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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6 22:49:19수정됨
Name   바보왕
Subject   둠 이터널 쪼끔 한 일기
가입을 했으니 뭔가 쓰긴 해야겠는데 가진 재주가 없어서 오락한 일기 한 줄 쓰겠습니다.
마침 둠이터널이 좀전에 수집품을 다 모아서 쓰기에 만만하네요. 마스터 레벨 언제하냐.
아무튼 쓰려는데 짧고 두서없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스포일러 신경 안 쓰고 막 지를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오니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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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이터널 그래픽이 좋다 혹은 더 좋다 혹은 더 좋은 거보다 더 좋다 하고 그동안 이야기들이 많던데, 사실 막눈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3D고 귀엽고 이쁘면 다 좋은 그래픽인 겁니다. 그리고 프리코네에 캬루쟝이 있듯이 둠이터널에는 송아지 다음에 송아지 다음에 얼룩송아지가 나와요. 잘 보면 다들 콧김도 씩씩 나오는 게 진짜 따뜻해보임. 그러므로! 둠이터널 그래픽은 매우 좋습니다. 결론 땅땅땅.

그런데 단순히 좋다 나쁘다 하는 것 외에, 둠이터널에는 그래픽에 관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어요. 의외로 이 부분은 다른 리뷰를 봐도 언급을 하는 곳이 흔치는 않던데, 그게 뭐냐면 바로 시인성입니다. 좁은 범위를 지칭할 경우 직관성이라고도 하죠.

워크래프트3 오리지널과 리포지드가 여(與)와 부(否)로 증명했듯이, 반드시 텍스처가 화려하고 폴리곤 수가 많아서 사람 얼굴에 쭈름살이 꽉꽉 찍혀나와야만 사람들이 그 게임 멋지다 하고 봐주지는 않습니다. 결국 그래픽 역시 게임의 본질이 아니라, 진짜 본질인 플레이(갖고 놀기)를 하기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니까요. 이때 그래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게임에 대한 접근성에 기여한다면, ‘얼마나 알아보기 쉽고, 플레이와 연관된 쾌감을 주느냐’로 요약되는 ‘시인성’은 플레이의 편의성에 크게 기여합니다.

전체 화면 구도와 사물 배치부터, 적절한 순간에 나오는 특수효과까지. 화면은 화려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보는 사람이 눈갱을 당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게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쉽게 알아야 하고, 동시에 ‘내가 보고 있음’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인성의 요체입니다.

둠 이터널의 화면은 바로 이 시인성의 모범 답안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시종일관 시뻘건 색이 테마로 쓰이던 전작 둠(2016)과 다르게, 이번작에선 대단히 다양한 색깔이 게임을 수놓고 있는데요, 아이템도 마찬가지로 전작에 비해 훨씬 다채롭게 나옵니다. 모든 아이템이 정확한 생김새와 색깔을 갖고 있단 거죠.

따라서 전투가 시작될 때 고지로 한번 가서 슥 둘러보기만 해도, 혹은 맨큐 교수님 배때지에 전기톱 칼빵을 놓는 순간에도, 어떤 아이템이 얼마나 떨어져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면 빨리 줘먹을 수 있을지 0.1초만에 감을 잡을 수 있게 됐어요. 내가 가진 자원의 양과, 시공을 찢고 나오는 야수들을 견줘보면서 순간적으로 이번 전투의 난이도와 전체 방향을 가늠할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적들도 전작보다 훨씬 알아보기 쉽게 뽑혔습니다. 총겜뇌와는 거리가 먼 제가 봤을 때 이게 임픈지 좀빈지 배경에 처박아둔 마네킹인지도 분간이 안 가던 전작을 벗어던지고, 이번엔 좀비가 딱 좀비같이 생겼어요. 이마에 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온 지구인이오 하고 투표인감 쾅 찍어서 나오거든요. 임프 역시 훨씬 밝아진 색으로 인해, 특유의 엉거주춤한 자세와 힘찬 달리기가 잘 보입니다. 클래식에서는 비교적 상급 몹에 속했던 아라크노트론과 레버넌트가 초반부터 나와주면서 생김새로 몹 구분하기(+약점 공략) 연습을 빡세게 시켜주는 것도 게임에 빨리 익숙해지는 데 도움을 주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 몹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새까만 덩치에 하얀 칸초가 보이면 그건 둠나입니다. 칸초 색이 애매한데 팔에 칼이 달렸으면 테나죠. (덩치도 덩치지만) 온몸으로 정육점을 차렸는데 두 팔이 불타는 갈바마리다? 백펄쎈트 바론입니다. 심지어 생김새 이전에 특유의 우아한 걸음걸이와 소환질 버프질로 내가 누구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놈도 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한눈에 이렇게 특출난 개성을 가진 악마들을 보고 모를 수가 없게 돼 있다는 겁니다.

