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7/20 03:51:18수정됨
Name   o happy dagger
Subject   청혼에 대한 기억...
꽤 오랜만에 하는 전화였다. 나는 그다지 전화 하는걸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목소리는 작고 힘이없어서, 내가 전화를 받으면 보통 아프냐는 이야기를 먼저 들을 정도였다. 어째든 전화를 하는건 나의 몫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한데, 그래도 어쩌다 내가 먼저 전화를 하곤 했었다. 이 전화 역시. 딱히 큰 주제가 없이 하는 통화가  그렇듯이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내가 먼저 전화를 했지만, 대체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K는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했을까? 잠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렇게 침묵이 찾아오면 그걸 깨뜨리는건 대부분 K의 몫이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걸 깼다.

K야? 우리 결혼할까?
응? 뭐라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겠지만, 심리적인 시간은 한참을 흘러간 느낌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을테니. 이번에도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지금 대답하기 뭐하면, 담에 전화하거나 볼때 답을 해 줘.
그래. 그렇게 할께.

전화기를 내려놓고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을 했다. 딱히 크게 생각한게 아닌데. 뭔가 해야 할 것이 있으려나?

-------------

다음날 나는 시내로 나갔다. 반지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지를 파는 곳으로 가서 아무 장식없는걸 골랐다. 사이즈를 뭘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K의 손을 한 번도 잡아본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K와 처음 만난후 7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그 동안 스무번이 안되게 만났다. 통신 동호회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일년에 2-3번 정도 만났으며, 대부분은 밥을 같이 먹고 차를 마시는 정도에서 끝났다. 가끔 K는 친구를 데리고 나오기도 했고, 나는 그 친구중 한명에 관심이 가서 따로 연락해서 2-3번 만나본적이 있었는데, 상대가 따로 만나는걸 피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후로는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조금 다른것이 있었다면, K가 해뜨는걸 보러가자고 해서, 서울에서 밤차를 타고 동해안에 새벽에 도착해서 바닷가 카페에서 해뜨기전까지 있다가 해뜰무렵 해안가로 나가서 해뜨는걸 보고, 아침버스로 돌아온게 조금 다른 정도. 그 날 출발하기전 나는 후배와 술을 많이 마셨고, 약속시간에 간신히 나가서 버스를 타자마자 취기에 그냥 잠이 들어버렸었다.

만나서 차나 혹은 맥주를 같이 마실때 K의 손을 유심히 보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평균 정도 되는 손 사이즈였지만 손가락이 길고 가는 편이라  사람들이 내 손을 보면 여자 손이냐는 소리를 하곤 했었는데, K의 손은 내 손보다 약간 작아보였고, 손가락은 나와 비슷한 정도의 굵기였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생각을 하지는 않고 내 약지에 꽉 끼는 정도의 사이즈로 골랐다.

집에와서는 느닷없는 청혼이어서 놀랐겠지만, 나는 진심이고 만약에 받아준다면 다음에 만날때 이걸 끼고 있어달라는 내용의 짤막한 편지와 함께 반지를 소포로 보냈다.

------------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흘렀고, 다시 전화를 했다. 전화할때면 그렇듯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조금 했다. 그러고는...

  지난번에 이야기한거... 결정했어?
  응. 할께.
  응. 그래.

생각보다 너무 쉽게 모든게 결정된 느낌이 살짝 들기는 했지만...

-------

이렇게 결혼 결정을 하고 한달쯤 지난후에 만났다. K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나왔고,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고 걸었고, 아직도 함께 걷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aUh2GJ1TJY
Wishbone Ash - Everybody Needs A Friend


Trust in me, I'll try to do
Everything to help you that I can
Broken wings can heal and mend again
Don't be afraid to cry your tears out loud
Everybody needs to have a friend

It's only love that I can give
And I give to you the only love I have
When I see you're so unhappy
It makes me want to try and understand
Everybody needs a helping hand

If everything should turn around
And it's me who feels so down and out
You could be the kind of company
To share a load and know how bad it feels
Everybody needs to have a friend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7-29 20:4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7
  • 넷째 가즈아!!


CONTAXND
아... 로맨틱.

