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6/25 12:28:29수정됨
Name   리오니크
Subject   매일매일 타인의 공포 - 안면인식장애
"친구여, 내게는 두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네."
"그것이 무엇인고?"
"하나는 프리지아의 향기이고, 또 하나는 김태희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일세."

앞의 것은 프리지아 취맹(?)이라는 증세이고, 유전적인 증세로 유럽인 경우 5~10%가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 뒤는 유명한 안면인식장애라는 것이죠. 희한한 유전자만 골라서 받은 모양입니다.

회사에서 얼굴 인식 프로그램을 테스트할 때였습니다. 일단 연예인 사진들을 모아서 테스트해 보려고 이미지 검색을 하였는데, 아무리 보아도 다른 사람인데 같은 이름(예를 들면 '김태희')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진짜로 내용과 사진이 다를 수 있으므로, 옆에 있는 동료 직원들에게 일일히 물어 가면서 사진의 사람이 특정 연예인인지 확인받고 실험 데이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 경우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 어느 정도 인식을 하기에 그렇게까지 심한 증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에는 충분히 불편함이 따르죠. 신해철씨가 자기 아내의 얼굴을 못 알아보았다는 말이 제게는 농담이 아닙니다.
예전에 김혜수씨가 화장품 광고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 화장품 가게에 부탁해서 브로마이드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같은 실험실 여자 선배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제 책상 앞에 떡하니 1년 동안 붙여 놓았었지요. 그러고 몇년 뒤에 극장이 있는 건물에 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여성 한 분이 휙 지나가면서 그 뒤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뒤따르더군요. 그래서 그 주변에 있던 경비원에게 물었습니다. "저 분이 누구입니까? 유명한 분인가 보네요?" 그랬더니 경비원은 한숨을 쉬며 마치 간첩을 보는 듯한 눈으로, "아니 김혜수 몰라요? 김혜수?" 라고 타박하였습니다.
네.. 김혜수씨가 영화 '타짜'의 홍보를 위해 극장에 들렸던 것입니다.

최진실씨가 출연하는 유명한 드라마가 있었는데, 자취방에서 모두 모여서 조그만 TV로 함께 보고 있었습니다.
최진실씨가 등장했다가 옷을 바꿔 입기만 해도 제가 "저 여자는 누구지?"라고 묻기를 반복하자 마침내 보는 데 방해된다고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결혼 전 사귀던 아내를 약속 장소에서 못 알아본 것은 뭐 이야기거리도 안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오해를 많이 사게 됩니다. 아는 척도 안 한다, 인사를 안 한다, 뭐 불만 있느냐.. 이런 말 듣기는 다반사이고, 혹시 눈을 마주치면 알아보아야 하는데 못 알아보면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될 까봐 (사실은 나중에 야단맞을까봐) 바닥을 보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싶어도 엉뚱한 사람이면 어쩌지? 라는 마음에, 자꾸 위축되는 것을 피할 수 없더군요.