전투가 제대로 벌어지면 둠 이터널의 시인성은 최고로 빛을 발합니다. 각자가 너무나 명확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움직임과, 특수효과를 통해 상황을 플레이어에게 정확히 알립니다. 심지어 스샷만 보면 순간적으로 구분이 잘 안 될 것 같은 임프와 프롤러조차, 실제 게임에선 한 방에 구분이 됩니다. 아니 뭐, 보라색으로 텔포를 쓰면서 오는 놈이 임프는 아닐 거잖아요. 그렇죠?

여기에 둠가이가 사용하는 달달한 폭력 역시 하나하나가 정확하고, 특색 있게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내가 무슨 무기를 쓰고 있는지. 플라즈마인지 아전트 노포인지. 샷건 배럴이 몇 개고 우클릭 효과가 지금 뭔지. 내가 쏜 게 악마한테 맞았는지 쟤가 피했는지 감나빗이 됐는지. 그리고 하나씩, 혹은 한 무더기씩 악마 새퀴들이 내가 쏜 총에 꿰이고 휘두른 전기톱에 잘려나가는 모습이 이어질 때마다 둠 이터널은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현실에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당한 폭력이란 이렇게나 아름답고, 즐겁다고요.

예. 둠 이터널은 즐겁습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뒤에 나오는 다른 모든 장점과 단점을 무시하고 이 게임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시인성이 뒷받침을 해주었기에, 둠 이터널은 뒤로 가서 오만 종말의 잡것들이 쏟아지는 격전이 거듭되어도, 손이 딸리고 머가리가 딸려서 뚝배기를 여럿 까먹을지언정 눈으로 봐서 돌아가는 상황을 잘못 이해하는 일은 웬만해선 벌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딱 봐도 악마들이 봉숭아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주변에는 아크바일이 안 보이거든요. 그럼 HUD 껐어도 한 방에 결론 나오지 않겠습니까? 여기 토템 있다고. 그리고 저 멀리 쇠뿔 한 쌍이 보이죠. 동시에 경고음이 들립니다. 그럼 조무사이버데몬입니다. 너 지금 미사일 맞게 생겼다 그러니까 뛰든 대시하든 엄폐물을 끼든 너 알아서 피해라 이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둠 이터널은 대단히 친절한 게임에 속합니다. 악마를 찢고 죽이는 게임으로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정말 많은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어요.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줘패고 쏴제끼는 게임 장르라면, 앞으로도 많은 게임들이 둠과 둠 이터널을 보고 배워야 할 것들이 남아있을 겁니다.

다만 이런 시인성의 장점이 전투를 뺀 나머지 부분에서 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좀 아쉬운데요, 이것도 따지고 보면 시인성 그 자체가 문제인 건 사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잘 보면, 레벨 진행 중에 둠가이가 가야 할 곳은 항상 초록색이거든요. 노란색 장대 빼고요. 예. 진짜 거기가 맞다고? 싶은 곳들도 초록색을 믿고 덤비면 반드시 갈 수 있도록 게임이 짜여져 있어요. 아닐 것 같아도 다 됩니다.

