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09/16 04:22:29
Name   우분투
Subject   냉동실의 개미
 냉동실 바닥에 죽어있는 날파리를 보니 몇 년 전 일이 떠오른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내 동기들은 시험이 다가오면 공부를 했다. 그들은 졸리지 않을 때면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했고 졸릴 때는 교실 뒤편 스탠딩 책상에서 공부를 했고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면 복도의 냄새 나는 신발장 위에 책을 두고 공부를 했다. 나는 그 원동력을 알지 못했다. 실은 내가 그러지 않는 원동력도 잘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내게 게으르게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다. 차라리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성실히 나와서 후회한다고 덧붙인다. 나는 그때도 애매한 인간이었다. 적어도 선생님이 계실 때는 야간자율학습에 출석했다. 조용히 놀았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복도 멀리 가서 친구와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럼으로써 나는 선생님과는 적당한 신뢰를 쌓았다. 친구와는 적당한 유흥을 즐겼다. 선생님이 퇴근하시는 날이면 즐겁게 나가 놀았다. 나는 선생님을 기꺼이 거스르지 못한 사실을 후회한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자 어머니와 학원 선생님은 조바심을 내셨다. 하지만 중간고사는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갓 수학여행에 다녀왔던 것이 좋은 핑계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성급하게 접근하고 퇴짜 맞은 일도 변명이 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험을 보았다. 사회탐구 과목을 빼면 나쁘지 않았다. 외우지 않아도 할 만한 것들이었으니까. 사회탐구 과목들은 6등급이었다. 그 아래 등급 친구들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기말고사 준비 기간은 문제가 되었다. 수학여행 핑계는 더 이상 댈 수 없었다. 짝사랑의 핑계도 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왜 공부를 하지 않냐고 내게 물었다. 그것은 내게 이상한 질문이었다. 마치 나에게 공부를 하지 않는 어떤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저 공부할 기분이 들지 않았을 뿐이다. 수시가 확대되었다거나 대학을 잘 가는 편이 좋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저 할 기분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하지 않았다. 이 문장이 그렇게도 이해하기 어려울까.

 그 무렵 답지를 베끼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종종 답지를 베끼곤 했지만 본격적이지는 않았다. 학원에서는 숙제를 해오면 같은 반 친구들끼리 바꾸어 채점하도록 되어 있었다. 답지는 검색하면 잘 나왔다. 나오지 않으면 그냥 풀었다. 여러 모의고사를 짜깁기한 숙제도 일일이 해당 모의고사를 찾아서 베꼈다. 직접 풀었을 때보다 시간은 더 많이 들었을 테지만 더 즐거웠다. 나는 그로써 공부하는 척을 할 수 있었다.

 진실을 가리고 안온한 나태를 즐기면서는 주로 소설을 읽거나 썼다. 인터넷으로 문창과 지망생과 열심히 합평도 했다. 당시의 문장이 지금 것보다 두 배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이런 구린 문장은 아니었다. 본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중해서 잘 할 수 있었다. 본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인생에 낭비되는 시간은 없고 소설을 읽고 쓰던 게으른 한때도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도움이 됐을 것이다. 문제는 나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게으르다는 점이다. 짝사랑하던 친구는 내게 한량이 싫다고 했다. 예전에 스스로 한량이라 자랑스러웠다. 나는 적어도 모교에선 최고의 한량이었다. 성실히 야자에 출석해서 선생님께 좋은 이미지를 쌓았다. 철저한 척으로 주변 어른들을 기만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시간과 여유를 즐기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친구들과 선생님이 안 계시는 날 저녁, 주에 두 번 삼겹살 회동을 했고 좋은 카페에도 다녔다. 하지만 앞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장 하나로 모든 사항이 재평가된다.

 나는 멍청하지만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대학에 오고 내가 멍청하다는 팩트를 직시했다. 대학 공부를 고교 공부하듯이 대충 버틸 만큼 나는 천재적이지 않고 어쩌면 지능도 평균보다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집안 사정도 이젠 한가로이 나태를 즐길 만큼 좋지 않다. 문제는 내가 성실해지자고 다짐하다 보면 과연 행동이 사고를 견인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고민하거나 패배주의가 게으름의 원인인지 아니면 게으름이 패배주의의 원인인지 고민에 빠지고 마는 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도 제 앞가림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글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지 고민하는 동안 냉동실을 잊고 열어뒀었다. 문을 닫으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까 죽어있던 날파리는 없고 새로운 날파리가 죽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Toby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10-02 16:0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5
  • 청춘에게 희망을
  • 꽃들에게 희망을
  • 우리의 과거 당신의 과거
이 게시판에 등록된 우분투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03 일상/생각레쓰비 한 캔 9 nickyo 18/09/17 6105 44
702 문학[서평] 세대 게임 - 전상진, 2018 3 化神 18/09/17 6106 10
701 일상/생각버스에서의 반추 4 nickyo 18/09/16 5194 10
700 기타냉동실의 개미 4 우분투 18/09/16 5619 15
699 창작고백합니다 44 파란아게하 18/09/09 8892 96
698 꿀팁/강좌알쓸재수: 자연수는 무한할까? 27 기쁨평안 18/09/10 6920 16
697 일상/생각글을 쓰는 습관 4 호타루 18/09/15 6027 8
696 역사고대 전투와 전쟁 이야기 (2) 3 기쁨평안 18/09/13 7538 9
695 정치/사회강제추행으로 법정구속되었다는 판결문 감상 - 랴 리건.... 30 烏鳳 18/09/07 50944 85
694 정치/사회서구사회에 보이는 성별,인종에 대한 담론 29 rknight 18/09/08 8126 23
693 일상/생각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2 nickyo 18/09/02 5492 11
692 IT/컴퓨터Gmail 내용으로 구글캘린더 이벤트 자동생성하기 8 CIMPLE 18/09/06 6509 6
691 경제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 28 Danial Plainview(Profit) 18/08/30 8414 14
690 의료/건강의느님 홍차클러님들을 위한 TMI글 - 아나필락시스 사망사건과 민사소송 22 烏鳳 18/08/28 7377 10
689 일상/생각입방뇨를 허하기로 했다 8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8/08/31 5695 9
688 문학책 읽기의 장점 2 化神 18/08/27 7616 13
687 꿀팁/강좌의사소통 능력 (Communicative Competence) 2 DarkcircleX 18/08/21 8237 7
686 문학시집 책갈피 10 새벽유성 18/08/20 6309 16
685 기타못살 것 같으면 직접 만들어보자. 핸드백제작기 22 Weinheimer 18/08/19 6157 18
684 여행관심 못 받는 유럽의 변방 아닌 변방 - 에스토니아 6 호타루 18/08/15 8130 16
683 문화/예술트로피의 종말 6 구밀복검 18/08/16 7364 13
682 정치/사회넷상에서 선동이 얼마나 쉬운가 보여주는 사례 16 tannenbaum 18/08/14 8781 9
681 일상/생각나는 술이 싫다 6 nickyo 18/08/18 6159 28
680 문화/예술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스포츠 광고 Top 8 14 Danial Plainview(Profit) 18/08/10 6883 9
679 여행오키나와 숙소 몇개 알려드립니다 +_+ 18 얼그레이 18/08/10 7189 1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