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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2/16 13:56:08수정됨 |
Name | 기아트윈스 |
Subject | 일독김용(一讀金庸): 김용 전집 리뷰 |
생각보다 오래 고생한 끝에 드디어 일독김용에 성공했음미다. 대부분 번역판으로 봤지만 종종 원본도 뒤적거린다고 좀 걸렸네요. 짧은 감상문 남깁니다. [1]. 판본 김대협의 소설은 다 세 가지 다른 판본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장 먼저 나온 신문연재판을 [구판]이라고 합니다. 연재시점은 50말 70초. 그 뒤에 구판을 열심히 수정한 것을 중국 본토의 삼련서국에서 90년대 초에 판권계약을 해서 전집 형식으로 출간한 게 이른바 [수정판] 혹은 [삼련판]이라고 합니다. 김용 관련 논문은 삼련판이 저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도 이 [수정판]일 거예요. 고려원판 영웅문이라든가... 한국 독자들을 경악시킨 악명(?) 높은 최후 판본이 바로 [신수판]인데, 이건 수정판(삼련판)이 나온 이후 다시 십수년의 노력을 기울여 00년대 초반에 모두 세상에 나온 놈들입니다. 한국에서는 김영사에서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하고 이 신수판을 번역했고 또 번역 중입니다. 2003년에 나온 김영사판 사조영웅전은 원래 수정판을 번역하려던 거였는데 하필 번역작업 말미에 중국에서 신수판 사조영웅전이 나오는 바람에 대조해서 읽어보고 신수판을 최대한 반영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반영'이라는 두 글자가 좀 미심쩍어서 과연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했을런지는 조금 의문입니다. 하나하나 대질해보면 알겠지만 제가 돈 받고 감수하는 것도 아니고... 귀찮아서 안함 'ㅅ' 김영사에선 연이어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를 재번역해서 내놨는데 역시 모두 신수판이 저본입니다. 현재 천룡팔부와 녹정기를 역시 신수판 기준으로 번역중이며 잘하면 올해 출간할 수 있을 거라는데 기대가 큽니다. [2]. 번역 참으로 안타깝게도 국내에 출간된 그 어떤 번역본도 진선진미하지 않습니다. 중원문화사판은 쓰레기니까 더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천룡팔부나 녹정기는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중원걸 봤지만 김영사에서 새번역 나오는대로 중원판은 걍 불쏘시개로 쓸 예정입니다. 아직 나오지도 않았지만 중원판보다 안좋기는 어려울 겁니다. 고려원판은 읽는 맛은 있지만 충실하지가 않습니다. 얼라시절에는 몰랐는데 몇군데 발췌해서 원문이랑 대질해보니 심심찮게 '누락'이 있습니다. 오역이야 실력의 문제지만 누락은 성의의 문제인데... 김영사판은 성의는 있습니다. 누락이 (제가 발췌대질한 범위 내에선) 없었어요. 읽는 맛도 나쁘지 않아요. 그래도 여전히 오역이 제법 있어서 아쉽습니다. 기타등등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해적판들은 오역이 심합니다. 벽혈검의 경우 들녘에서 나온 걸 봤는데 어처구니없게도 拳(권: 주먹)을 모조리 擧(거: 들다)로 읽어놨더군요. 신권무적을 신거무적으로, 오행권을 오행거로, 권법을 거법으로... 권법을 권법이라고 읽을 줄도 모르면서 무협지를 번역하겠다고 나서다니, 속하는 그 용기에 탄복했습니다. 하지만 오역이 무역보다 낫다고, 그냥저냥 돈주고 사서 읽을 가치는 있습니다. 소설속에서 인용된 논어구절 번역이 잘못되었다고해서 사조영웅전의 재미가 10% 깎이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요. '원본은 더 쩔겠지...' 상상하면서 읽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출간 순서대로 리뷰 갑니다. [3]. 서검은구록 김대협의 데뷔작입니다. 영웅협사들이 우루루 나와서 와장창하는 수호전류 군협물입니다. 무명신인이 이정도 작품을 써냈다면 혀를 내두르며 찬탄하겠지만 김대협의 작품은 김대협의 작품끼리 비교가 되니까... 중기~후기의 걸작들과 비교하면 역시 손색이 있습니다. 2부리그에선 부동의 주전인데 1부리그에선 벤치워머 ㅠㅠ 메인 히로인을 꽤 선명하게 잘 그려냈습니다. 