참된 초록색을 믿지 아니하고 눈앞에 보이는 발판의 거짓 이적에 눈에 멀어 딛지 아니할 곳을 자꾸 딛는 것이, 전투를 제외한 레벨 진행에서 유저들이 곤경에 자주 빠지는 대부분의 이유입니다. 그러다가 반 정도는 엉뚱하게 비밀 구역에 들어가서 레코드판을 집에 가져오곤 하지만요.

둠 이터널의 레벨에 관한 진짜 문제는, 시인성보다는 오히려 전투가 아닌 탐사와 진행에까지 컨트롤로 인한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려고 했다는 점과, 전작에 비해 퇴보해버린 레벨 디자인 쪽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말이죠. 둠가이는 이터널 전까지는 (그러니까 비밀구역 찾아다니는 고인물이나 반골을 제외하면) 한 번도 라라 크로프트나 마리오나 라지엘이었던 적이 없거든요. 아니 근데 무슨 둠가이가 갑자기 하늘을 날아야 되고 벽을 척척 타야 하는 겁니까? 예고편에서 이걸 처음 봤을 때는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전투 구역 내에서 (혹은 사이에서) 수직이동을 지원하는 요소로 나온 줄 알았지, 이걸로 천 길 낭떠러지를 피해서 열전 달리는 일요일을 찍을 거라곤 생각을 안 했다는 겁니다. 왜 공중 대시를 네 번 연속 할 수 있고 없고 때문에 진행이 발목을 잡혀야 합니까?

더구나 레벨 디자인이 직선밖에 없는 것도 둠 이터널에서 몇 안 되는, 마음에 영 안 드는 점 중 하나입니다. 클래식 팬들이, 그리고 2016년판 유저들이 바라던 둠의 레벨은 이딴 게 아니었어요. 그냥 이전처럼 널따랗고, 치밀하고, 복잡하고, 하지만 아무튼 앞으로만 가면 목적지로는 갈 수 있는, 정복되지 않은 미로 하나 쿵 던져주고 “여기서 고어네스트 네 개만 뿌수면 다음 판으로 보내줌. 수단과 방법과 뿌수는 순서는 일절 묻지 않겠음.”이라고 말해주길 바란 겁니다.

정석대로 첫 번째 액세스 카드부터 찾아서 차근차근 공략을 하든, 저 멀리 밑에 보이는 고어 네스트부터 곧장 덤벼들어서 중간부터 때려뿌시든, 무기와 탄약을 찾아서 비밀구역을 쑤시다가 세 번째 카드를 찾아서 거꾸로 레벨을 뒤집어 엎어버리든, 아무튼간에 게임은 일절 간섭하지 않고 우리는 그저 닥치는 대로 악마들을 찢고 죽이는 사이에 결국 미로를 나만의 방법으로 답파해서 고어네스트 네 개를 다 뿌시고 맨 처음에 나왔던, 잠긴 대문을 열어서 나가는, 그런 감각으로 게임을 하고 싶었어요. 그게 바로 ‘비선형 게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경로를 삥글삥글 돌리고 배배 꼬아놓기만 했지, 결국 내가 가야 하는 순서가 무조건 A 다음에 B 다음에 C로 못 가서 D로 갔다가 E로 갔다가 E 다음에 C로 가고 마무리 이거 반복이거든요. 이건 비선형이 아니에요. 직선도 아니고요. 탐험 게임, 퍼즐 게임이라고 컨셉 잡고 나온 게 아닐 바에야, 이건 그냥 비선형인 척 위선 떠는 '나선'일 뿐입니다. (사실 탐험 컨셉 게임에서도 이런 나선 레벨에만 디자인을 100% 의존하면 평작, 암만 잘해도 수작 이상 못 가요)

바이오쇼크 1, 2 이후로 이렇게 수준 떨어지는 레벨 디자인은 오랜만에 보고요, 제 생각으론 그냥 깔끔하게 “이 게임은 직선 진행이니 그저 앞으로만 열씸히 달려가시오” (중간에 퍼즐이 보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풀 수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런 걱정을 마시오) 하고 시원하게 질러준 모던워페어 시리즈와 하프라이프 시리즈가 오히려 레벨 디자인 면에서만은 몇 수나 위에 있다고 봐요. 개발의 목적과 수단과 결과가 일목요연하니까요. 쌍남자 아임니까.

