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12/28 10:12:27수정됨
Name   SCV
Subject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사실, 이 글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부터 이리저리 쓰고 있던 글이었는데
제 게으름 때문에 몇 달동안 남은 글쓰기를 이리저리 미루는 동안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돌아가신 후에도 미쳐 마무리짓지 못해 올해가 가기 전 오늘에서야 비로소 겨우 맺어서 올려봅니다.

----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일본의 지배가 20년이 넘어가는 해에 태어난 나의 할머니는, 우리 말을 배울 수 없었던 시대를 지나며 옆집 오빠의 연서에 반해 결혼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첫째 딸을, 한참 전쟁 중이던 때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첫째 딸은 세 살 무렵 병으로 사망하고, 남편마저도 채 주민등록번호를 받기도 전에 떠나보내고 남은 아들 하나를 홀로 부여잡고 살아왔다.

안해본 일 없이 억척같이 살다가, 장가간 아들이 그의 아들과 딸을 낳고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녀에게 암이 닥쳐왔으나 결국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고 병상에서 내려와 죽기 전에 할 일이 있다며 독학으로 한글을 떼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세월의 힘은 이길 수 없어 하루하루 노쇠해 가던 때에 알츠하이머가 찾아오고, 다행히 기억과 생각은 온전했으나 운동 신경이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래도 극진히 보살피는 아들 덕에 별 탈 없이 손자 손녀가 장성하여 증손자녀를 볼 때까지 버텨왔으나, 끝내 올 여름 뇌경색으로 쓰러져 말도 의식도 잃고 만다.

돌아가실 때 돌아가시더라도 정신은 끝까지 온전했으면 한다는 아들의 바람이 무색하게, 결국 그녀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고 하루 하루 꺼져가는 목숨을 붙잡고 버텨오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끼는 손부의 문병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까지도 가늘게 뛰던 심장을 부여잡고 버티려 했으나, 이제 그만 편히 쉬시라는 아들의 귓속말에 그만 편해지셨다.

추석 며칠 전의 일이었다. 명절 직전에 갑자기 들이닥친 집안 큰 어른의 죽음은 온 가족을 당황케 했다. 오래 전 부터 준비해왔던 아들조차도 허둥지둥했고 즐겁게 명절을 보내러 왔던 손자녀 역시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이별 앞에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입관식에서 본 그녀는 너무 작았다. 살아 있을 때도 자그마했지만, 죽은 뒤에는 더 작았다. 몇 겹으로 덮고 싸매어 관에 눕혔을 때, 발 밑으로 공간이 한참이나 남아 장례지도사는 연신 땀을 흘리며 종이 뭉치를 채워 넣었다.

추석 당일 아침에는 발인을 해준다는 사람이 없어 억지로 하루를 더 보태 4일장을 치루고 그녀는 한 줌 가루로 화해 40여년 전 죽은 남편과 땅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같이 산 날 보다 혼자 살아간 날이 훨씬 많아 둘의 만남이 좀 어색하긴 했겠지만, 결국 한 묫자리를 쓰고 한데서 자손들에게 인사를 받게 되었다.

장례를 지내는 내내 할머니에 대해서 생각했다. 할머니는 여동생보다 나를 더욱 예뻐했다. 대가 거의 끊기다시피 할 정도로 위험했던 집안의 장손이라 그랬을지 아니면 내가 할머니 안마를 시원하게 잘 해서 그랬을지 아님 단순히 첫 손자여서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받았던 나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그렇게 싸우기만 했던 내 여동생은 내내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하던 손자인 내가 울면 할머니가 이승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성불할 수 없을거 같아서 라는 변명을 했지만 사실 나는 그다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태어나고 또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녀의 죽음은 요절도 사고사도 아니었으며 몇달 전 부터 그녀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49재에 쓸 영상을 만들면서 그녀의 삶을 다시 되짚어봤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고, 한 삶이 저무는구나. 어찌되었든 같은 시대의 흐름 위에 있던 그녀와 나 중에서, 이제 그녀는 죽음이라는 정류장에 내리고, 나는 아직 타고 흘러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정 많은 아버지와 49재에 참여한 지인들 - 주로 동영상의 사진 속에 같이 있었던 - 은 해금 연주곡만 몽땅 깔아놓은 이 동영상을 보시면서 펑펑 우셨다.

