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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1/17 00:04:08 |
Name | 호라타래 |
Subject | 역사적 유물론과 행위자 연결망 이론(4) - 두 이론을 함께 생각하기 |
번역어는 레퍼런스를 찾기 힘들어 임의로 한 것들이 있어요. 발제 이후 수정하겠습니다 ㅠ_ㅠ 시간이 없어서 빠르게 번역하다보니 어색한 문장들이 보일거여요 ㅎㅎㅎㅎ 넘모 짱나는 건 원어를 병기하겠습니다. // ANT는 세 가지 원리에 기반을 두어요. 1) 중립성 원리(The Principle of Neutrality); 2) 일반대칭성 원리(The Principle of Generalized Symmetry); 3) 자유 연합 원리(The Principle of Free Association). 이러한 원리들은 일원론적 사고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여요. 하나, 모든 주장은 이해관계를 지닌다. 둘, 모든 주장은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될 필요가 있다. 셋, 어떠한 독립체도 과학적 탐구에서 선험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역사적 유물론은 상기한 원리들과 맞지 않아 보여요. 실제로, 역사적 유물론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ex: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중립성 원리를 거부했어요. 모든 지식이 이해관계들을 보호한다면, 중립적으로 남을 수 있는 게 없지 않겠어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ANT 같은 실용주의는 비대칭적 권력 관계를 무시하고, 젠더 맹목적(gender-blind) 시각을 지닌 것으로 비판 받아야 하지요. 일반대칭성원리는 인간과 비인간을 동일하게 취급한다고 비판 받았어요. 역사적 유물론(특히 인본주의적 맑시즘)은 힘(forces)과 생산관계를 분리하면서 생산 약식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참여하는 방식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인정하거든요. 역사적 유물론에서 볼 때 인간의 노동만이 잉여 가치(surplus value)를 발생시킬 수 있어요. 자유 연합 원리도 역사적 유물론이 강조하는 역사발전의 구조적 법칙과는 배치되어 보여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볼 때 연합된 모든 것이 중요하지는 않아요. 오직 역사적으로 입각한 / 정치 경제적인 / 사회 문화적인 / 그리고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 따라서 드러나는 것들만이 고려할 필요가 있거든요.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반대들이 ANT와 그 철학적 기반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발생한다고 주장해요. 하나, 중립성 원리에서 볼 때 모든 주장들이 이해관계를 지니기에, 우리는 이를 평등하게 취급해야 해요. 맑시즘에 능통한 사람이라면 잘 알 듯이, 이데올로기 개념은 격렬한 논쟁의 주장이 되고는 해요.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생각, 허위 의식, 이해관계(권력)의 표현, 과학에서 반대편에 있는 것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요. 중립성 원리에 중요한 것은 그 중 마지막 방식이에요. 만약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이데올로기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그 주장들을 과학적 탐구 속에 관여시킬 기회를 몰수하는 셈이에요. 동의를 서류에 저장(commit)하기 위해 서명하는 행위를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간주한다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서류에 서명한다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종이에 서명하기'가 약속의 기입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바라보지 못해요. 하지만 서류의 진위여부가 논쟁에 부쳐진다면 '종이에 서명하기'의 역할은 중요해지지요. 정확하게 이러한 논쟁은 과학적 이해관계와 맞물려요. 과학적 이해관계는 논쟁을 정당하게 해결하기 위해 비이데올로기적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하고요. 이데올로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비준(authentification) 과정은 완전히 놓치게 되지요. ANT가 이데올로기와 과학적 탐구를 구분하는 걸 기초에 깔고 있어 권력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비판과 달리, ANT 학자들은 그 반대 입장을 취해요. 이러한 분리를 전제해야지만 권력관계를 제대로 볼 수 있다고요. 둘, 일반대칭성원리는 인간과 비인간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고, 인간과 비인간은 다르며 그렇기에 동일 선상에서(in equal term) 분석되고, 기술되어야만 한다고 봐요. 일반대칭성 원리를 비판하는 이들은 침팬지, 돌고래, 로봇 같은 비인간들이 인간보다는 돌과 더 비슷하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보여요. 이 원리는 사회과학이 타당한 모든 차이들을 사회과학에서 인식(appreciate)할 수 있도록 해요. 만약 특정 현상을 탐구하기 위한 데이터를 수집/생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모든 가능한 참여자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형성되고 있는 차이들을 잡아내기란(establish differences being made) 불가능할 거예요. 도나 해러웨이는 심리학적, 인류학적 환원주의에서 기인한 인간중심적 투사를, 유인원의 행동에 적용하는 사례를 보여줘요. 하지만, 유인원 행동학적 발견은 인간 본성의 이해를 위한 기반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엇이 인간을 유인원과 다르게 만드는가를 설명하는 증거를 제공하기 위해 활용되요. 해러웨이는 젠더 차이를 언급하면서 앞서 밝힌 인간중심적 사고들을 비판해요. 젠더 차이는 흔히 인간-유인원 차이에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요. 