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08/12 18:51:03
Name   ikuk
Subject   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올 초에 가입 1주년이 되었을 때 즘에 이런 글을 올리려고 했었는데, 이제서야 때가 와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IT기업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2월에 코로나 사태 이후로, 저는 단 한번도 회사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팀장의 허가가 있는 사람에 한해 '리모트 근무'가 가능한 지침을 내렸는데, 저희 팀은 바로 전원이 풀 리모트로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반년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눈에 보이는 커뮤니케이션에 더 신경을 쓰게 됐고, 보고해야 할 내용이 늘었고, 외부 조직에 공개할 퍼포먼스 체크를 굳이 정리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제가 이렇게 안전하게, 그리고 페이에 영향없이 일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각 부서 리모트 근무자의 집중적인 퍼포먼스 체크가 몇달간 지속되었습니다.
영업 직원들이나 유명한 야근몬들도 그 동안의 퍼포먼스가 여실히 드러나자 필요없는 야근을 할 구실이 줄었고, 잔업시간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회사는 '관리부서 외 전체 풀 리모트'를 선언하고, 사무실을 축소하고 다른 곳으로 본사를 이동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2월에 따로 신청을 했기 때문에, 차로 제 짐을 싹다 실어왔습니다만,
나머지 직원들은 회사가 운송업체와 계약해서 모든 짐을 집으로 포장배송했다고 합니다.
월세 뿐만아니라 매달 천단위로 날아가던 사내용 클라우드 비용도 엄청나게 줄였습니다. 집에 회사 pc가 생기니 가상환경이 필요 없어졌습니다.

전원이 풀 리모트로 전환하자, 아이러니하게도 보안 사고가 훨씬 줄었고 코드 리뷰 횟수가 늘었습니다.
'사내ip'라는 마법의 공간을 벗어나서야 전 서비스의 보안을 재정비할 수 있더라고요.

물론 사이드 이펙트도 많았습니다.
적응을 못한 사람도 많았고, 우리 처지로 인해 고객사와 협의해야 할 일들이 쏟아지니 피곤한게 컸습니다.
허나 회사라는게 원래 갈 사람 가고 올 사람 오는 곳이니 그런 변수를 제외하고 시스템적인 변화만 보자면, 극적인 체질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사무실이 아직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횡한 분위기였으리라 상상합니다만...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향후 회사는 엄청난 월세를 아낄 수 있고, 풀리모트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더 큰 풀의 엔지니어 채용이 가능해지겠죠.
사원용 피트니스, 식당 등등의 곳들도 비용이 전부 삭감됐다고 합니다. (바리스타 정규직으로 오신분도 있었는데...)

뉴 오더, 포스트 코로나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격변을 피부로 느껴보니,
시대의 변화는 누가 하고싶다고 해서 되는게 아님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저는 늦봄부터 준비한 이직이 일단락되어, 9월1일부터 새 회사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이 회사가 싫은건 아니고... 더 크고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는 회사를 찾았는데, 어차피 풀리모트라 집에서 하는건 같으니 사인하게 됐습니다.

해당 회사도 이 대격변이후의 대처였는지, 정규 풀 리모트직으로 채용되었습니다.
특별할 건 없고, 회사에 제 자리가 없는 대신 프리스페이스 있는 좌석과 모니터를 쓸 수 있는 입석식 정규직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제 시니어 달고 리딩 해야하는데, 얼굴을 한두번이라도 더 들이미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옛날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 곳은 이미 수백명이 풀 리모트로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제가 나가봤자 마주칠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요.
원하는 스펙의 PC를 회사에 신청해 집으로 우송받았는데, 관리팀 입사 오리엔테이션도 리모트로 한다니 많이 바뀌었구나 싶습니다.

코로나가 터지든, 불지옥으로 땅이 갈라지든 회사는 오늘도 내일도 돈을 벌어야 하니, 새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구내식당에서 삼시세끼 금가루 뿌린 밥을 주고 피트니스 회원권을 쥐어줘봤자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아무 의미가 없으니...
이 대격변에 발맞춰, 많은 회사들이 풀 리모트 포지션에 재밌는 복지들을 제안하더군요.

저도 여러 특이한 복지를 약속받았습니다.
너무 자세하게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코어 타임 없는 플렉스근무와 곱절 이상 늘어난 휴가,
그리고 각종 활동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아직 중구난방인데도 이 정도라니...

체계가 생기면 더 근무환경이 나아질 것 같아, 다음 이직이 조금 더 기대되기도 했습니다.
회사가 억만금을 아껴도 제 페이는 제 실력에 비례하게 오르는게 조금 슬프긴 합니다만...
자기네들도 해주던건 안해주는 대신 페이 더 못줄거면, 더 재밌는 복지를 많이 생각해내야겠죠.