그나마 우르닥 맨 마지막에 선택지 두 개 주긴 하는데 어느 한 곳을 먼저 간다고 해서 게임이 그래 결심했어! 하고 바뀌는 맛이라도 있느냐 하면 그거도 아니고 말이죠.

아무튼 돌아가서 둠 이터널의 레벨은 ‘비선형인 척만 하는 + 가짜 직선형’ 디자인이 주는 단조로움 (및 답답함)과, 실패가 존재하는 퍼즐이 진행 중간에 자꾸 발목을 붙잡는다는 두 단점이 맞물려서 ‘그냥 앞으로만 뛰어가면 아무튼 게임이 나아갔던’ 전작에 익숙했던 유저들을 고통에 빠뜨렸습니다. 이게 제가 이해하는 둠 이터널 레벨 디자인의 진짜 문제예요.

사실 어느 쪽이 더 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퍼즐을 넣고 싶어서 레벨 디자인을 외길로 만들었던 걸까요, 아니면 레벨 디자인 역량은 선형이 한계인데 정직하게 만들면 클래식 둠보이한테 욕먹을까봐 바이오쇼크 1 때의 찌질한 속임수를 재탕하려 했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그 클래식 둠보이 입장에선 결국 꼼수 쓴 게 눈에 띄고 있고, 도무지 마음에 들질 못하지만요.

둠 아니라도 워낙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드는 점들인데다, 하필 둠에서 이 따위로 장난을 칠 줄 몰랐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말이 좀 험하게 나갔네요. 둠 이터널 제작자들도 이번 작의 레벨 디자인이 전작에 비해서는 한 걸음, 아니 여러 걸음 뒤로 나갔다는 걸 받아들이곤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왜냐면 레벨 디자인의 불만을 잠재울 만큼의 갖가지 연출 기법과...... 매번 놀라운 전투 공간을 주니까요. 먼저 연출 기법을 말하자면, 둠 이터널은 정말 기존의 둠을 넘어서 ‘원한다면, 뭐가 됐든 필요한 만큼은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어요. 1인칭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컷신과, 플레이어의 진행에 딱딱 맞춘 상황의 변화와 전개는 둠에 나왔기 때문에 다른 게임보다는 쪼끔은 더 신선한 맛을 줍니다. 둠 헌터 등장이 특히 맨 처음과 맨 끝은 쩔었어요. 중간부터 지겨워서 그렇지.

전투 공간은...... 이건 진짜 진국입니다. 게임 내내 지구에서 지옥에서 화성에서, 자연스러운 폐허와 전혀 자연스럽지 않고 노골적으로 작위적인 격전장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매번 다른 동선을 강요합니다. 공중으로 막 날아줘야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생각없이 날기만 했다간 얼마 되지 않아 “아니, 통하지 않을 거야”가 되는 곳이 있어요. 그리고 이런 게 어떻게 느껴지냐면.........

꽤 재밌어요! 각 장소마다 새로운 전술과 방법을 찾아내는 거니까요. 더구나 손에 좀 자신이 있고 무기가 갖춰지며 태도도 대담해지면, 같은 장소에서 저번에는 통하지 않았던 전술도 이번에는 통하게 되는 짜릿함도 있습니다. 내가 성장을 한 듯한 느낌이 든다니까요. 꼭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세키로를 할 때 느끼던 재미의 일부를 둠 이터널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제가 이 게임에서 받은 감상을 그럭저럭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앞서서 연출 이야기를 했는지요? 이게 진행 연출만 나아진 게 아닙니다. 전투 연출도, 그리고 연출을 상호보완하기 위한 악마들의 AI도 전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아졌습니다. 어, 정확히 표현하자면,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어요. 사실 이전 둠을 하면서도 와 이건 정말 자비가 없는 게임이다 싶었지만, 이터널을 해보니 알겠습니다.

