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8/06 17:42:37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96
Subject   설거지 하면서 세탁기 돌려놓지 말자
전산을 업으로 삼다 보니 습관적으로 최적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코드를 이렇게 바꾸면 속도가 몇 퍼센트 빨라질까에서부터 시작해 몇 시 몇 분에 집에서 나가서 몇 번 버스를 몇 분 동안 기다리다가 그래도 버스가 안 오면 전철을 타고 가는 것이 소요 시간의 기대값을 가장 짧게 만들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최적화라는 주제는 항상 제 머릿속에 박혀 있습니다. 어쩌면 벽(癖)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설거지를 할 때면 종종 동시에 세탁기를 돌려 놓곤 했습니다. 세탁기는 무조건 한 시간동안 돌아야 하니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세탁기를 돌려 놓으면 설거지가 끝날 때 즈음에 세탁도 얼추 끝날 거고, 그러면 시간 낭비 없이 바로 빨래를 널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걸 전산 용어로는 파이프라이닝(pipelining) 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방식이 시간의 양은 최적화해주지만 시간의 질은 최적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습니다.

설거지를 마쳐갈 때 즈음이면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면서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도 한 번 꺼내서 뒤적거려 보게 되고, 아니면 노래라도 한 곡 듣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한 10분 정도 잠깐 누워서 눈을 감고 조용히 있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때맞춰 창 밖에서 짹짹거리는 새 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빨래도 딱 맞춰서 끝나 있으니 커피도 못 마시고, 책도 못 펼쳐 보고, 노래도 못 듣고, 잠깐 누워있거나 새 소리를 듣는 것은 더더욱 못한 채 바로 빨래를 널어야 합니다. 그렇게 빨래를 다 널고 제습기까지 틀고 나면 마치 내일의 죠의 마지막 장면처럼 털썩 주저앉아서 "하얗게 불태웠어..." 라고 중얼거리게 됩니다. 시간이 많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 시간은 제가 힘이 다 빠진 채 널부러져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시간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전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최적화하면 필연적으로 CPU 사용량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스마트폰이 뜨끈뜨끈해지고 배터리가 빨리 닳게, '광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레닌은 양이 곧 질이라고 했다지만 그 말은 적어도 설거지와 빨래 후의 쉬는 시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다 된 빨래가 세탁기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지만 무시한 채 이렇게 조금이라도 쉬려고 앉아 있으니 새 글 하나를 쓸 수 있지 않았나요. 자, 이제는 설거지 할 때는 설거지만, 빨래 할 때는 빨래만 합시다. 그 사이의 비는 시간은 최적화해서 없애버려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기지개라도 키고 커피라도 한 잔 내려 마셔야 하는 생명의 시간입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8-15 10:42)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49
  • ㅋㅋㅋ
  • 요즘 날씨에 빨래를 게을리널면 남새가 납니다 선생님... 어서 가시지요
  • 너무 멋진 글!잘 읽었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 기타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8 다람쥐 24/11/07 846 31
1417 기타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629 31
1416 기타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907 20
1415 기타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737 18
1414 기타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934 36
1413 기타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549 40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854 16
1411 기타『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945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220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77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13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2043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79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7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41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909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687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84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89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62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81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30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79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51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52 29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