앞서 언급하였지만 제 경우는 그렇게까지 중증은 아닌지, 가까운 거리에서 한 몇달 함께 지내면 어느 정도 인식이 가능하고, 인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쯤 되면 상대방의 얼굴이 일종의 만화처럼 간략화되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에도 또 함정이 있는 것이, 그 인식되는 상태에서 머리 모양을 바꾸는 등 스타일을 바꿔 버리면 다시 누구인지 못 알아보게 됩니다. 후배(남)의 머리가 직모인데, 파마하고 나서는 못 알아보다가, 머리를 풀었을 때 또다시 못 알아보는 식입니다. 여기에서 추측한 것은, 컴퓨터 알고리즘은 보통 눈 사이의 거리 등 얼굴에서 feature를 추출하고 그것을 비교하여 동일인임을 인식하는데, 제 경우는 사람 얼굴을 이미지 한장 한장으로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가 수없이 많이 축적되면 이미지들과 매칭을 시도하여 인식을 할 수 있지만, 다시 잠시 못 보게 되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희미해지든지 다른 이미지 저장공간에 밀려나서 인식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우회 모임에서 새로운 학년이 들어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만, 다음 주 모임에서는 웬일인지 모두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모임에서는 또다시 모두 바뀌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중 정말 새로운 얼굴도 있었겠지만, 그 외에는 바뀐 것이 아니라 동일인인데 인식을 못한 것일 겁니다. 그렇게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사람은 공포영화 없이도 매일매일 타인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공포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티타임에 처음으로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7-07 23:1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3
  • 첫글은 추천!
  • 듣는 입장에선 신기한 에피소드지만 때때로 불편하고 어려운 점이 많으시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글 자주 올려주세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66 의료/건강완벽한 보건의료제도는 없다 ('완벽한 보건의료제도를 찾아서'를 읽고) 18 Erzenico 17/12/26 7211 24
515 일상/생각조카사위 이야기. 47 tannenbaum 17/09/21 8228 24
483 일상/생각인생은 다이어트. 12 프렉 17/07/26 6945 24
400 일상/생각부쉬 드 노엘 18 소라게 17/03/28 5991 24
399 일상/생각쪽지가 도착했습니다. 36 tannenbaum 17/03/27 5676 24
442 일상/생각누워 침뱉기 17 tannenbaum 17/06/01 5363 24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50 23
1364 영화영화 A.I.(2001) 18 기아트윈스 24/02/06 2122 23
1341 꿀팁/강좌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1 31 흑마법사 23/11/30 2921 23
1301 일상/생각팬은 없어도 굴러가는 공놀이: 릅신이 주도하는 질서는 거역할 수 없읍니다. 8 구밀복검 23/05/20 3072 23
1228 의료/건강아산병원사건 서울대 교수 실명글과 개인적인 견해 20 cummings 22/08/04 4707 23
1224 경제코인·투자 손실금까지 변제해주는 게 맞냐? 25 Wolf 22/07/20 4852 23
1218 정치/사회너말고 니오빠 - 누구랑 바람피는 것이 더 화나는가? 23 소요 22/06/28 5485 23
1175 일상/생각농촌생활)봄에는 굼벵이도 석 자씩 뛴다 16 천하대장군 22/03/07 3786 23
1162 경제게임이 청년 남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줄였다? 28 카르스 22/01/20 5228 23
1134 정치/사회IT 중소기업을 선택할 그리고 선택한 이들을 위한 -틀-의 조언 14 아재 21/10/07 6349 23
1104 기타남자 빅사이즈 인터넷 옷쇼핑(3XL이상부터)+그외인터넷쇼핑후기 27 흑마법사 21/07/12 8164 23
1050 일상/생각자다 말고 일어나 쓰는 이야기 7 Schweigen 21/01/05 4464 23
939 정치/사회가속주의: 전세계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을 고무하는 모호한 사상 - 기술자본주의적 철학은 어떻게 살인에 대한 정당화로 변형되었는가. 18 구밀복검 20/03/24 7618 23
924 정치/사회봉준호 감독 통역을 맡은 최성재(Sharon Choi)씨를 보면서 한 영어 '능통자'에 대한 생각 31 이그나티우스 20/02/19 7361 23
891 창작은밀한 통역 3 작고 둥근 좋은 날 19/11/23 6365 23
844 꿀팁/강좌영어 공부도 하고, 고 퀄리티의 기사도 보고 싶으시다면... 9 Jerry 19/08/14 7157 23
824 일상/생각20년전 운동권의 추억 36 제로스 19/06/27 7088 23
823 일상/생각매일매일 타인의 공포 - 안면인식장애 28 리오니크 19/06/25 5731 23
788 정치/사회제1저자, 교신저자, 학회, 자리싸움, 그리고 관행 25 烏鳳 19/04/03 6534 23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