김대협 소설 15편을 읽는 동안 주요 여성 인물만 100명 넘게 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가장 여운이 남은 게 본작의 향향공주였습니다. 훗날 본작을 다시 읽게 된다면 향향공주 등장시점부터 읽을 듯. 이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비호외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어쨌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4]. 벽혈검 김대협의 차기작입니다. 주인공 원승지는 애매따리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반면에 남들 입으로만 회자되는 [금사랑군]은 넘모나 선명하고 매력적입니다. 원승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금사랑군의 제자(애매하긴 하지만 어쨌든)가 되어 그가 남긴 모든 업보를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계승합니다. 어떻게보면 원승지는 걍 금사랑군의 인생2회차 아바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철수가 이명박 아바타가 되는 것처럼 현시점의 주인공이 과거시점의 주요 인물의 인생2회차 아바타가 되어 과거의 은원을 (개고생해가며) 풀어낸다는 식의 작법은 김대협이 두고두고 잘 써먹는 필살기가 됩니다. 벽혈검에선 좀 노골적으로 써먹었다면 나중 작품에선 참 은근하게 보일듯말듯 써먹는다는 게 차이점. 김용소설의 여주는 한 번 쯤은 남장을 하는 게 관례인데요, 벽혈검에서는 특히 심합니다.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남장 푸는 꼴을 못 본 데다가 심지어 남장한 여주에게 다른 여자가 홀랑 반하기까지 합니다. 김대협에겐 어쩌면 보이프렌드룩 페티시가.... 제가 읽은 들녘판('영웅도') 번역이 엉망이면서도 또 괜찮습니다. 권법을 죄다 거법으로 읽는 것처럼 한심하기 짝이없는 오역들이야 물론 용서하기 어렵지만 주인공들의 대화를 서정적으로 잘 살려낸 문장구사력은 인정해줘야 합니다. 녹정기와 아주 많이 연결됩니다. 벽혈검만 놓고보면 읽어도 그만 안읽어도 그만이지만, 녹정기를 15%정도 더 재밌게 보려면 벽혈검을 먼저 보시는 게 좋습니다. [5]. 사조영웅전 무척 뚜렷한 캐릭터들이 사방팔방에서 뛰쳐나와서 서로 섞이고 부딪히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캐릭터 버라이어티 쇼. 별로 더 보탤 말이 없습니다. 세 번째 작품인데 이런 걸 써낸 걸 보면 김대협은 참 잘난놈입니다. 김용 월드로 들어가는 입문서로 제격입니다. 곽정이 황용 만나는 시점까지만 진행하시면 그 다음부턴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녹정기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됩니다. [6]. 신조협려 중딩때 같이 김용 보던 친구들은 신조협려가 짱이고 양과 소용녀가 짱이라고 하는데 저만 홀로 꿋꿋이 아냐 사조영웅전이 짱이라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신조협려에 대해 알게모르게 악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고 감정 다 풀었습니다. 아주 잘썼네요. 중딩땐 이게 순애보 로맨스 하이틴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사 다시보니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네요. 중국 윤리학의 영원한 난제 중 하나는 '아빠가 천하의 개썅놈이면 효도는 어떻게?'입니다. 양과는 이 난제의 살아있는 표본입니다. 그래서 소설 끝날 때까지 괴로워서 몸부림치다가 막판에 가서 아빠 묘비 세워주면서 가슴 속의 모순을 해결하고 해피엔딩으로 고고씽 합니다.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주변 어른들을 애먹이는 모습에서 녹정기의 위소보가 겹쳐보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차이가 있다면 양과는 야망이 큰 남자여서 그런 사실을 괴로워하지만 위소보는 뭐....ㅎㅎ 나중에 썸타는 여주들 숫자를 봐도 양과가 위소보 못지 않고, 썸타면서 추파던지고 희롱하는 패턴도 또 위소보랑 겹칩니다. 