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09/17 13:32:30수정됨
Name   nickyo
Subject   레쓰비 한 캔


학교의 자판기에는 여러 음료가 있다. 그 중에 제일 싼 것은 데자와와 레쓰비였다. 돈 한푼이 아쉬워서 학식당에가 공기밥만 사서 공짜로 주는 김치랑 먹는 것도 하기 힘들때, 나는 늘 레쓰비를 뽑아 마시고는 했다. 밥은 천원, 레쓰비는 오백원, 데자와는 육백원. 대낮의 공복을 레쓰비 한 캔으로 버티고, 대충 저녁이 되면 밥 사줄 사람을 찾아 어슬렁 거리거나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때는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그런가보다 했다.


하루는 같은 수업에서 옆 자리에 배정된 친구 하나가, 늘 레쓰비를 드시네요. 하고 물었다. 커피 좋아하세요? 아뇨, 잘 못 마셔요. 짧은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교수님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1시간 반의 수업동안 레쓰비를 천천히, 야금야금, 오물오물 마셨다. 달고 쓴 맛이 입 안에 충분히 스며들만큼, 데굴, 데굴. 배고픈건 여전했지만, 입에 단 맛이 돌 때는 그럭저럭 버틸만한 탓이다.


몇 번의 수업 이후였을까, 그 뒤로 목례를 하거나 간단한 과제물의 여부를 묻던 옆 자리의 학생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 커피 싫어하시면서 왜 그렇게 매번 드세요? 아.. 잠이 많아서요. 커피를 진짜 싫어하시긴 하나봐요. 그 작은 캔을 수업 내내 드시던데. 하하. 그러게요. 문득 머쓱해진 나는 레쓰비 한 캔을 꿀꺽, 꿀꺽 하고 단숨에 넘겼다. 약간은 놀란 눈치로, 한 번에 다 드신거에요? 하고 묻는다. 그러게요. 하하. 멋쩍은 기분이 든다. 이윽고 수업이 시작되고, 입 안에는 단 맛도 쓴 맛도 금세 사라져 배고픔만 가득이다.

돈이 없었던 시간은 그런 시간이었다. 레쓰비 한 캔을 나눠 마시다가, 누군가 레쓰비 한 캔에 대해 물으면 허장성세를 부려 몸을 잔뜩 부풀렸던 시간. 통장에 돈이 없으면 다음 달에 빚을 내서라도 돈을 준비해야 했던 시간. 어른이 된 이들에겐 늘 당연했을 일들. 옆자리의 친구는, 다음 시간에 스타벅스 더블샷 캔을 사다주며 말했다. 이게 더 맛있어요. 내 책상위에는 레쓰비와 스타벅스캔이 같이 놓여졌다.


그렇다고 내가 늘 돈이 없는 일들에 부끄러워 숨기던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와는 그 수업이후로 마주친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그 수업내내 내게 종종 캔커피를 나누어 주곤 했다. 티가 났던 걸까. 잘 모르겠다. 레쓰비 한 캔에 쓰는 마음 씀씀이 덕분에 돈이 없어 힘들었던 시간 중 조금이 편안했던 것이 무척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나는 레쓰비 6캔어치의 돈을 모아 학교 카페의 카페라떼를 사다 주었다. 시험 잘 보세요. 큰 돈이 아니었지만, 세 끼의 식비이기도 했다. 누가 보면 무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내가 그 친구의 마음씀씀이에 답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늘, 마음을 쓰는 것은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고 사소한 것을 가만히 헤아려 보는 것. 그리고 마음을 갚는 일 역시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 지는 시간 앞에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상대에게 나누는 것. 어쩌면 그 학기 내내 배운 수업내용보다, 그 친구의 친절이 내게는 훨씬 오랜 배움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나눈 마음에 힘들어지더라도, 헉헉대며 빠듯해지더라도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뒤로 무리한다는 말이 싫지 않아졌다. 그래서 지금도 레쓰비를 보면 그 친구 생각이 난다. 작은 친절이, 옆에서 내내 후루룩거리는 소리를 참아주었던 배려가, 웃는 얼굴로 작은 보답에 인사해 주었던 예의가.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다.





* Toby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10-02 16:0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44
  • 저 이번에 내려요
  • 너무 고마운 친구ㅠㅠㅠ감동감동..ㅠ
  • 크..
  • 내가 조금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기꺼이.
  • 소소한 감동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03 일상/생각레쓰비 한 캔 9 nickyo 18/09/17 6132 44
665 일상/생각사라진 이를 추억하며 20 기아트윈스 18/07/19 5944 44
1280 일상/생각자격지심이 생겨났다가 해소되어가는 과정 14 골든햄스 23/02/22 4463 43
1213 일상/생각적당량의 술과 음악이 있음으로 인해 인생은 유쾌한 관심거리다. 알버트킹 50 사이공 독거 노총각 22/06/12 4829 43
751 일상/생각초보운전자들을 위한 안전운전 팁 26 기쁨평안 18/12/28 10978 43
552 일상/생각홍차넷의 정체성 48 알료사 17/11/22 9832 43
926 의료/건강지금 부터 중요한 것- 코로나환자의 병상은 어떻게 배분하여야 하나 6 Zel 20/02/27 5529 43
1110 과학예측모델의 난해함에 관하여, .feat 맨날 욕먹는 기상청 47 매뉴물있뉴 21/07/25 6582 42
973 일상/생각자격은 없다. 101 절름발이이리 20/06/22 8597 42
811 일상/생각생각을 명징하게 직조하기 10 기아트윈스 19/06/01 6845 42
622 기타나는 비 오는 아침의 엄마 12 짹짹 18/04/23 5724 42
1413 문학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5 심해냉장고 24/10/20 1663 41
1161 경제인구절벽발 노동인력 부족 우려는 과장인가 32 카르스 22/01/12 6122 41
1108 일상/생각그날은 참 더웠더랬다. 5 Regenbogen 21/07/21 3813 41
1030 일상/생각아빠의 쉼 총량제 22 Cascade 20/11/13 5448 41
805 일상/생각홍차넷 1년 후기 10 곰돌이우유 19/05/20 6312 41
565 일상/생각20~30대에게 - 나이 40이 되면 느끼는 감정 25 망고스틴나무 17/12/24 9362 41
1056 IT/컴퓨터주인양반 육개장 하나만 시켜주소. 11 Schweigen 21/01/24 5896 40
1043 일상/생각어느 택배 노동자의 한탄 14 토비 20/12/26 5452 40
521 일상/생각학력 밝히기와 티어 33 알료사 17/10/01 8593 40
360 일상/생각고3 때 15 알료사 17/02/06 5304 40
1226 정치/사회<20대 남성 53% "키스는 성관계 동의한 것">이라는 기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 보고서 원문 자료를 바탕으로 46 소요 22/07/25 5178 39
1137 일상/생각마치츄카町中華 6 向日葵 21/10/18 5159 39
940 역사오늘은 천안함 피격 사건 10주기입니다. 23 Fate(Profit) 20/03/26 6215 39
848 일상/생각Routine과 Situation으로 보는 결혼생활과 이혼 38 Jace.WoM 19/08/22 7863 3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