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1/06 22:54:30수정됨
Name   CONTAXS2
Subject   노가대의 생존영어 이야기
[저는 영어를 못합니다.]라고 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니 외국사에서 10년을 일했는데 영어를 못한다고? 왜 이리 겸손하실까.
회의때 영어 쓰는거 보면 잘 하시잖아요. 에이... 그 정도면 충분하죠



라는 반응을 받습니다. 근데 진실은 뭐... 영어를 꽤 못합니다.
여기서 [꽤]는 상대적으로 영국애들보다 못한다. 가 아니라 진짜 절대적으로 못합니다.
회의에서 쓰는 영어는 미리 두어문장 영작을 해서 준비한 말만 딱 하고 빠지는거죠.



중2때 영어학원에서 영어공부한걸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때는 영어공부란걸 생각날 정도로 해보지 않았고
가고 싶었던 대학은 본고사에 영어과목이 있어서 포기했고, (제가 시험 친 대학은 영어대신 과학)

대학때는 양키고홈이 전부였으며

취준생 때 아현중학교에서 친 토익은 475점이었습니다.(쪽팔려서 원서에 첨부도 못함 ㅠ)
그 후 대리 진급해야되니까 학원은 안나가고 시험만 계속 쳐서 550~620점정도를 꾸준히 마크하다 한번 대박나서 810으로 끝냈습니다. (썩쎄스-_-v)

첫 해외여행은 서른세살때 신혼여행이었고, 당시 공항에서 departure라는 단어를 처음 봤습니다.





암튼 그렇게 영어와 담을 쌓고 살다가 외국사로 이직을 하게 됩니다. 외국계 한국지사도 아니고 쌩짜 외국사.
이직한다고 알렸을 때 들었던 가장 기억에 남는 저주(?) 역시 영어와 관련된 것이었고

인터뷰를 볼때 6개국어를 하는 Sam이라는 미국인 할아버지가 한 '영어 좀 하냐?'라는 질문에
'영어하러 온거 아니고 일하러 왔다 (I'm not here to speak English, I'm here to work. 준비한 답변도 아니었는데, 어찌저찌 주워섬김 ㅋㅋ)'라고 대답한 다음에, 그 후 2년간 진짜 동료들이랑 차 한잔을 마셔본 적도 없었습니다. (진짜임. 과장 ㄴㄴ해)
금욜에 이태원가서 맥주한잔 하자고 할때도 가족 핑계댔고,
종로에서 일할 때 애들이 점심 같이 먹으러 나가자고 할때도 저는 꿋꿋하게 혼자 서브웨이 다녔습니다.
Christmas Party나 Year End Dinner에서는 꼭 카메라를 메고 나가서 사진을 찍는 역할 (영어 안해도 됨, 개꿀)을 했고요.


예전에 박중훈이 농담섞어서 유학시절 이야기할 때 '과묵한 동양 학생'의 포지션이 제가 추구해왔던 바입니다.
-------------



암튼,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해외 프로젝트와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영어를 못 해서 프로젝트가 망한다'


제 결론은 항상
[영어와 프로젝트 성과와는 크게 상관은 없지만
커뮤니케이션과 프로젝트 성과와는 매우 상관이 있다.]
입니다.




아까, 회의때 제가 상대편에 (한국회사입니다) 뭔가를 요구했습니다. 이건 들어줘도 그만 안 들어줘도 그만인데,
보고서의 포맷에 관한 것이라, 해주려면 좀 귀찮고 분량이 많아집니다. 대신 저희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되죠.

이때 일주일 넘게 갖은 핑계를 대며 안해주던 부장님 세 분(공무부장, 시운전담당부장, PE 담당부장)이 '오케이, 굿아이디어'라고 하시면서 승낙을 하죠.


이게 문젭니다.
이게 프로젝트를 망쳐먹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입니다.


회의 끝나고 상대편 상무님이 가시면서
'Contax차장, 그거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해요... 허허허 그냥 컨선만 정리하면 되지.. 허허허'하고 가셨는데
사실 그 회의에서도 그 부장님 세분은 상무님 말씀대로 저랑 [영어로] 싸우셨어야합니다.
결국 그쪽 입장에서는 싸워보지도 않고 gold plate (발주처의 무리한 요구로 계약서 외의 것을 해주는 것)를 해주게 된거죠.