위소보가 방이를 마누라라고 호칭하면서 히죽히죽 늑골을 접골해주는 장면은 양과가 육무쌍을 마누라라고 호칭하면서 히죽히죽 늑골을 접골해주는 장면과 아주 흡사합니다. 김대협 본인도 가끔 양과와 위소보를 나란히 놓고 언급한 걸 보면 빼박 양과는 위소보의 프로토타입인 셈입니다. [7]. 설산비호 굉장한 여운을 남기는 단편입니다. 액자식 구성인데 액자 밖도 액자 안도 모두 절묘합니다. 격투씬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독특한 결말 덕분에 단편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 [8]. 비호외전 설산비호의 프리퀄입니다. 본편처럼 재밌지 않은데 분량은 본편의 세 배입니다. 차라리 본편을 세 배 길게 써주고 프리퀄을 단편처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니면 아예 합쳐서 사조영웅전급 장편을 만들던가... 여러모로 애매따리한 작품인데 설산비호를 읽으면 또 이걸 안 읽을 수가 없어서 결국 다 읽게 됨 ㅠ.ㅠ [9]. 의천도룡기 신조협려가 '아빠가 개썅놈'이어서 괴로운 이야기라면 의천도룡기는 '엄마가 개썅년'이어서 괴로운 이야기입니다. 열 살 짜리 남자애가 이리저리 떠돌며 고생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엄마가 애비를 망친 개썅년이라고하는데 애는 뭐 할 말이 없으니까 정말 그런갑다 싶어서 반박을 못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이게 여간 괴로운 게 아닙니다. 이 괴로움을 김대협은 '내상'으로 표현합니다. 장무기는 엄마아빠가 자결하는 순간 이 내상을 입고 약 10여년을 죽을 고생을 합니다. 20여세가 되어서 내상이 치유되었다는 건 성인이 되고서야 마음 속에서 엄마를 용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내상이 치유되자마자 (즉, 엄마를 용서하고나서야) 곧바로 '우연히' 외갓집 친척들을 만나게 되고 얼렁뚱땅 외갓집의 가업을 계승하게 된다는 것 (명교 가입)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벽혈검에서 원승지가 금사랑군에 빙의해서 인생 2회차를 사는 것처럼 의천도룡기에서는 장무기가 사손의 인생2회차 노릇을 합니다. 장무기가 태어나자마자 사손에게 입양되어 예전에 죽은 사손의 친아들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지요. 사손이 금강경을 듣고 원수를 사랑하게되며 은원의 고리에서 벗어난 것처럼 장무기는 능가경(=구양진경)을 읽고 엄마를 용서하고 내상을 치유합니다. 여러모로 장무기는 사손의 꿈, 사손의 구운몽, 사손의 판타지인 셈입니다. 본격 발 페티시 소설. 장무기가 초면에 조민의 발을 잡고 희롱하더니 과연 막판에 조민이랑 이어집니다. 양과가 어려서부터 소용녀 발을 잡고 만지작거리더니 끝내 변심하지 않고 소용녀와 해피엔딩 한 걸 보면 김대협은 역시 발페티시.... 'ㅅ';; 조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김대협의 여주들은 크게 백치선녀형(객사려, 소용녀, 왕어언, 이문수 등), 똘똘악녀형 (황용, 조민, 임영영, 청청 등), 시녀형(소소, 쌍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기 작품군에선 선녀형과 악녀형이 고루 나오는데 후기로 갈수록 시녀형에 힘을 줍니다. 하지만 작가의 취향과는 별개로 대중적 인기는 악녀형 쪽이 높습니다. 청청이 프로토타입 악녀, 황용이 아키타입 악녀라면 조민은 악녀형의 완성판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김용월드 랭킹놀이를 할 때 의천도룡기가 우승하는 일은 없지만 여주랭킹에선 조민이 영원한 우승후보지요. 임영영은 후술하겠지만 탈(脫)-악녀형. 이쯤에서 김용의 여성관을 좀 언급할 필요가 있겠네여. 가부장수꼴이긴 한데...이게... 그 예전에 홍차넷에서 어떤 분이 말씀해주신 이른바 '여신숭배형' 가부장수꼴입니다. 레이디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손등에 무와~무와~ 뽀뽀하면서 평생 섬기고 지켜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피학성향 기사도 마초이스트 기질이 있습니다. 이건 여주가 선녀형이거나 (소용녀) 악녀형이거나 (조민) 공히 드러나는데요, 시녀형 (쌍아 등등)의 경우는 조금 안맞지요. 