전작은 정말 많이 봐준 게임이라는 사실을요.

악마들의 행동거지가 전작의 몇 배나 거칠어졌습니다. 스펙을 제외하고 움직임만 보자면, 전작의 최고 어려움 난이도에서나 보던 각종 묘기가 이번에는 보통 난이도에서도 디폴트로 막 나와요. 임프나 아크바일 같은 몬스터는 내가 표적으로 잡고 정면에서 덤비면 거기에 맞춰서 등을 돌리고 적극적으로 도망합니다. 그 와중에 한 번씩 등을 돌려서 예측궤도에 불장난 집어던지는 건 필수코스고요. 페엘과 로쏘는 장애물을 거침없이 돌아오며, 교수님들은 그 덩치에 어찌나 민첩한지 툭하면 2층으로 점프해서 양팔의 화염방사기로 아주 난사를 해댑니다. 그리고 둠나급 이상이 끼어들면 의도를 한 건지 안 한 건지 연계 움직임도 서슴없이 써요. 그러니까, 솔저나 칼카스 같은 걸 슬쩍 내보내서 유인한 다음 뒤에서 둠나가 튀어나와 내 뚝배기를 한 개 가져간다 이거죠.

특별한 컷신이나 스크립트 강제 진행 없이도, 잘 짜인 악마의 행동만으로 극적인 장면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당연히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플레이어의 행동도 점점 더 과격해지고, 동시에 유연해집니다.

한 쪽으로만 자꾸 진행하면 사각에서 뚝배기 맞기 딱 좋으니, 점점 불시에 방향을 휙 트는 속임수가 늘어납니다. 시프트로 선회를 거드는 건 덤이죠. 가뜩이나 리퍼로 라인도 못 맞추는 내 실력에 무기를 한 개만 쓰면 여러 적에게 대처하기 힘드니, 난사하는 와중에도 습관처럼 무기를 휘끽 휘끽 바꿔드는 재주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실력은 한참 아래일지언정 나도 분위기*만*은 clockner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즐거워집니다. 악마들이 그렇게 무서워한 둠가이의 진짜 모습이란 게 바로 이거구나, 하고요.

여기까지 오면, 다른 연출은 굳이 더 안 보여줘도 될 것만 같습니다. 이미 이 자체가 지구와 지옥과 천국을 둘러싼 생존격전이에요. 내가 그 주인공이지요.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둠가이 하면 생각나는 게 물 흐르는 듯한 총질만은 아니잖습니까. 둠 하는 모두가 이제는 원하는 바로 그거.

둠에는 총을 통한 폭력 못지 않게 둠가이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글로리 킬이 있습니다. 역시 이터널에선 전작과 비교가 안 되게 쎄게 나옵니다. 이전에도 둠은 도무지 빠꾸가 없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순진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둠가이가 아주 고삐 풀린 폭력을 보여주네요. 정말이지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사악한 수도 악마를 잡아뜯고 줘패고 우그러뜨리고 꺾고 살포오시 찢어서 죽이는데, 둠가이라는 인물이 가진 끝없닌 힘의 묘사 면에서도 전작 이상의 참혹함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수단에까지 칼이라는 새로운 무기가 나오면서 훨씬 다양하고, ‘기발한’ 글로리 킬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 ‘와우.’

더구나 이게 더 훌륭한 점이 뭐냐면 둠 다음에 또 나온 게 이거라는 거예요. 둠 이터널 나오고 제가 순진했음을 깨달았다고 했잖아요. 둠 이터널 후속작이 더 나오면, 그때 다시 제가 얼마나 순진하고 온건했는지를 거듭 깨달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이번 둠 이터널은 전작 이상으로 클래식 및 팬게임의 요소를 계승하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치하고 역겨운 레벨 디자인만 빼고요) 구체적인 연출은 물론 둠 이터널 제작자들의 고유한 결과물이 맞습니다만, 둠 이터널은 연출의 방향부터 악마를 배치하는 법, 심지어 세세한 악마 디자인까지 (특히 죄악의 상징을 포함해서 악마들이 공격하는 방법이나 묘사 면에서) 클래식 둠 시리즈, 그리고 둠 64와 브루탈 둠의 요소를 여럿 물려받고 있습니다. 게임하면서 ‘아 이거는 둠2네’ ‘이거는 닌텐도64네’ ‘여기는 빼박 브루탈 둠이네. 브둠 제작자는 전작 때 뻘소리를 하지 말고 지금 생색냈으면 따봉이 홍수처럼 쏟아졌을 건데’ 같은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네요.

