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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12 11:20:15수정됨
Name   에피타
Subject   열정과 냉정사이 - 거리두어 생각하기
얼마 전, 전날 오후부터 해결이 안된 계좌 문제가 마음에 걸려 출근하자마자 직장 내 은행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 어제 물어본 그 계좌 말이죠? 그거 본점 쪽에 이야기 해 놨으니 오늘 정리 될꺼에요."
말 한 마디로 절 안심시킨 은행 과장님은 저에게 언제 왔냐, 일한지 얼마나 됐냐 이것저것 묻기 시작합니다. 이른 아침시간이라 사람도 없고 보통 월급받는 주 거래 계좌가 이쪽 은행이라 제 계좌를 보더니 이렇게 월급 그냥 계좌에 넣어두면 어떡하냐, 집도 사고 차도 새로 사야하지 않느냐 하며 어느 새 저는 금융 파생상품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과장님은 요즘 월급을 계좌에 넣어만 둬서는 물가인상폭도 쫓아가지 못한다며 여러가지 주가연계증권 상품이 소개된 리플렛을 보여주고 다우지수, 상하이지수, 닛케이지수가 향후 몇 개월 간 일정수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높은 이율의 수익을 낼 수 있는 파생상품들을 추천합니다.
리플렛의 파생상품 설명표에는 더 높은 수익율을 낼 수 있지만 리스크가 큰 상품부터 좀 더 안전한 상품까지 여섯단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장 무난한 세 번째, 네 번째 칸에 친절하게 노란색 음영으로 강조되어 있고 저 같은 초보자들이 시작하기 좋은 상품이라는 과장님의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고 빨간 색연필로 그 박스 중 하나에 체크를 하더니 어느 새 저는 갤럭시 탭에 나타난 가입신청서에 '원금 손실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들었습니다'에 체크하고 서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절하고 달콤했던 과장님의 행운도 거기까지었으니,
"김과장, 오늘 와인색 원피스 예쁜데?"
막 출근하는 은행 점장님의 인사말은 영혼을 일깨우는 나팔소리와 같아서, 아직도 은행은 이런 인사말로 하루를 시작하나 생각이 들기 바쁘게 눈에 들어온 건 이를 앙다물며 쓴 웃음 짓는 과장님의 얼굴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배아트리체인줄 알았던 과장님은 이단의 미노타우르스, 절 인도하는 곳은 클라우드 나인이 기다리는 천국이 아닌 스틱스강 저편의 지옥, 그리고 불현듯 떠오르는 장면은 파생상품 원금손실조항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손해를 본 투자자들이 항의하는 장면도 아닌, 트럼프의 거친 트윗과 시진핑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잠깐 생각해봐. 내가 이거 한다고 돈 얼마나 벌 수 있지? 한달에 10만원? 20만원?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자본주의 부스러기를 찾는 개미가 된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 뉴스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미중 무역전쟁을 팝콘 뜯으며 보는게 아니라 손톱 뜯으며 봐야 할텐데? 트럼프 트윗에 떨어질 미국 증시를 걱정하고 미국 언론에 보도되는 멈춰버린 디트로이트 철강 공장의 사진, 사람이 떠나고 덩그러니 놓여진 안전모만 남은 사진을 저널리즘, 기록과 예술로서 접근하지 못하고 이 걸로 주가가 얼마나 떨어질까, 내 투자원금 손실이 얼마나 날까, 마치 BTS 앨범과 노래를 그 자체보다 빌보드 차드 순위, 음반 판매량으로 접근하는, 모든 걸 수치화하고 우열을 판가름하며 손익을 계산해야 하는 그런 세상에 널 던져넣을 수 있겠어?'

"어... 이거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왜요? 원금 손실날 수 있다고 하니 걱정되서 그러세요? 여기 분들은 너무 안정적인 걸 추구해서 그러는데 이 정도 리스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젊으실 때 이런 투자도 해보셔야지 안 그러면 돈 모으기 힘들어요."
결국 마지막 단계를 채우지 못하고 취소를 하자 과장님은 역시 너희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과장님은 저의 지나치게 안정적인 자산투자에 대해 염려하시지만 그 염려는 사실 과장님 자신에 대한 염려겠지요. 행복은 나누면 어쩌구 슬픔은 나누면 어쩌구 하지만 그 염려는 받으면 온전히 저만의 것이 되잖아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5:7)' 다른 사람들 염려만 해도 벅차실 예수님께 없는 제 염려까지 만들어서 맡길 뻔뻔함은 없더라구요.