김용은 대략 40대 후반을 넘어가면서 여신숭배취향에서 시녀취향으로 전향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전향에 즈음하여 본인도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을 하구요. 세 번째 부인이 10대...본인은 40대... 아아... 또다른 주목 포인트는 '소림사'의 등장입니다. 무학의 태두니 맹주니 하면서 어지간한 무협지에서 소림사 빠지는 일이 거의 없는데 김대협은 놀랍게도 신조협려 후반부에나 가서야 소림사 이야기를 슬쩍 흘릴 뿐 사조영웅전에선 코빼기도 언급을 안합니다. 원한을 해소하고 용서하는 엔딩을 내려면 불가에 귀의하는 게 필수적인데, 그렇게 하려면 소림사가 필요하지요. 사조영웅전에서 일등대사와 구천인을 가지고 연습해본 불교엔딩을 의천도룡기에서 소림사엔딩으로 개조하고, 이게 나중에 천룡팔부의 무명승 엔딩이 됩니다. [10]. 원앙도 애매따리합니다. 천룡팔부 분위기를 조금 냅니다. [11]. 백마소서풍 김대협은 전반적으로 장편을 잘 쓴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똑' 떨어지는 엔딩 맛은 확실히 단편이 낫습니다. 설산비호의 엔딩도 그렇고 백마소서풍의 엔딩도 그렇고 뒤에 이야기할 협객행의 엔딩도 그렇고... 연재를 질질 끌어야한다는 압박감이 없어서 그런지 깔끔하니 좋습니다. 드물게도 여성이 주인공인데 인물 묘사를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이런 거 보면 여성 주연으로 장편도 하나 써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했네요;; [12]. 연성결 이것도 중단편인데 엔딩이 좋습니다.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이게 실화기반이라니 무섭. [13]. 천룡팔부 신수판 (최종개정판)에서 단예 파트 결말이 크게 바뀌는데 전 작가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소설 속 여성들이 죄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90살 할망구가 되도록 사생결단으로 연적과 싸우는 마당에 왕어언만 첫사랑인 모용복을 깔끔하게 접고 단예에게 시집간다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요. 그래서 소설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왕어언의 변심 씬이 가장 어색합니다. 구판 수정판 신수판을 다 읽어봤는데 아니나다를까 김대협이 이부분을 손을 많이 봤더군요. 손을 여러차례 봐도 여전히 납득이 갈만큼 잘 쓰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 깔끔하게 신수판에선 왕어언과 모용복을 맺어줘버립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잘 쓰긴 했는데... 아... 이 애매한 뒷맛이란.... 안죽여도 될 사람을 막 죽이고 말야.... 왕어언을 스토킹하는 단예 캐릭터는 후에 아가를 스토킹하는 위소보 캐릭터로 진화합니다. 단예의 능파미보와 위소보의 신행백변도 묘하게 겹쳐지지요. 중원문화사판은 개쓰레기 불쏘시개입니다. 김영사판 나오면 사서 보십시오. [14]. 협객행 이건 스포 없이 봐야 재밌습니다. 쟝르는 개그물(...)인데, 신필의 휘호가 아깝지 않게 잘 썼습니다. [15]. 소오강호 김용소설은 자주 강호(무림세계)와 강산(실제 역사세계)을 섞어쓰는데, 소오강호에서는 일부러 작심하고 강산의 세계를 쳐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작중에 묘사되는 강호의 완결성이 올라가고, 묘사된 가상공간의 완결성은 다시 현실을 풍자하고 은유하고 반영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나의 완결된 공간(강호)이 다른 하나의 완결된 공간 (독자가 사는 현실세계)을 1:1로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악불군' 같은 말은 이미 중화권에선 심심찮게 쓰이는 일반명사입니다. 야이 악불군아 ㅎㅎ 원승지가 금사랑군의 아바타였고 장무기가 사손의 아바타였다면 영호충과 임영영은 각각 유정풍과 곡양의 아바타입니다. 