돈을 더 받고,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선 일반 이직과 다를바 없습니다만, 이번 이직 활동을 통해 깨달은 것은
'아 내가 생각보다 더 인도어파였구나' 라는 점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게 싫거나 피하는 성격도 아니고, 술자리도 좋아합니다만
주변사람들이 집콕스트레스로 좀쑤셔하고, 어디 나가지 못해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며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정말 하나도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도 별 상관없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 삶의 방식을 재검토하는 기회가 되어서 매일 매일이 깨달음의 연속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뒹굴거리는게 싫어서 소파를 팔아버렸고,
'집에서는 집중 안돼' 같은 스테레오타입을 수십년만에 타파했습니다.
유튜브로 보고 생각만하던 레시피를 도전해보며 더 많은 요리를 해보게 됐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쉬는 공간이 아니게 되었으니, 길거리나 밖에 버리던 시간을 자연스레 챙겨쓰게 됐습니다.
다 쓰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이런걸 하려면 이런 도구와 장비가 필요하겠구나.'
'이걸 능숙하게 하려면 매일 한시간씩 반년정도는 해야겠다.'
'이걸 더 맛있게 먹으려면 내일은 이걸 넣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자잘하게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엔지니어로서의 제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다가 늙는게 좋을까까지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럼 이게 코로나로 인한 변화냐,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딱 1년 전, 저는 평균적으로 7~8시까지 일하다가 회사 사람들과 술한잔하고 집에 들어와 누워 자는 삶을 살았습니다.
소위 '사회생활'에 물들어 있었고, 일탈을 많이 꿈꿨습니다.
여행도 좋아하고, 모험도 좋아하기 때문에 회사를 내려놓은 뒤의 삶을 많이 망상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집에서 일을 하니, 일단 회사 스트레스라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줄어들었습니다.
되는일은 하고, 안되는 일은 왜 안되는지 글로 설명해두니 제 삶이 일에서 분리가 됩니다.

하루 평균 1시간에서 2시간정도를 회의에서 낭비하고나면 시간과 함께 '내가 왜 이걸 듣고 있어야 하지?'라는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리모트로 넘어오면서 '회의록 굳이 안쓰고 싶으니, 문서화해서 대화하자'가 기본이 되서, 개소리가 사전에 방지됩니다.
귀찮은 회의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인생의 낭비가 줄었습니다.
8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삶이 일에서 분리가 되니, 어떤 스킬이 필요하고 부족한지가 오히려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필요한 것은 공부하면 되겠구나를 느꼈습니다. 이걸 배웠을 때 제 삶에 어떤 영향이 끼치는지가 눈에 확 와닿았습니다.
이직을 성공한 것도 그런 공부의 연장선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 저는 이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마 수도권에서 매우 멀어질 것입니다.
'어디든 광랜만 있다면... 비슷하겠다'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산, 가능하다면 바다와 가까운 곳으로 가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내년에는 움직이지 않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풀 리모트로 평생 일하게 되었음을 확신하기에 이사는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연에 가까이 가고싶긴한데,
너무 그 삶을 모르기 때문에 워케이션으로 한 지역에서 한달 정도씩, 여러 지역에서 경험해볼 예정입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예상은 할 수 없지만,
코로나가 터지든, 불지옥으로 땅이 갈라지든 회사는 오늘도 내일도 돈을 벌어야 하니,
집에서 '퍼포먼스 문제없이 일해주는 노동력'을 마다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새로운 삶의 패턴에 저는 다행히도 '잘맞는 인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가 참 길었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타인을 향한 미움과 증오가 불장난처럼 쉽게 번지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에 지쳐가는건 시대적 필연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마음을 내려놨습니다.

소파가 없어지는 것 만으로도 제가 많이 바뀌었듯이,
앞으로 3-4년 정도 제 주변부터 정돈하는 시도를 많이 해보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게 해준게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리모트' 근무라고 답할 수 있으니,
이것도 코로나가 제게 끼친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고 재미없는 글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08-27 01:5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30
  • 재미있어요!
  • 멋있어요!


하루 평균 1시간에서 2시간정도를 회의에서 낭비하고나면 시간과 함께 '내가 왜 이걸 듣고 있어야 하지?'라는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리모트로 넘어오면서 '회의록 굳이 안쓰고 싶으니, 문서화해서 대화하자'가 기본이 되서, 개소리가 사전에 방지됩니다.
귀찮은 회의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인생의 낭비가 줄었습니다.
8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이 문단이 인상적이군요.

