 다 된 이가 누군가를 붙잡고 펑펑 운다는 것은,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직전인 나를 제발 구해달라는 비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시스템은 낙오자에게 낙오하게끔 만든다. 그것이 모두에게 공적 이익을 가져다 주므로- 강사는 그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고, 사람들은 그 사람의 낙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 오로지 다행일 뿐. 그것이 '공적'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한 이익인지는 사실,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강사는 결국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될 거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싶었다. 대체로, 처음 접하는 영역도 들이받다보면 어느정도의 시간이 쌓이고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점점 되게 된다. 저 사람은 그때까지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시기는 언제 오게 될까. 모두의 삶이 달랐던 만큼 모두에게 다른 시간은 과연 그에게 언제쯤 손을 내밀어 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길때 즈음, 그에게서 아직 통곡의 기운이 가시기도전에 사람들의 원성어린 눈빛과 함께 진도를 나가기 시작한다. 나 역시, 프로젝트로 비추어지는 화면을 따라 바삐 손을 움직인다. 나의 낙오가 지금이 아님을 안도하며. 비릿하게 상해가는 마음을 숨기며.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1-13 08:24)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56 정치/사회트럼프와 패권이라굽쇼?.... 25 깊은잠 17/02/02 5833 14
    427 체육/스포츠스트존 확대는 배드볼 히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12 애패는 엄마 17/05/12 5838 4
    927 의료/건강세계 각국의 중국과의 인적교류 통제 상황판 (업데이트끝. 나머지는 댓글로) 8 기아트윈스 20/02/28 5846 17
    303 역사러일전쟁 - 그대여 죽지 말아라 4 눈시 16/11/17 5850 9
    820 일상/생각전격 비자발급 대작전Z 22 기아트윈스 19/06/19 5850 50
    315 기타ISBN 이야기 17 나쁜피 16/12/02 5853 15
    264 기타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왜 "추석 차례 지내지 말자"고 할까 9 님니리님님 16/09/13 5854 5
    547 여행상해(상하이) 여행기 1 pinetree 17/11/17 5854 5
    1278 정치/사회인생을 망치는 가장 손쉬운 방법 22 아이솔 23/02/13 5854 18
    1002 요리/음식토마토 파스타 맛의 구조와 설계 그리고 변주 - 1 21 나루 20/08/26 5855 14
    1143 정치/사회개인적인 투자 원칙 방법론 공유 16 Profit(Profit) 21/11/09 5855 15
    1056 IT/컴퓨터주인양반 육개장 하나만 시켜주소. 11 Schweigen 21/01/24 5866 40
    450 역사6세기, 나제동맹의 끝, 초강대국의 재림 36 눈시 17/06/11 5870 13
    664 일상/생각커뮤니티 회상 4 풀잎 18/07/17 5878 15
    638 정치/사회권력과 프라이버시 32 기아트윈스 18/05/28 5885 27
    1049 요리/음식평생 가본 고오급 맛집들 20 그저그런 21/01/03 5887 17
    161 정치/사회필리버스터와 총선, 그리고 대중운동. 11 nickyo 16/02/24 5898 13
    953 일상/생각한국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와 영미(英美)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차이점 16 ar15Lover 20/05/01 5898 5
    537 일상/생각낙오의 경험 10 二ッキョウ니쿄 17/10/30 5901 12
    878 일상/생각체온 가까이의 온도 10 멍청똑똑이 19/10/21 5901 16
    655 꿀팁/강좌집단상담, 무엇을 다루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4 아침 18/07/02 5903 14
    816 역사조병옥 일화로 보는 6.25 사변 초기 혼란상 2 치리아 19/06/11 5903 14
    728 일상/생각추억의 혼인 서약서 12 메존일각 18/11/14 5909 10
    378 일상/생각내 잘못이 늘어갈수록 20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7/03/02 5910 35
    863 정치/사회'우리 학교는 진짜 크다': 인도의 한 학교와 교과서 속 학교의 괴리 2 호라타래 19/09/23 5913 1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