2월 초, 제 값 주고 사면 최소 2주는 머물러야 본전을 뽑을 거 같던 4월말 5월초 런던행 비행기 왕복 티켓을 거의 편도 가격으로 예매할 때만 하더라도 제 마음은 이미 트라팔가 광장을 걷고 있었엇습니다. 아아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 타워, 테이트 모던. 축구 경기는 리버풀 아스날 경기가 있는데 이 때 쯤이면 이미 리버풀 우승은 확정됐을테니 김 빠지지 않을까, 아니면 아스날이 순위를 끌어올려 내년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사활을 건 명경기가 나오지 않을까, 아니야 차라리 강등권 경기나 2부 챔피언십 상위권팀 경기를 보러갈까. 애초에 티켓을 싸게 끊은 게 유행성 전염병 덕이긴 하지만 이제야 확진자 수가 눈에 들어옵니다. 갑자기 내 일이 되니 1차, 2차, 3차까지 날아오는 (긴급)머리말을 단 협조공문이 그대로 날아와 머리에 꽂히고 확진자 그래프는 치솟습니다. 아아 그래프여,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결국 히드로 공항으로 향하던 비행기 티켓은 셜록, 탑 기어로 익힌 잉글리시 악센트와 구글 광고에 런던 호텔 특가 세일만을 남기고 취소되었습니다.

이번 한국의 유행성 전염병 사태에는 전 국민, 아니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일일 추가 확진자 그래프와 주가 그래프가 언제 변곡점을 찍을 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고 특정 지역 및 단체를 배경으로 환자 진료와 방역에 사투를 벌이는 당국과 의료계 현장종사자 주연에 몇몇 정치인들의 조연, 혼란 속에 피어나는 시민들의 감동적인 협조 및 기부운동, 여기에 주변국들과의 대처 비교까지. 라이벌 팀과의 더비매치가 열리는 축구경기장에는 이성적 사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선수와 관중은 함께 호흡하고 환호할 뿐이며 우리 선수의 거친 몸싸움에 꺼내는 심판의 카드는 야유의 대상일 뿐 그 파울이 얼마나 거칠었나, 심판의 카드 색깔은 적절했나 따위의 물음을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겨서는 흐름인지 알지 못하며 빠져나와야 흐름과 종착지를 알 수 있듯이 경기장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버스 안에서 갓 나온 경기 다시보기를 확인하고서야‘우리선수가 좀 거칠긴 했구나’라고 뒤늦게 인정합니다. 이번 사태도 건조하게 접근하여 한국의 확진자 추적 및 검사 중심 대처, 중국의 지역격리, 일본의 중증 환자 대응 중심의 상황을 시험문제 지문처럼 A, B, C국으로 나열하고 보건 및 방역 차원을 넘어 외교, 경제, 사회, 문화적 영향을 고려하여 각 국가의 대처 중 효율적인 부분을 종합하면 가장 바람직한 대응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관계를 발전시키던 분이 있었습니다. 처음 몇 달간은 분위기가 좋았는데 몇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관계가 안 좋아졌고, 조급해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수 없이 되뇌었지만 결국 성급하게 복구하려다 어제 사실상 관계 종결 통보를 받았습니다. 잘 진행되다 처음 삐끗 했던 날 밤에는 스트레스로 새벽에 땀을 흠뻑 뒤집어쓰고 잠에서 깨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메시지를 받고 마찬가지로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깨었는데 오히려 생각이 맑아지면서 그 동안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방향으로 다시 시작했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보이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 동안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관계가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니 흐름이 한 눈에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축구경기에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면 안타까웠던 장면을 상기하게 되죠. 거기서 상대 팀 득점만 막았더라면, 아니면 우리 편의 결정적 기회 한 번만 살렸더라면. 물론 인간관계도, 축구경기도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는 많은 변수가 존재하지만 실점하게 되는 장면은 그 장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날 선수의 기용, 전술, 선수의 상태, 환경 등 전반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납득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때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다음에 다시 그런 기회가 오면 잘 할 수 있을텐데’와 같은 자기반성적인 자책보다는 객관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의견을 듣거나 닥친 상황에서 한 발 벗어난 시각에서 접근하는 게 좋습니다.
저도 그 분과 만나고 관계를 쌓을 때마다 상황과 대화를 복기하고 더 나은 자세를 보여주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편하게 접근하지 못했고 그것이 부담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관계를 쌓아가는 도중에는 서로 가장 이상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떤 모습이 이상적인지,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가는 중이며 저 또한 매일 실수하는 인간이고 그런 모습 그대로 이해해 줄 수 없냐고, 서로에게 끌렸던 설렘으로 돌아 갈 수 없냐고 말하고 싶지만 늦었을까요. 늦었겠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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