읽으면서 막연하게 외국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도권이라는 단어가.
좀 놀랍습니다.
3
비로소 없어지고 나서야 그 것이 스트레스였음을 깨달았다는 게 오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외국에도 수도권은 있읍니다 선생님!
2
역시 외국이군요. ㅎㅎㅎ
저희 회사도 계속 리모트중인데 저는 집에 애들 때문에 업무 환경 조성이 안되어서 출근하고 있습니다.
다다음주부터 재택근무 종료하고 다시 출근한다고 하네요.
길었던 리모트 기간이 끝난다니 섭섭합니다 ㅎㅎ

해보니 좋다는걸 많이 느껴서 인지 주중에 몇 일은 원하면 리모트로 일한다던지 하는 식의 제도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아이들이 있었다면 저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사를 하게 된다면 집에 사무실을 따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분하신 분이라 더 잘 어울리실 거예요
살면서 차분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조금 놀랐읍니다...
아마 반년간 집 모니터 앞에서 벽관하며 얻은 또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 그리 그리던데요
2
사이시옷(사이시옷)
아 선생님 저도 풀리모트 하고 싶습니다...
제주 아일랜드 오기 전 근무했던 곳이 일주일 한번 출근이었던 곳이라 지금은 좀이 쑤셔서 못견디겠어요...
풀리모트를 맛본 뒤 매일 출근한다면 출근길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선생님 회사에도 풀리모트가 하루빨리 도입되길 희망합니다!
제주도 너무 부럽습니다... 10년전에는 가서 살고싶은 곳이었어요. 그곳에서의 삶은 만족하시나요?
사이시옷(사이시옷)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더라구요.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1
역시... 그렇겠죠?
저도 보드는 산이든 바다든 다 좋아하는데, 좀 더 가까이서 즐기고 싶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제 친구는 사람이랑 못 만나서 우울증 비슷한 거 오던데...
저희 가족도 절반만 면역이 있었고, 나머지는 매우 힘들어 하셨습니다...
와우 진심으로 근무환경이 부럽네요.
it직의 특수성이 좀 크긴한거 같습니다 ㅎㅎ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53 일상/생각34살, 그 하루를 기억하며 8 사이시옷(사이시옷) 21/01/21 5340 30
1050 일상/생각자다 말고 일어나 쓰는 이야기 7 Schweigen 21/01/05 4804 23
1047 일상/생각열아홉, 그리고 스물셋 15 우리온 21/01/01 5996 44
1043 일상/생각어느 택배 노동자의 한탄 14 토비 20/12/26 5807 40
1040 일상/생각아이들을 싫어했던 나... 32 whenyouinRome... 20/12/15 5723 36
1033 일상/생각모 바 단골이 쓰는 사장이 싫어하는 이야기 6 머랭 20/11/26 6026 27
1032 일상/생각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7 아침커피 20/11/19 5821 21
1030 일상/생각아빠의 쉼 총량제 22 Cascade 20/11/13 5793 41
1028 일상/생각팬레터 썼다가 자택으로 초대받은 이야기 19 아침커피 20/11/06 6588 34
1027 일상/생각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고 4 아복아복 20/11/05 4566 12
1025 일상/생각미국 부동산 거래 검색 이야기 8 풀잎 20/10/30 5804 12
1015 일상/생각그렇게 똑같은 말 1 머랭 20/10/06 4858 17
1013 일상/생각나는 순혈 오리지날 코리안인가? 50 사이시옷(사이시옷) 20/10/05 6913 24
1008 일상/생각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15 에피타 20/09/23 5944 26
1007 일상/생각가난해야만하는 사람들 53 rustysaber 20/09/20 7136 25
1005 일상/생각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27 Schweigen 20/09/07 8006 70
1001 일상/생각타임라인에서 공부한 의료파업에 대한 생각정리 43 거소 20/08/25 9235 82
1000 일상/생각뉴스 안보고 1달 살아보기 결과 10 2020禁유튜브 20/08/18 6449 29
99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5467 30
993 일상/생각설거지 하면서 세탁기 돌려놓지 말자 24 아침커피 20/08/06 6429 49
987 일상/생각천하장사 고양이 3 아침커피 20/07/21 4729 9
986 일상/생각Kimchi Warrior의 탄생 7 이그나티우스 20/07/19 4832 8
985 일상/생각자기 객관화라는 덫 9 necessary evil 20/07/17 5501 17
984 일상/생각한 가족의 고집, 그리고 나의 고집에 대한 고백 자몽에이드 20/07/14 4906 9
980 일상/생각40대 부부의 9급 공무원 도전기 36 4월이야기 20/07/08 8006 5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