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4/06 02:52:32수정됨
Name   매일이수수께끼상자
Subject   봄의 기적, 우리 동네
봄 이랑에서 새싹이 얼굴을 하나둘 내밀기 시작하면 알 수 있다. 꽃샘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씌운 얇은 멀칭 비닐이 험한 야산에서도 생명을 키워낼 만큼 많은 것을 막아준다는 걸. 봄볕이 반가워 성급히 문풍지들을 떼어낸 창문도 알려준다. 그 얇은 것들이 동장군의 굵은 몽둥이를 우리 아기들 대신 맞아주고 있었다는 걸. 아마 겨우내 똑똑 떨어진 작은 물방울들이 지켜낸 수도관들도, 내년 이맘때까진 그 왜소하고 꾸준한 것들의 공로를 잊을 것이다.

겨울보다 더 눈부신 볕이 드는데도 아직 깨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 생경하게 알 수 있다. 오래 전 묻히신 내 부모도 가슴 한 가득 날 쳐다보던 순간순간이 있었다는 걸. 아이의 새근새근한 소리 가까이에 코를 대고 달착지근한 아기 냄새를 맡으면 알 수 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도 긴 세월을 지나야 자식의 마음에 닿으리라는 걸. 아마 나의 공로라는 것은 아이의 미래가 봄처럼 생명 가득하도록, 작아도 꾸준히 부딪히는 것이리라.

아이 옆에 누워 봄 아지랑이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아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귀에 들리는 듯 알 수 있다. 새벽마다 고양이 걸음으로 나가시던 우리 부모님 간절히 기도하던 내용을. 늦잠 자는 버릇 들까봐 겨우 마음 다잡고 자는 아이 귀에 ‘아침이에요’를 속삭이면서도 알 수 있다. 기도처럼 아이를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부모의 하루가 우렁차게 주어졌다는 걸. 아마 오늘 하루도 우린 문풍지처럼, 기도처럼,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얇고 꾸준하고 세밀한 것들의 보호를 받으며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을 핑계 삼던 동네 아저씨들, 봄에 쫓겨 아내들에 쫓겨, 모처럼 축구라도 하기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가 알게 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포지션이 전방에서 서서히 우리 편 골대 근처로 내려오게 된다는 걸. 심심해 보였던 수비수 역할을 한두 게임 하다보면 새롭게 알 수 있다. 뒤에서 팀을 지키는 자의 시선은 의외로 전체를 조망하게 된다는 걸. 아마 아버지의 자리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잔뼈가 수비수의 체질을 선물했을 것이다.

겨울에는 산에 올라도 소득 없이 내려와 시무룩했던 어머니들, 해의 달라진 길이만 보고도 알게 된다. 이제 소쿠리를 이고, 엉덩이 의자 차고 올라갈 때가 되었다는 걸. 산등성이 타고 내려오는 바람 줄기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어머님들은 알 수 있다. 오늘 저녁 자식들과 남편들에게 해줄 음식은 흙냄새 엷게 베인 쑥 된장국이라는 걸. 아마 국을 끓이는 건 물론이요, 후식으로 쑥 튀김까지 해줄 만큼 마음 소쿠리가 흡족히 찰 때까지 하산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들 쉬는 시간에 부리나케 축구공과 마당을 차지하는 아이들은 아직 알 수가 없다. 세상의 아버지가 한 명 사라질 때마다 기도 소리가 하나씩 줄어든다는 것을. 철 따라 달라지는 어머니 음식을 먹은 아이들이라도 아직 알 수가 없다. 세상의 어머니가 한 명 사라질 때마다 하나 뿐인 맛 하나가 기억 속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아마 끝없이 사랑하면서도, 끝없이 벗어나려는 자식의 어설픔이 사라질 때쯤엔 너희가 기도하고 너희가 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몰라도 한 해 한 해 커가며 봄 이랑에서 새싹이 얼굴을 하나둘 내밀기 시작하면 알게 될 것이다. 꽃샘추위가 올 때마다 오돌오돌 떨며 씌운 얇은 멀칭 비닐이 험한 야산에서도 생명을 키워낼 만큼 많은 것을 막아준다는 걸. 봄볕이 반가워 성급히 문풍지들을 떼어낼 때마다 창문도 알려줄 것이다. 그 얇은 것들이 동장군의 굵은 몽둥이를 사랑하는 이들 대신 맞아주고 있었다는 걸. 아마 겨우내 똑똑 떨어진 작은 물방울들이 지켜낸 수도관들도, 이듬해 봄까진 그 왜소하고 꾸준한 것들의 공로를 잊을 것이라는 걸 너희 자식을 보며 떠올릴 것이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4-14 21:01)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00 일상/생각불안 애착 유형과 회피 애착 유형의 연애/이별기 4 자일리톨 19/05/01 14660 17
    796 일상/생각축구지를 펴내기까지... 그 나름의 철학 ㅋ 18 커피최고 19/04/18 7530 26
    791 일상/생각유폐 2 化神 19/04/10 4668 29
    790 일상/생각봄의 기적, 우리 동네 6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9/04/06 4721 26
    784 일상/생각과거 카풀 드라이버 경험 11 행복한고독 19/03/24 5446 14
    780 일상/생각'그럼에도'와 '불구하고'의 사이 8 임아란 19/03/12 5643 64
    777 일상/생각영국은 섬...섬... 섬이란 무엇인가? 38 기아트윈스 19/03/04 5895 26
    776 일상/생각가난한 마음은 늘 가성비를 찾았다 18 멍청똑똑이 19/03/04 6392 46
    772 일상/생각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without even being asked) 10 기아트윈스 19/02/19 5208 64
    767 일상/생각혼밥, 그 자유로움에 대해서 13 Xayide 19/02/03 5492 29
    765 일상/생각돈이 없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 10 The xian 19/01/31 6955 24
    756 일상/생각대체 파업을 해도 되는 직업은 무엇일까? 35 레지엔 19/01/11 6817 33
    755 일상/생각노가대의 생존영어 이야기 25 CONTAXS2 19/01/06 6140 25
    754 일상/생각짧은 세상 구경 8 烏鳳 18/12/30 5057 22
    751 일상/생각초보운전자들을 위한 안전운전 팁 26 기쁨평안 18/12/28 10207 43
    750 일상/생각2018년의 사회진화론 21 구밀복검 18/12/28 7249 37
    748 일상/생각한국의 주류 안의 남자가 된다는 것 37 멜로 18/12/21 8430 56
    745 일상/생각오징어 깎는 노인 32 기아트윈스 18/12/12 6677 67
    744 일상/생각건설회사 스케줄러가 하는 일 - 공정율 산정 16 CONTAXS2 18/12/13 6604 18
    740 일상/생각엑셀에 미쳤어요 24 Crimson 18/12/03 6138 27
    728 일상/생각추억의 혼인 서약서 12 메존일각 18/11/14 5392 10
    725 일상/생각대학원생 고민글을 올린 후 2년 21 Keepmining 18/11/09 6116 18
    713 일상/생각햄 버터 샌드위치 30 풀잎 18/10/13 6790 24
    712 일상/생각고해성사 19 새벽하늘 18/10/12 4842 46
    703 일상/생각레쓰비 한 캔 9 nickyo 18/09/17 5620 4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