전작도 둠 코믹스에서 연출의 방향을 많이 참고했다고 밝혔던 걸 생각하면, 둠 이터널의 뛰어난 연출은 제작자의 훌륭함 못지않게 전작의 유산도 어느 정도 소모해서 탄생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약 둠 이터널의 다음 후속작이 이번 작품 이상의 것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둠 리부트 시리즈 역시 후속작을 위한 또 다른, 새로운 원전이 될 수 있어야겠지요. 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행복회로 돌려봅니다.

둠 이터널의 다음 장점으로는 음악이 있겠네요. 둠 하면 메탈이죠. 메탈에 대해 제대로 안 적은 평생에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메탈이 얼마나 씐나는지 하나만은 저도 압니다. 이번 작에서도 어김없이 장면마다 맞춘 듯이 간지 흐르는 메탈이 흐릅니다. 제가 아는 걸로 더 말할 재주는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게임 내내 즐겨놓고 한 마디도 안 하긴 섭섭하니 딱 요만큼 적어놓고 넘어가겠습니다.

둠 이터널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꼽고 싶은 부분은 이야기입니다. 보통 이야기가 뛰어나다고 했을 때 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히는데요, 하나는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이 좋아서 들으면 누구나 감동을 느낀다는 거고(스토리텔링 좋다는 게 다 이 이야기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내용과 선후 관계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공감대를 끌어낸다는 겁니다. 역시 보통은 이야기가 좋다고 하면 이 두 가지가 모두 뛰어난 편입니다만, 한 가지를 포기하고 다른 한 가지만 추구해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최근 다크소울이 증명했습니다.

둠 이터널이 바로 그 다크 소울과 보편적으로 좋은 이야기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있어요. 둠가이의 시점에서 볼 법한 것들, 둠가이의 관점에서 알아야 할 것들, 둠가이 자신의 과거, 즉 플레이어가 둠가이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가 둠 이터널에선 정확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나옵니다.

클래식 감성으로는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3인칭 연출까지 아낌없이 쓰면서요. 그래서 전작에 있던, 둠가이를 둘러싼 모든 떡밥과 의문은 이터널을 플레이하면서 하나씩, 그리고 남김없이 해결됩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왜 악마를 그렇게까지 미워하는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단 한 마디의 질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풀어줍니다.

그런데 막상 둠가이와 별 상관이 없다 싶은 부분은 게임에서 일절 보여주질 않습니다. 둠가이가 어떻게 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는 나오지만, 정작 ‘어떻게 그 곳에 갔는지’는 안 나와요. 왜 게임 시작하자마자 지옥 사제를 조지는지도 안 나옵니다. 심지어 지옥 사제가 왜 ‘디아그’라고 불리는지조차 안 나옵니다. 진짜 밑도끝도 없는 시점에서 게임이 시작한단 거예요.

원래 바로 전 장면은 이거 아니었잖아요. 둠가이는 화성에서 힘과 모발을 맞바꾼 대두거미의 조동아리에 겁나 큰 총을 처박았고, 크루시블을 회수했고, 헤이든 박사가 둠가이를 배신했고, 칼 뺏겼고, 그 직후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헤이든 박사 사무실은 아닌 곳’으로 강제 순간이동을 했죠. 그게 둠 엔딩이었단 말입니다.