여당과 야당의 핵심인사 두 사람 (유정풍, 곡양)이 남긴 소오강호지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역시 여당과 야당의 핵심 중의 핵심 인물이 나서서 다시 한 번 정파를 초월하는 영원한 결합을 해야만 했던 것. 소오강호지곡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소오강호지곡으로 끝나면서 서사가 완결된 느낌을 잘 전달해줍니다. 김대협의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소오강호는 유달리 이름장난질이 심합니다. 유"정"풍(劉正風)과 "곡"양(曲洋)은 딱봐도 한 사람은 여당 다른 사람은 야당이죠. 악불군의 이름은 논어에서 따온 게 거의 확실합니다. 논어 위령공 21장에 "군자는 자뻑은 해도 싸우진 않고 그룹은 있어도 창당은 안함ㅇㅇ(子曰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라는 말이 있는데, 이걸 데칼코마니하면 소인은 싸우되 자뻑하지 않고 창당은 하되 그룹은 없다(不群: 불군)가 되지요. 악불군은 이름부터가 '그룹은 없다'이니 걍 소인배였던 것. 영호충(令狐沖)의 "충"은 비어있다는 뜻이고 임영영(任盈盈)의 "영"은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도덕경 45장의 "지극히 가득찬 것은 마치 빈 것과 같아 써도 써도 끝이 없다(大盈若沖,其用不窮)"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게 거의 분명합니다. 두 사람은 노자가 그러한 것처럼 천성이 야망이 없어서 언제나 은거를 꿈꾸지요. 이름을 잘지어서 그런가 유정풍과 곡양이 실패한 금분세수-->은거 테크트리를 영호충과 임영영은 기어코 해냅니다. 김대협의 소설작법 필살기 중 하나는 비슷한 처지의 두 인물을 내세워서 서로 다른 선택지를 고르게 하고 판연히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겁니다. 주인공이 '가지 않은 길'을 갔을 경우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기어코 소설 내에서 다른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거지요. 사조영웅전에서는 곽정과 양강이 한 쌍이 되고 의천도룡기에서는 송청서가 장무기와 한 쌍이 되고 소오강호에서는 임평지가 영호충과 한 쌍이 됩니다. 화산파에 남아서 악영산과 결혼하고 벽사검법을 수련하며 악불군을 도와 오악검파를 합병하는 평행세계의 영호충이 바로 임평지인 셈입니다. 소오강호지곡 곡보와 벽사검보 역시 한 쌍의 대립항입니다. 한 쪽은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켜줄 절대반지인데 다른 한 쪽은 모든 정치적 야망이 소멸되는 은퇴반지입니다. 영호충이 소유한 소오강호지곡 곡보를 본 무림인들이 그걸 벽사검보로 착각하고 영호충을 개 패듯이 패는 장면에서 김대협은 이 두 서책의 성격을 더없이 뚜렷하게 대조시키지요. 제가 생각하는 유일한 약점은 임영영의 애매따리한 캐릭터성입니다. 엄연히 청청-황용-조민을 잇는 매운맛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순합니다. 악녀형은 역시 조민처럼 연적들을 쉬바 죽일 듯이 미워해야 매콤하니 캐릭터가 살아나는 법인데 임영영은 애정싸움에서 넘모 데면데면함... 어떻게 보면 조민에다가 소용녀를 세 스푼 정도 섞은 맛인데 이게 희석된 신라면처럼 애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작품의 완성도는 소오강호가 의천도룡기보다 낫지만 여주랭킹 투표하면 임영영이 조민 이기기 어려운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튼 갓띵작입니다. 김영사에서 2018년에 새로 내놓은 신수판이 괜찮습니다. 저는 바로 삼 ㅇㅇ [16]. 녹정기 예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스님이 젊었을 적에 패기로 보조국사 지눌을 욕했답니다. 아니 다들 지눌지눌하는데 내가 보니까 순 엉터리드만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물고빨고 난리야.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 수양이 깊어진 뒤에 다시 지눌의 저작을 읽어보니까 일언반구도 허투루 쓴 곳이 없는 킹갓제너럴띵작이지 뭡니까? 그제서야 젊은 날의 언행을 반성하고 매일 아침 지눌의 초상에 절하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저는 젊었을 적에 녹정기를 보고 아니 슈바 이건 무협지도 아니고 걍 하렘뽕빨물 아냐? 