(물론 절대 gold plate 아니었고, 절대적으로 계약서에 근거한 요청이었음. 갑질타파!)




랭귀지 배리어 앞에서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는 두가지 중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는 [랭귀지] 입니다. (???)
영어를 잘하면 문제가 해결되죠 (???)



두번째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를 하는 영미권애들은 생각보다 영어에 매우 너그럽습니다. (물론 뭐 속으로야 벼라별 욕을 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 들어줄께 이야기해봐 (회의 길어지면 우린 OT신청하면 돼)' 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요.
갸들은 (아마도) 이미 영어는 우리가 독점할만한게 아니라 전세계에서 다양하게 발전시킨 언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십수년 영어에 지쳐버리고, 그 태도를 계속 견지하기 위한 연료(열정)가 소진되어버린 차부장급 엔지니어들은 그 배리어를 넘을 의지가 없을 경우들이 많죠.
들고있던 검이 무거워 싸움을 포기하는.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우리에겐 영어로 된 도면이 있고, 쓰는 용어들은 모두 영어이며,
사이사이에 be동사와 get동사, make동사만 써도 되지만 빼놓고 이야기해도 이 놈들은 다 알아듣는다. 입니다.




영어없이도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낼 수 있죠. 근데 그 벽 앞에서 발길을 돌리면 프로젝트는 안 끝납니다.




암튼 머

영어를 잘하면야 제일 좋겠지만, 어차피 이생망이니
뻔뻔함과 바디랭귀지를 대신 장착하고 일해야죠.



8분후 퇴근! 아싸!

* 토비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1-22 22:5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5
  • 실전을 겪는 현직자는 추천.
  • 인재시군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23 기타딸바보와 바보딸 28 민달팽이 16/12/16 6522 26
455 일상/생각여사님을 소개합니다 (스압, 일기장류 징징글. 영양가X 뒤로가기 추천) 31 알료사 17/06/19 6519 20
152 의료/건강산후우울증에 대한 소고 21 Obsobs 16/02/12 6517 7
260 체육/스포츠국내 축구 이야기들 8 별비 16/09/02 6505 5
178 사진봄, 그리고 벚꽃 (10장) 14 다시한번말해봐 16/03/29 6503 7
835 체육/스포츠파퀴아오-서먼 : Who will be resurrected? 5 Fate 19/07/21 6501 27
639 일상/생각나의 사춘기에게 6 새벽유성 18/05/30 6501 25
613 정치/사회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여덟 가지 생각 5 Danial Plainview 18/04/08 6501 14
287 기타당연한 육아는 없답니다 16 밀크티티 16/10/20 6500 22
740 일상/생각엑셀에 미쳤어요 24 Crimson 18/12/03 6499 27
539 일상/생각아주 작은 할아버지 20 소라게 17/11/03 6499 36
385 기타막말 변론의 이유 32 烏鳳 17/03/11 6497 19
280 일상/생각전직 호주 총리 만난 썰 40 기아트윈스 16/10/12 6493 8
131 정치/사회인용의 실패와 승리, 두 정치인의 경우 9 moira 15/12/15 6493 15
289 창작[한단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8 SCV 16/10/24 6483 11
677 기타러시아와 미국의 전술 교리에 대해 알아봅시다 17 기쁨평안 18/08/08 6482 33
118 일상/생각아버지의 다리가 아픈 이유는 26 YORDLE ONE 15/11/25 6482 16
755 일상/생각노가대의 생존영어 이야기 25 CONTAXS2 19/01/06 6480 25
764 체육/스포츠슈퍼볼 53(Super Bowl LIII) 프리뷰 (약스압) 5 Fate 19/02/02 6479 11
914 일상/생각멘탈이 탈탈 털린 개인카페 리모델링 후기 51 swear 20/01/23 6477 32
271 정치/사회미국의 트럼프 열풍에 대한 소고 23 길도현 16/09/28 6472 11
592 철학/종교푸코의 자기 배려와 철학상담(1) 3 메아리 18/02/11 6469 10
619 정치/사회범죄의 세계 - 임대차보증금 대출사기 17 烏鳳 18/04/20 6463 21
482 일상/생각사회적 조증에 대하여 34 Homo_Skeptic 17/07/25 6463 30
146 일상/생각운명적인 이별을 위한 기다림에 대하여 22 YORDLE ONE 16/01/26 6461 1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