도대체 그 장면에서 뭘 어쨌는데 둠가이가 난데없이 라퓨타에 나타나서 악마 침공군의 가장 핵심 되는 멤버를 사냥하고 있느냔 거죠. 그것도 시작하자마자 한 명 곧바로 처단을 했으니, 그 전부터 이미 오랜 기간 준비를 해왔다는 거 아닙니까. 그 우주요새에서, 프레이터 갑옷도 더욱 흉악하게 개조하고, 감자칩도 맛있게 먹어가면서, 쌍절곤도 좀 돌리면서 말이죠.

그에 대한 의문들은 나중에야 하나씩 풀려갑니다. 둠가이가 뭘 했을 것이라는 암시와, 헤이든 박사가 따로 어디서 뭘 했는지에 대한 정보와, 그 이후 비뚤어진 사건과, 둠 이터널 시작에 이르는 모든 비극까지. 그 모든 이야기를 짜맞추고 난 뒤에야 비로소 둠가이와 헤이든 박사의 만남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어긋난 견해에 따라 악마를 경계하고 대비하려 했던 두 쿨가이가 결국 서로의 필요에 의해 다시 한 번 활동을 교차하고 협력을 시작하는 그 장면이 말이에요.

둠 이터널의 이야기는 헤이든 박사의 합류 이후로도 이런 식입니다. 플레이어가 둠가이의 입장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합니다만, 그것만 빼고는 모든 서사가 극도로 불친절해요. 그래서 컷신은 시작부터 난데없고 진행은 계속해서 ‘아니 니가 왜?’를 연발하게 만듭니다. 절대로 정상적인, 혹은 보편적인 이야기 전달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 궁금함을 못 이겨 코덱스를 열고 한줄 한줄 이야기를 읽게 되면 비로소 플레이어는 둠 이터널의 전체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현재 일어난 사건부터, 과거의 역사, 끝내는 전작과의 연결고리까지도요. 그리고 이 점은 역시 다크소울처럼 상상의 영역에 있는 이야기에 비해선 둠 이터널 쪽이 훨씬, 훨씬 친절한 것 같습니다.

궁금함을 미끼로 써서 플레이어를 코덱스로 납치하는 둠 이터널의 이야기 방식이 다분히 고의라고 생각하는 이유(그러니까, 단순히 능력 부족으로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느끼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엔딩입니다.

보통 그렇잖아요. *그* 다크소울조차 엔딩 보고 나면 그 뒤로 어떻게 되었다는 최소한의 진행은 나옵니다. 화로에 불을 또 지르든 다른 무슨 뻘짓을 하든, ‘엔딩으로 인해 발생한 또 하나의 후일담’은 전통적인 서사에서 빠질 수 없는 카타르시스의 완성이거든요. 밝아진 화로가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든, 종말의 때를 겨우 한 며칠 늦춘 처참한 검은 태양이 보이든, 론돌 패밀리가 대부2 오프닝을 찍든 말이에요.

그런데 둠 이터널요? 얼룩송아지를 블랙앵거스 한트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순간 게임이 끝나버려요. 노빅 왕의 격려? 그건 둠가이의 기억이죠. 그 자리에 노빅 왕이 나타나서 젤다 아버지 흉내를 낸 게 아니잖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냥 악마가 또 한 마리 죽었을 뿐이고, 둠가이 역시 이미 과거에도 몇 번이나 되새겼을 노빅의 목소리를 거듭거듭 곱씹으며 또 다음 싸움을 준비할 뿐인 겁니다. 그래서 엔딩 끝나고 나도 둠가이는 다른 무슨 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요새에서 지나간 싸움을 복기하고 목가적인 살육의 나날을 보내며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악마의 위협을 그저 묵묵히 대비하는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뒤로 지구가 어떻게 되었나? 모릅니다. 알 바 아니에요. 뭐 ARC가 어떻게 하든가 말든가 하겠지. 헤이든 박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글쎄 될 대로 되겠죠. 가공이 덜 된 마스코바도 지옥 마력으로 인해 운명의 요새가, 악마 감옥이 다시 폭주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양반아 메이커한테 물어봐. 베가는 이제 안 나와요? 아 지가 나오고 싶음 나오겠지.

