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7/14 01:26:08
Name   하얀
Subject   나무를 만나러 가는 여행
오늘 일본의 1000년된 나무가 폭우로 쓰러졌다길래 깜짝 놀랐어요. 제가 혼자서 두번이나 만나러 간 그 나무인줄 알고요. 다행히..라고하긴 좀 미안하지만, 쓰러진 나무는 미즈나가시의 나무고, 제가 보러간 나무는 다케오의 큰 녹나무예요.

처음 2014년 겨울 큐슈에 갔을 때 이 나무를 보러간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요. 3000년을 산 나무가 있다길래 보고싶었어요. 저는 그 전에도 가끔 여행지에서 오래된 나무가 있다하면 일부러 들려서 보곤 했지만, 해외에서 그런 적은 없었어요.

현지에서 가져온 책을 읽다가 알게 되서 가자고 결정했기에, 동선에 넣으려면 새벽 일찍 나와 기차를 여러번 갈아타고 세시간 정도 가야 했어요. 무리한 일정이지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곳에 가야만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잠이 많은 제가 깜깜한 새벽에 출발해 이런 기차, 저런 기차...그러니까 빠르고 멋진 기차, 보통 기차, 탈탈거리는 작은 기차를 갈아타고 도착했어요. 역은 이제 아침이라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어요. 제가 만난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상냥했는데 이 곳에서도 웃으며 아침인사를 건네고 저도 응답했어요. 역사에 짐을 맡기고 지도를 챙겨서 나무를 보러 갔어요. 나무는 역에서 좀 거리가 있었는데 왜인지 전 기운이 넘쳤어요. 길가에 인접한 산사에도 사람은 없었어요. 산사 뒤를 돌아 대나무숲 오솔길을 쭉 걸어가면, 마침내 거대한 나무가 있었어요. 아침 햇살 속에 포근해 보이는 나무가요.





아무도 없고, 마치 제게 이야기를 하는 듯한 신비한 느낌이었어요. 동선에서 갑자기 튀어 멀리 돌아가야 하는 코스였지만, 그 곳에 간 것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어요. 닿아야 할 곳에 닿았으니까요.



그리고 유난히 마음이 추웠던 재작년 겨울, 전 해가 바뀌어 2019년 1월 1일이 되는 순간을 이 나무가 있는 곳에서 맞이하고 싶었어요. 4년여 전에는 몇 시간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듬뿍들여 즐기고 오고자 했어요. 마침 이 동네에는 1200년된 오래된 온천도 있거든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온 것 같은 오래된 나무 욕탕이 있어요. 추위를 유난히 타고 온천을 정말 좋아하기에 1일 2온천을 다짐하고 갔지요. (그리고 야물딱지게 그 다짐을 지켰습니다!)

사가공향에 내려 버스를 타고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다케오온센역에 내렸어요. 호텔에 짐을 풀고, 모퉁이 사거리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도 다음날 아침에 나무를 만나러 갈 생각에 설레었어요. 4년 전 아침 햇살 속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어요. 아침이 되자 노천탕에서 목욕을 하고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나무를 보러 갔어요. 나무는 똑같이 그 자리에 있었어요. 안녕 큰 녹나무야~ 다시 보러 왔어.





나무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어요. 여전히 아침 햇살 속에 따뜻하게 절 맞아주는 것 같았지요.

나무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걸텐데 저는 고마웠어요. 그저 고마웠어요.

일본에 계속 비가 많이 온다는데 나무는 잘 있을까요. 일본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사가공항으로 가는 노선은 폐쇄되고 이제는 바이러스로 기약이 없지만,
언젠가, 나중에 다시 한번 만나러 가고 싶어요. 그 때는 혼자가 아니라 나무에게 소개시켜 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 때까지, 무사히.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7-28 21:3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48 문화/예술남자. 꿈. 노오력. 10 알료사 17/11/18 8639 22
    1104 기타남자 빅사이즈 인터넷 옷쇼핑(3XL이상부터)+그외인터넷쇼핑후기 27 흑마법사 21/07/12 8341 23
    1129 기타남자 곰타입의 옷배색에 관한 연구 43 흑마법사 21/09/15 8533 10
    11 체육/스포츠남성의 정력을 증강시키는 운동 69 스타-로드 15/06/05 43457 0
    1238 기타난임일기 26 하마소 22/09/19 4122 58
    1303 일상/생각난임로그 part1 49 요미 23/05/21 4302 69
    602 정치/사회난민에 대햐여 18 DrCuddy 18/03/15 6698 14
    537 일상/생각낙오의 경험 10 二ッキョウ니쿄 17/10/30 5995 12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269 11
    1004 철학/종교나이롱 신자가 써보는 비대면예배에 대한 단상 14 T.Robin 20/08/31 5089 6
    481 여행나의 호텔 기행기 - Intro & 국내편 (1) 16 Dr.Pepper 17/07/25 6585 6
    1332 일상/생각나의 은전, 한 장. 6 심해냉장고 23/09/30 2827 24
    639 일상/생각나의 사춘기에게 6 새벽유성 18/05/30 6740 25
    466 의료/건강나의 갑상선암 투병기2 - 부제: 끝 없는 기다림, 그리고 포폴짱은 넘모 대단해. 25 고라파덕 17/07/05 6054 15
    440 의료/건강나의 갑상선암 투병기 -부제: 워보이와 나 37 고라파덕 17/06/01 6356 20
    983 여행나무를 만나러 가는 여행 3 하얀 20/07/14 4297 11
    1212 일상/생각나머지는 운이니까 16 카르스 22/06/05 4617 37
    331 일상/생각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 12 SCV 16/12/27 6584 10
    525 기타나라가 위기인데 연휴가 길어서 큰일이야 26 알료사 17/10/08 7054 25
    424 일상/생각나도 친구들이 있다. 3 tannenbaum 17/05/03 4913 14
    1059 일상/생각나도 누군가에겐 금수저였구나 15 私律 21/02/06 6988 72
    641 정치/사회나도 노동법 알고 알바해서 인생의 좋은 경험 한번 얻어보자! 9 우주최강귀욤섹시 18/06/02 7309 25
    556 일상/생각나도 결국 이기적인 인간 2 쉬군 17/12/02 6197 13
    916 창작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5 작고 둥근 좋은 날 20/01/29 6591 24
    681 일상/생각나는 술이 싫다 6 nickyo 18/08/18 6260 28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