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02/28 19:41:14
Name   새벽3시
Subject   #metoo 2017년 11월 30일의 일기
*
오늘, 어떤 남자가 나에게 관심을 표했다. 아니, 정확하지 않다. 관심 일수도 있고, 주정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불쾌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랬다. 전화번호를 묻기에 거절했더니 계속 이유를 묻기에 나는 낯선 사람의 전화는 받지 않는다, 고 말했지만 계속해서 전화번호를 물었고, 어느 순간 말을 놓더니(오늘 처음 만난 데다가 몇 마디의 대화로 내가 나이가 그쪽 보다 많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 나이는 둘째 치더라도 어쨌든 그와 나는 모르는 사이였다.) 옆에 앉아 자꾸만 야 너는 어쩌고 하며 바짝 붙어앉았다. 주정이겠거니 하며 어쨌든 불쾌하여 일어설 때 즈음에는 챙겨준답시고(이것도 의도를 모르니 정확지 않다.) 갑자기 뒤에서 내 옷의 모자를 당겨 씌우고 (아마도) 데려다주려고 했다.

내 어깨를 감싸 안아 꼼짝할 수 없게 붙들고 일행과 반대쪽으로 걸었다. 됐다고 말했지만 야 너 지금 아니면 붙들려서 못 가, 내가 알아서 할게, 따라와, 등의 말을 하면서. 내 동의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고 그의 완력에 완전히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고서야 어떻게든 웃으며 마무리하고 싶었던 나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

결국 야 너 꺼져 몇 살이야 필요 없어 하며 소리를 쳤다. 사실 말 자체는 내가 더 험하게 했을지도. 그러나 그 험한 말과 별개로 내 완력이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고 큰소리가 나자 알아채고 다가온 다른 사람에 의해서야 겨우 자리는 무마가 되었다. 그 일이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여러 가지 기분이 들더라.

첫 번째로는 불안과 불쾌가 섞인 두려움.
결국 내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일이었다,는 분명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있는 길이었고 (심지어 가까이에 같이 모임을 한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남들이 언뜻 보기엔 그저 툭탁대는 남녀 정도로 보일 수 있었을 거다. 내가 소리쳐 도움을 구하지 않는 한 나의 완력이나 의지로 그 손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했다. 실제로 화를 내면서 어깨를 잡은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까. 거기서 오는 무력함과 당혹감.

두 번째는 슬펐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행동조차 받아들였을 테니까. 자존감이라곤 없이 이런 말과 행동조차 관심인 줄로만 알고 어디든 따라갔을 테지.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슬퍼졌다. 스스로의 장애와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장해서 꽤 오랫동안 그 그늘 아래 있었던 나. 괴물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아,라는 말에 갇혀 살았다.

—————

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났다. 더 적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날 기어코 내 번호를 알아갔던 그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톡을 보내왔다.

“잘 들어갔어요?”

나는 그를 차단했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읽었을 때 이 글은 남자보다는 나의 탓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더 강하게 드러나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좀 더 강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장애인으로 살아와 남들의 미의식에 미치지 못하는 외모를 가진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범벅이기도 했다. 그래서 잊은 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얘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되지 않았어도 준비되지 않았어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날의 경험을 주변에 이야기했을 때 반응은 대충 3가지 정도였다.

[오-연하가 번호 따갈 정도야? 3시 안 죽었네? 인기 있네.]

[뭐야, 정말 미친놈 아니야? 괜찮아? 무서웠겠다.]

그리고 이후의 공통 반응은

[그렇게 기분이 나빴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즐거운 자리였고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고. 그 남자가 권력자도 아니고 내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자도 아닌데 왜 말을 못했느냐고 하면 그랬다. 나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고 이런 일로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나보다 어린 남자,에게 뭔가 착취당하거나 무시당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성인 여성이고 나의 삶을 책임질 수 있으며 내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는 거니까. 내가 강자이기를 바랐다. 약자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웃어넘길 수 있는 척했고 그것에 실패하고서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난 거절 의사를 거듭해서 밝혔다. 싫다고. 원하지 않는다고.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상대가 마치 여자들이 으레 이렇게 튕긴다는 듯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 내가 좀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 일을 지나 보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알리고 화를 내고 소리를 내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지도. 그러나 나는 잘못이 없다. 순결한 피해자는 절대로 못되겠지만 그렇지만 적어도 저 날 저 순간 나의 잘못은 없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3-12 08:13)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54
  • 힘의 차이를 느끼는 순간 절망하게 되는 것 같아요. 피해자는 스스로의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수십 가지 이유가 필요한데, 가해자는 가만히 있어도 수십 가지 사유를 만들어주죠. 힘내세요.
  • 싫다면 싫은줄 알아라.. 좀.. 제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01 일상/생각버스에서의 반추 4 nickyo 18/09/16 4725 10
697 일상/생각글을 쓰는 습관 4 호타루 18/09/15 5480 8
693 일상/생각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2 nickyo 18/09/02 4991 11
689 일상/생각입방뇨를 허하기로 했다 8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8/08/31 5224 9
681 일상/생각나는 술이 싫다 6 nickyo 18/08/18 5664 28
676 일상/생각욕망의 자극 12 nickyo 18/08/04 5625 6
669 일상/생각진영논리에 갇힌 모 토론회 참석자들에 대한 소고 12 烏鳳 18/07/26 5902 18
665 일상/생각사라진 이를 추억하며 20 기아트윈스 18/07/19 5482 44
664 일상/생각커뮤니티 회상 4 풀잎 18/07/17 5323 15
659 일상/생각두 원두막 이야기 9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8/07/08 4561 20
658 일상/생각왜 펀치라인? 코메디의 구조적 논의 8 다시갑시다 18/07/06 5923 33
639 일상/생각나의 사춘기에게 6 새벽유성 18/05/30 6138 25
637 일상/생각커피야말로 데이터 사이언스가 아닐까? 39 Erzenico 18/05/24 6440 15
635 일상/생각오물 대처법 6 하얀 18/05/20 5478 30
628 일상/생각입학사정관했던 썰.txt 17 풍운재기 18/05/08 6797 21
625 일상/생각한국의 EPC(해외 플랜트)는 왜 망하는가. 49 CONTAXS2 18/05/02 8120 18
623 일상/생각선배님의 참교육 12 하얀 18/04/29 6835 24
620 일상/생각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26 탐닉 18/04/22 6281 25
617 일상/생각건설회사 스케줄러가 하는 일 - 입찰 20 CONTAXS2 18/04/18 6295 21
616 일상/생각오빠 변했네? 14 그럼에도불구하고 18/04/16 6521 30
609 일상/생각저는 소를 키웁니다. 26 싸펑피펑 18/04/02 5947 48
607 일상/생각동생의 군생활을 보며 느끼는 고마움 7 은우 18/03/29 5568 10
604 일상/생각인권과 나 자신의 편견 1 Liebe 18/03/18 5582 11
601 일상/생각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않겠다! 35 얼그레이 18/03/06 6751 45
600 일상/생각다들 좀 더 즐거웠으면 좋겠다. 9 판다뫙난 18/03/05 4995 2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