또한 인간 존재에 젠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면서, 어떤 이들은 인간 존재가 남성적인 것을 표준으로 삼고, 여성적인 것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삼는다는 걸 경시하지요. 남성-여성 사이의 관계는 인간-유인원 사이의 관계에서 반복되어요. 모든 급작스럽고, 신성화된(sacrosant) 인간-비인간 차이는 위계로서의 차이에 대한 젠더 맹목적인 관념을 생산하지요. 위에서 밝힌 관점에서 볼 때, 일반대칭성원리는 젠더맹목성(gender-blindness)에 관한 페미니스트 비판에 보다 잘 조화되어요. 왜냐면 중요한 차이를 경험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거든요(it enables an exclusively empirical awareness of differences that matter).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데카르트적인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를 받아들이고 살 필요는 없어요. 이런 실체는 나 혹은 주시자의 시선을 신비화하니까요. 사실 중요한 차이들은 오직 경험할 수 있을 때야만 설명될 수 있어요. "페미니스트 인식론" 내 초기 논의들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내용이지요. 페미니즘은 '여성의 경험'을 이전까지 무시되었던 모순이나 문제화 양식(modes of problamatization)을 생성하기 유효한 도구로 다루었어요. 만약 차이 간의 위계가(그리고 이러한 위걔를 가정하기에 좋은 이유가) 있다면, 이 위계는 1) 경험에 열려있어야 하고, 2) 오직 상황 속에서만 존재해야 해요. 일반대칭성 원리는 계속해서 우리를 경험적으로 생각하도록 몰아붙이는 도구예요. 자본, 가부장제, 진정성 같은 추상적인 구성(abstract configuration)이라 해도 마찬가지지요. 실현화 과정(혹은 "구성")에 참여하는 모든 독립체가 차이를 자아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떄문에, 이 원리는 모든 독립체가 같은 "방식들"로 취급되고, 동일한 용어들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요. 같은 방식들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이 독립체들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의 목소리들을 낼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뜻이라 보면 되요. 셋째, 일반대칭성 원리에 대한 비판이 그 깊은 바닥에 있는 인간중심적 편견을 보여준다면, 자유 연합 원리에 대한 비판은 인간중심적 편견의 논리적 귀결이에요. 만약 인간이 일반대칭성 원리의 대상이 되기에는 다른 존재들에 비해 너무나도 특별하고 희귀하고 다르다면, 자유 연결(free association)의 필요는 없어요. 무엇이 경험적 탐구에 포함이 되고 안 될지는 이론적 추론에 따라 사전에 결정될 테니까요. "맥락 속에 가져오기"가 대개 의미가 있는 점이 여기에요. 역사적 유물론은 매우 복잡하고, 역사적이고, 정치-경제적이고, 사회-문화적이고, 철학적인 맥락들을 추상적인 구성(configuration) 속으로 응축시키는 능력으로 유명해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등이 대표적인 예지요. 반대로, 자유 연합 원리는 어떠한 맥락도 없는 평평한 존재론(flat-ontology) 속에서 번영하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이는 오해입니다. 자유 연합 원리는 맥락화에 관련된 모든 것(all about contextualizing)이에요. 연결이 결과적으로 연결하기의 실천(the practice of connecting)이고 우리가 수많은 연결들의 직조를 다루어내기 때문에, 자유 연결 원리는 끊임없이 적절하게 맥락화할 필요가 있어요. 말하자면, 단순히 어떠한 텍스트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하는지를 경험적으로 추적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연결이 경험을 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연결을 탐색하기 위한 정확한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썼었어요. 맥락은 중요하지만 사전에 결정되지 않아요. 비록 역사적 유물론이 역사를 생산양식의 계승이라 설명하더라도,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론에서 이러한 계승을 신중하게(precisely) 기록하고 있지요. 이를 탈콧 파슨스가 설명한 사회 체계(social system)와 비교해보면, 파슨스의 설명은 역사적 배경을 결여하고 있어요. 파슨스는 어떠한 형태의 확실한 경험적 탐구를 시행하지 않고서, 체계적 논리(AGIL이라 불리는)가 설명되어야 한다고 보았어요. 그 대신에, 자유 연합 원리는 맥락은 사전에 가정된 논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경험된 연결에 따라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요. 맥락은 언제나 연결을 제공하는 확실한 독립체를 지녀야 해요. 지금까지 다룬 ANT의 세 원리는 역사적 유물론이 지닌 프락시올로지(praxeology)적인 특징과 모순되지 않아요. 최소한 (문제제기로부터 동원하기까지 이어지는) ANT의 과정들을 촉구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어셈블리지의 유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ANT와 역사적 유물론의 가능한 협력 효과를 계속해서 탐색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모순, 이해관계의 충돌, 제한된 자원을 둘러싼 투쟁, 위계로 변화하는 차이(젠더 및 인종), '사실 문제'의 구성을 부각시키면서, 역사적 유물론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회적 구성'으로 손쉽게 퇴행했을 진부하고 고립된 분석들을 풍부하게 만들어요.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를 사회적인 것을 통해서만 설명하려는 자, 사회적 설명을 찾아내려는 자들을 위한 건강한 해독제예요. 둘 다 물질적인 것을 중요하게 간주하고, 둘 다 어떻게 우리가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결과로서 물질적인 것을 이해해요. // 그래도 이번 장은 좀 짧네요 호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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