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1/06 13:38:29
Name   사이시옷
Subject   가습기를 닦다가
일주일에 한 번 집안에 있는 가습기를 청소합니다. 가습기 세 개를 나란히 모아 필터와 물통을 분리해 베이킹소다를 탄 물에 두서너 시간 담궈두었다가 물로 헹궈 하루정도 건조를 시키지요. 무척 번거롭습니다.

독립한 이후 귀찮다는 이유로 가습기 한 대도 제대로 돌리지 않았는데 세 대나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작년에 아들이 태어났거든요. 안방에 하나, 거실에 하나, 내 방에 하나. 천성이 게을러 청소를 싫어하는 탓에 몇 번의 구매 끝에 기화식 가습기에 정착했습니다. 매일 매일 청소를 하는 귀찮음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 대신 일주일에 한 번은 긴 시간 동안 청소를 해야 하죠. 담그고 헹구고 말리고 조립하고.

어제 물때가 뭍은 통 내부를 매직 블록으로 열심히 문지르고 있다가 '아.. 이런게 번거로워서 많은 엄마 아빠들이 가습기 살균제를 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무척 서글퍼졌습니다. 지금이 2020년이 아닌 2010년이라면, 가습기 살균제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저도 분명히 썼을 거에요. 그리고 무척 만족했겠죠. 앞으로 닥쳐올 불행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요.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제가 가습기 살균제 원료를 만들던 회사를 다녔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하던 부서는 화학 계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몰랐어요. 전혀 상관없는 사업부문이었기 때문에 사내에서 떠돌던 소문만 들을 수 있었죠. 하지만 같은 회사는 맞아요.

저에겐 첫 회사였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기도 했고 늘 윤리를 중시한다는 입사교육을 받아서인지 저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회사를 믿었어요. 우리 회사의 원료는 옥시의 것과 달라 안전하다는 소문이었는지 발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 같이 크고 윤리적인 회사가,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곳이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순진하고 어리석은 믿음이에요. 회사가 크다고, 윤리 경영을 앞에 내세운다고, 내가 속해 있다고 해서 모두 선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인데 말에요. 그 회사를 떠난지도 10년이 되어가고 있지만 지금도 마음의 짐이 남은 탓은 저의 어리석은 믿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겠지요.

문제의 살균제가 이슈가 되기 시작한지 10년이 훌쩍 넘은 2019년에서야 사실을 은폐하려 했던 회사 임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뉴스를 보고 느꼈어야 할 많은 감정들이 이제서야 문득 가습기를 닦다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는 2020년 1월입니다.



1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850 기타가슴에 내려앉는 시 모음 시리즈.jpg 1 김치찌개 15/12/23 8952 0
    10152 일상/생각가습기를 닦다가 2 사이시옷 20/01/06 6078 12
    13957 기타가시화 되는 AI 저작권 1 우연한봄 23/06/06 3710 0
    5578 영화가오갤2 보고 왔습니다 8 Raute 17/05/06 4839 0
    6383 문화/예술가을 인디공연 세종문화회관뒤뜰 2 naru 17/10/07 4467 3
    6494 문화/예술가을방학 콘서트 후기 22 나단 17/10/31 6834 4
    8185 육아/가정가을은 타는 가을 남자 이야기. 9 사나남편 18/09/08 6383 16
    10121 스포츠가을이횽이 그리핀 신임 대표로 돌아옵니다. 4 Groot 19/12/27 6430 0
    6591 정치가임기 여성 얘기나올때 마다 드는 생각 15 월화수목김사왈아 17/11/14 7110 0
    765 일상/생각가입 인사, 그리고 이별 이야기 주저리 17 줄리아 15/08/10 5795 0
    99 기타가입, 그리고 저의 푸념.. 10 Hook간다 15/05/30 5976 2
    2817 창작가입기념으로 올려봅니다 6 탐닉 16/05/15 5194 11
    8180 일상/생각가입하고 쓰는 첫글. 자유로운 머리에 8 꿈점 18/09/08 4982 0
    15508 일상/생각가입한지 몇시간만에 삭제당할만한 글을 올린점 반성합니다 3 로이드포저 25/06/09 1733 2
    10 기타가입했습니다!! 이럴때 아니면 가입 인사도 못쓰겠죠! 6 쉬군 15/05/29 10180 2
    21 기타가입했습니다. 5 뮤츠 15/05/29 8129 1
    32 기타가입했습니다. 2 노즈도르무 15/05/30 8917 0
    33 기타가입했습니다. 2 soul 15/05/30 9651 0
    267 기타가입했습니다. 안녕하세요! 5 Winter_SkaDi 15/06/08 7061 0
    11212 사회가장 맛있는 족발에서 살아있는 쥐가 나왔다고 합니다. 4 Leeka 20/12/11 4439 0
    8538 스포츠가장 압도적인 유럽 축구 리그는 어디였을까? 1 손금불산입 18/11/18 6405 1
    821 음악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가장 좋아하는 일음 한곡. 茶太 - かえりみち 2 하늘깃 15/08/20 4828 0
    15622 음악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가장 빈곤한 청춘, 한로로를 위하여 6 골든햄스 25/07/16 1916 13
    3580 꿀팁/강좌가전기기별 전기 소모량 9 Toby 16/08/25 7764 0
    12194 일상/생각가정법원에서 바라본 풍경들 6 shadowtaki 21/10/22 6047 28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