이게 둠 이터널 엔딩입니다. 의도해서 이렇게까지 극도로 서사를 없애버리지 않는 한, 사람 마음에 실수로 이런 엔딩 나오는 건 힘들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이 엔딩이 어지간한 감성팔이 엔딩보다 훨씬 더 나아보기고요. 웹툰으로 치면 예전에 완결난 ‘피에는 피’가 비슷한 맛을 줄 수 있을까요?

다른 한 가지, 둠 이터널의 이야기가 나름의 계산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인물 묘사입니다. 보편적인 이야기에선 인물이 이야기를 이끕니다. 거꾸로 말하면 이야기가 부실하거나 불친절한 이야기에선 인물도 부실하거나, 평면적이거나, 단편적입니다.

그런데 둠 이터널에 나오는 비중 있는 인물들은 그 중 아무 쪽에도 해당이 안 돼요. 부실하다기엔 너무나 사고와 행동에 근거가 뚜렷합니다. 성격도 풍부하고, 확실하며, 그래서 헤이든 박사 같은 경우는 본의 아니게 개그도 연출하고 그럽니다. (‘아니 그렇게 무식하게 쏴버리면 안 되자나;;;’) 그렇다고 평면적인가? 단편적인가? 헤이든 박사는 그렇다치고 칸 메이커나 밸런조차 그런 평가와는 거리가 꽤 멀죠. 원했다면 이들을 둠가이와 엮어서 얼마든지 에피소드를 더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한 겁니다.*

이건 좋은 겁니다. 어마어마하게 훌륭하다 이런 평가야 물론 못 내리겠지만, 적어도 둠이라는 게임의 정체성과 둠가이라는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선 너무나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인정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굳이 어렵고 불친절한 방식을 써서, 그리고 이야기의 맛과 게임의 맛을 격리시키면서까지 게임의 호쾌함과 액션의 단순함을 잘 살려준 이 게임의 츤데레함에는 고마움까지 느낄 정도입니다.

쓰다 보니 말이 조금 길었네요.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둠 이터널은 전작에 못 미치는 약점도 한둘 있습니다만, 많은 면에서 전작을 더욱 성숙시킨 꽤 좋은 액션 게임입니다. 최근 게임의 경향과 비교했을 때는 다소 극단적인 컨셉도 많은지라 누구나 얼굴에 들이밀어도 되는 보편적인 수작은 될 수 없겠지만요. 대신 늘 똑같은 게임에 질려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혹은 평소라면 안 할 법한 미친 게임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서슴없이 이 게임을 권하겠습니다.

아, 취향이 이미 이쪽인 분한테는 어떻게 평가할 거냐고요? ......안 할 겁니다. 나보다 한참 먼저 이미 하고 있었을 건데 내가 뭐하러.

맞죠? 그러니까 어서들 전기톱 들고 악마나 또 짜르러 가자고요. 립, 앤, 티어!



* 갠적으로 둠 이터널을 범주화할 자격이 있다면, 이 게임은 전작하고 같은 범주에 두지 말고, 발더스 게이트와 한 세트로 만들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묘하게 닮았어요.

원래 그 장르가 가지는 전통적인 재미를 희생하고, 변질시킨 대신 장르 외부에 있던 중요한 재미를 작품 안에 끌어들여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발게이의 경우가 미연시와 서사의 힘이었다면, 둠의 경우는 뛰어난 그래픽과 발전한 캐릭터겠죠. 그럼으로서 클래식을 부르짖던 사람들에게는 좀 불만스런 결과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결과로서는 오히려 클래식의 존재를 현대에 다시 계승하면서 현재와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힘, 클래식이 부흥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둘은 꽤 닮았어요.

그래서, 둠 이터널은 발게이가 RPG에서 그랬던 것처럼 줜내 찢고 죽이는, 한편으로는 가혹한 미로를 탐험하고 답파하는 클래식 총겜의 맛을, 둠의 공포를, 둠2의 상쾌함을, 듀크 뉴켐3D의 성취감을 현대에 되살릴 기폭제가 되어 줄까요?

두고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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