이게 뭐가 대단한 거라고 김용 최고의 작품이라고 물고빨고 난리야.....라고 했었는데 오늘부터 매일 아침 정화수 한 잔 떠놓고 김대협에게 사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녹정기 안에 서유기가 있고, 삼국연의가 있고, 수호전이 있고, 금병매가 있고, 홍루몽이 있는데 그렇다고 서유기인 것도 아니고 삼국연의인 것도 아니고 수호전인 것도 아니고 금병매인 것도 아니고 홍루몽인 것도 아닙니다. 김용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훌륭합니다. 하지만 동사 서독 남제 북개가 모두 왕중양에게 경의를 표한 것처럼 다른 작품들은 녹정기 앞에서 모자 벗고 공손하게 인사해야 합니다. 신조협려의 독고구검으로 비유해봅시다. 보검: 강함과 사나움이 무시무시하여 아무리 사나운 것이라도 잘리지 않는 것이 없다. 스무살 이전에 하삭(河朔, 황하 이북)의 군웅과 겨룰때 사용하였다. 이 검으로 많은 영웅과 싸워 이겼다. 녹정기 이전의 김용 소설들은 자미연검, 현철중검, 목검의 단계라고 할 만합니다. 이정도로도 강호를 제패하는 불패의 검성이요 무림지존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녹정기는 무공도 없고 협의도 없이 무협(武俠)지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무검승유검(無劍勝有劍)이요 무초승유초(無招勝有招)의 경지입니다. 뭐 그렇다고 무결점의 총사령관 같은 작품은 아니고.... 러시아 에피소드라든가, 삼번의난 이후 마지막 몇장은 마치 드래곤볼 마인부우편처럼 좀 애매따리한 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결점정도야 뭐...'ㅅ' 홍루몽도 가보옥이 결혼한 이후로 애매따리하니까 얼추 서로 비긴 걸로 하지요. 여러모로 위소보는 강희제의 프록시, 강희제의 페르소나, 강희제의 부캐, 어둠의 강희제입니다. 강희제가 직접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일이 있으면 위소보를 보내고 일이 잘 성사되면 대리만족을 느끼지요. 자기는 청나라 시스템 상에서 이미 만렙이니까 더이상 렙업하는 재미가 없으니 위소보를 대신 키워서 쪼렙부터 차근차근 왕공후작까지 승급시키며 꿀잼을 느낍니다. 곽정-양강, 영호충-임평지, 장무기-송청서 구도를 살짝 비틀어서 여기서도 써먹은 것. 한걸음 더 나아가 기녀원과 황궁 역시 별 차이가 없습니다. 황궁은 좀 큰 기녀원이고 기녀원은 작은 황궁입니다. 기녀원은 기녀들이 손님들에게 웃음을 팔고 은자를 받는 곳이고 황궁은 신료들이 황제에게 웃음을 팔고 은자를 받는 곳입니다. 위소보는 애비가 누군지 모르는 기녀원의 후레자식이고 강희제는 애미가 누군지 모르는 황궁의 후레자식이니 위소보나 강희제나 쎔쎔인 것입니다. 이 유비는 소설 마지막까지 계속됩니다. 위소보가 자금성 생활을 더이상 못해먹겠으니까 여춘원(엄마가 일하는 기녀원)으로 은퇴할 생각을 품습니다. 때마침 고염무 등등이 나타나서 위소보한테 황제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데 잠시 후엔 엄마가 위소보를 보고 이놈이 기녀원을 열면 돈 한 번 크게 벌겠구나하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위소보는 결국 기녀원을 운영하든 황궁을 운영하든 뭔가를 운영할 사람이지만 따지고보면 황궁이나 기녀원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ㅋ 아무튼 녹정기는 한 쌍의 후레자식 콤비가 황궁과 기녀원, 강산(江山)과 강호(江湖)를 넘나들며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휘젓는 거대한 의미와 상징의 소용돌이입니다. x를 눌러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중원문화사판 녹정기는....음... 번역이 졸라 마음에 안듭니다. 김영사에서 곧 정발판을 내놓는다고 하니까 기대해봅니다. [17]. 월녀검 안봐도됨미다. -끗-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3-01 22:1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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