그 시절엔 그렇게 연애하고 청혼하셨군요!
o happy dagger
지금이야 그랬나 하고 있지만, 그 시절도 저렇게 청혼하면 망하는게 대부분...
7
김독자
역시 될놈될...
이야기 너무 멋져요! 소설 한 편을 본 기분이에요!
o happy dagger
될지 안될지 미리 잘 재보는게...
사나남편
여러분 보십시오. 결혼! 어렵게 생각하실게 아닙니다. 연애가 어렵지 결혼은 이렇게 로맨틱합니다. 얼마나 글에서 행복이 묻어납니까!! 자 하세요. 결혼하자고 고백하세요
7
o happy dagger
일단 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다음이야 별거 아니기는 한듯요.
월화수목김사왈아
배워갑니다.
o happy dagger
이건 안배우는게 더 나은게 아닌가 싶어요.
다람쥐
와 멋지다.....!!! 로맨틱해요
o happy dagger
카베동은 만화에서나 뭔가 있어보일듯요. 현실에서는 전혀 아닌.
seonnyseo
지난번 글도 그렇고 많은 생각이 들게합니다.
음악도 잘 들었습니다. 감사해요 :)
o happy dagger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브로
그 사이에 있었던 연애는 아니지만
신뢰감이 쌓이는 과정이 있으셨던 건가요?
o happy dagger
통신 동호회로 만난거여서, 채팅을 꽤 했었고, 전화도 하곤 했어요.
메존일각
멋집니다!
o happy dagger
현실에선...
아카펄라
결혼하고 싶어지네요ㅎㅎ^^
o happy dagger
정말로 할 마음이 들면 자연스럽게 하기 되는거 같아요.
1
망손꽝손
아... 심쿵!!!!
o happy dagger
^^
헌혈빌런(R)
후회하고 계신다면 제목에 마침표 3개를 찍어주세요
2
o happy dagger
제목에 마침표 세개는 모든 글에 디폴트인데...
진짜진한다크챠컬릿
1년에 평균 2~3번 만나며 손도 안 잡은 분께 청혼하고 결혼까지 하셨다니 신기하네요!!
o happy dagger
나름 채팅은 꽤 했네요. 전화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하고...
만화같아요 연애없이 바로 결혼이라니
o happy dagger
불가능한건 아니더라고요.
니누얼
1년에 2~3번 만나서 맛난거 먹고 수다떨다가 헤어지던 사이로 5~6년을 보낸 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결국 다른남자 만나 결혼했고, 결혼 후 자연스레 멀어졌....

역시 될놈될!! ㅋㅋ
o happy dagger
네. 역시 될껀 어째도 되는듯 싶어요. 안되는건 어떻게 해도 안되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67 기타[마르크스 사상사 시리즈] 1. 맑스?마르크스? 29 nickyo 16/09/21 7721 5
301 일상/생각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후기입니다. 15 nickyo 16/11/13 5961 12
676 일상/생각욕망의 자극 12 nickyo 18/08/04 6467 6
681 일상/생각나는 술이 싫다 6 nickyo 18/08/18 6526 28
693 일상/생각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2 nickyo 18/09/02 5871 11
701 일상/생각버스에서의 반추 4 nickyo 18/09/16 5538 10
703 일상/생각레쓰비 한 캔 9 nickyo 18/09/17 6508 44
708 문학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_ 조지 오웰 8 nickyo 18/10/01 7247 11
29 여행(사진 다수 포함) 수원화성 돌아보기 28 NightBAya 15/06/20 10225 0
1308 일상/생각비둘기야 미안하다 14 nothing 23/06/29 3093 10
1141 IT/컴퓨터변화무쌍한 웹 기술 역시 톺아보기 - 1 16 nothing 21/11/05 4941 10
1168 일상/생각길 잃은 노인 분을 만났습니다. 6 nothing 22/02/18 4692 45
1208 일상/생각손절의 시대 24 nothing 22/06/01 6133 52
865 여행몽골 여행기 - 1부 : 여행 개요와 풍경, 별, 노을 (다소스압 + 데이터) 8 Noup 19/09/26 6222 11
867 여행몽골 여행기 2부 : 숙박(게르) / 음식 / 사막 7 Noup 19/09/28 6573 7
236 IT/컴퓨터어느 게임 회사 이야기 (1) 26 NULLPointer 16/07/19 22485 29
833 일상/생각청혼에 대한 기억... 28 o happy dagger 19/07/20 6479 27
846 일상/생각혼자서 애 키우던 시기에 대한 추억... 41 o happy dagger 19/08/16 6488 55
870 기타아이는 왜 유펜을 싫어하게 되었나. 27 o happy dagger 19/10/02 6166 49
152 의료/건강산후우울증에 대한 소고 21 Obsobs 16/02/12 7009 7
1417 체육/스포츠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1280 33
1276 일상/생각내돈내산 뷰티템 리뷰 13 Only 23/02/08 3612 20
673 기타레전드가 되는 길: 이경규 vs 최양락 13 OSDRYD 18/07/30 8868 7
894 의료/건강꽃보다 의사, 존스홉킨스의 F4(Founding Four Physicians) 11 OSDRYD 19/12/06 5717 21
509 기타콜라테러 썰 15 OshiN 17/09/15 6757 1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