사진속의 할머니는 작지만 당차셨다. 일제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 까지, 단신으로 시대의 흐름속에서 버티며 살아오신 그 순간 순간에 사진으로 남은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그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모습이지 싶다.

격동의 세월을 견뎌낸 그 당찬 몸의 주인은, 이제 더 이상 내 할머니는 세상에 없다. 이제 더 이상..

부디 내세가 있다면, 내세에서는 그녀가 그렇게 소원하는 길고 긴 배움의 길을 걸어 교수가 되길 희망한다.

In loving memory, 서순금. 1931-2017.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1-08 08:10)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7
  • 춫천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29 정치/사회현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_ 관심에 대해서 9 Edge 20/11/09 4593 10
1152 일상/생각헌혈하는 것의 의미 9 샨르우르파 21/12/14 4028 24
733 기타향수 초보를 위한 아주 간단한 접근 18 化神 18/11/22 7321 23
144 경제행복과 행복에 관한 생각들 21 Moira 16/01/21 10334 5
713 일상/생각햄 버터 샌드위치 30 풀잎 18/10/13 7647 24
505 정치/사회핵무기 재배치의 필연적 귀결에 대한 "무모한" 설명 43 Danial Plainview 17/09/04 6377 3
524 일상/생각해외 플랜트 건설회사 스케줄러입니다. 65 CONTAXS2 17/10/05 12804 18
944 정치/사회해군장관대행의 발언 유출 - 코로나 항모 함장이 해고된 이유. 4 코리몬테아스 20/04/07 5782 11
1130 일상/생각합리적인 약자 9 거소 21/09/19 5331 32
955 일상/생각할아버지 이야기 10 私律 20/05/03 4515 17
567 일상/생각할머니가 돌아가셨다. 8 SCV 17/12/28 6895 27
294 문화/예술할로윈 시리즈 2편: 서구문화의 죽음을 기리는 풍습 20 elanor 16/10/30 7047 3
842 정치/사회한일간 역사갈등은 꼬일까 풀릴까? 데이빋 캉, 데이빋 레헤니, & 빅터 챠 (2013) 16 기아트윈스 19/08/10 6218 14
187 요리/음식한식판 왕자와 거지, 곰탕과 설렁탕 45 마르코폴로 16/04/18 9961 13
1003 문화/예술한복의 멋, 양복의 스타일 3 아침커피 20/08/30 4947 5
1174 문화/예술한문빌런 트리거 모음집 27 기아트윈스 22/03/06 5408 53
346 정치/사회한국정치의 혁명! 선호투표제가 결선투표제보다 낫다 12 나호토WTFM 17/01/15 6316 3
953 일상/생각한국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와 영미(英美)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차이점 16 ar15Lover 20/05/01 6018 5
1279 정치/사회한국인과 세계인들은 현세대와 다음 세대의 삶을 어떻게 보는가 7 카르스 23/02/15 4016 6
941 일상/생각한국이 코로나19에 잘 대처하는 이유 24 그저그런 20/03/31 6414 10
748 일상/생각한국의 주류 안의 남자가 된다는 것 37 멜로 18/12/21 9146 56
625 일상/생각한국의 EPC(해외 플랜트)는 왜 망하는가. 49 CONTAXS2 18/05/02 8874 18
208 경제한국에서 구조조정은 왜 실패하나?-STX법정관리에 부쳐(상) 26 난커피가더좋아 16/05/25 8965 8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837 29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7627 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