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4/17 23:53:15
Name   렐랴
Subject   무라카미 하루키라 쓰고 상실의 시대라 읽는다.

전 하루키 소설을 좋아합니다. 이 글은 갑자기 하루키 소설에 대해 갑자기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네. 술마시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과충이지만, 뭔가 문과충 감성 돋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논문 쓸 때 한 두 문장 씩 문과 충만한 감성을 집어 넣습니다만, 잔인한 리뷰어들은 항상 그 문장들을 걸고 넘어집니다. 어쩌면 이 글은, 그러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글입니다.

그의 장편 소설은 상실의 시대 빼고는 다 읽은 듯 합니다. 하지만 그 소설만큼은 손이 가지를 않습니다. 개나 소나 다 읽은 소설이라서라는 것이 제 핑계였습니다만. 사실 노르웨이 숲이라는 원제목을 초월 번역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만큼 하루키를 요약할 말이 없기 때문이겠죠. 저는 갑자기 그것에 대해 쓰고싶어졌습니다.

언젠가 1Q84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의 소설은 다시 읽는 것이 큰 의미는 없는 듯 합니다. 그의 소설을 다시 펼쳤을 때,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곡이 무엇인지 갑자기 궁금해져 저는 유트브를 뒤져 이 곡을 찾아 들어보았습니다. 여느 클래식과 같은 전주 부분이 곧 지나고, 저는 너무나 익숙한 곡조와 마주칩니다. 금관악기들이 비명을 지르는 듯 한 클라이맥스 부분은 "내가 이 부분을 어떻게 알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마치 소설의 주인공이 택시에서 나오는 음조를 듣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았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참 후 처음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이 음악을 수도 없이 들엇었다는 기억을 찾은 정도겠죠. 10년도 더 전에, 저는 이 음악을 수도 없이 들었었는데. 전 그 사실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상실의 시대... 저는 순간 왜 노르웨이의 숲이 읽고 싶지 않았는지 이해되었습니다. 다른 하루키의 소설들을 먼저 접했던 저는, 스포일러와 같은 제목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당기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상실의 시대는 하루키 소설 그 자체입니다. 저는 그의 소설에 끌렸던 이유가 뭔가 잊은듯 하나 잊은 줄도 모르던 그 어떤 무언가 때문이었던 듯 합니다. 그것은 전 여친과 헤어진 슬픔일 수도, 친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던 추억일 수도, 혹은 어렸을 적 잡았던 커다린 메뚜기의 모습일 수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마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기분인 듯도.  자다 깨서 꾼 꿈을 기억해내는 기분인 듯도 합니다.

알피지 쭈꾸루로 만든 순례 여행 같은 제목을 가졌던 소설은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러한 감정을 나타냈던 것 같습니다. 기사단장 이야기에서 화가는 어쩌면 나였던 것도 같습니다. 내가 나인듯 나아닌듯 인지한듯 인지하지 못한듯 안개구름처럼 살고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해변의 카프카의 환상은 마치 어렸을 적 몽정의 기분이었고, 하드보일드 어쩌고 원더랜드에 나오는 뚱뚱했던 박사의 딸은 왠지 와이프가 떠오릅니다 (우리 와이프는 안뚱뚱한데...).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한 듯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잊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준다는 것...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675 일상/생각JK롤링, 해리포터·헤르미온느와 설전.."트랜스젠더는 여성 아냐" 11 토끼모자를쓴펭귄 20/06/12 8078 2
    10657 경제지난 주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장에서 뭘 많이 순매수했을까 7 존보글 20/06/06 5896 2
    10651 기타정은경 "보건연구원은 R&D 컨트롤타워, 정책 및 역학 연구는 질병관리청" 6 공기반술이반 20/06/05 5299 2
    10643 의료/건강정형외과 치료 이야기 4 옐빠 20/06/02 5569 2
    10634 일상/생각노약자석으로 보는 도덕의 외주화가 불러오는 폐단 6 sisyphus 20/05/30 4866 2
    10624 일상/생각한국 조직문화에 대한 인식의 세대 차이 17 cogitate 20/05/26 5131 2
    10942 문화/예술추천하는 최신 애니메이션 OST 2 이그나티우스 20/09/09 6712 2
    10606 일상/생각동시성의 상대성 6 시뮬라시옹 20/05/21 5401 2
    10587 철학/종교유교(儒敎)에 대한 비판 83 ar15Lover 20/05/14 9344 2
    10583 기타로큰롤의 선구자 리틀 리차드의 사망소식과 그의 음악들 2 김치찌개 20/05/14 5427 2
    10963 IT/컴퓨터애플워치 라인업이 새롭게 정리되었습니다. 3 Leeka 20/09/16 5279 2
    10564 스포츠NC는 어떻게 미국 최고 인기 구단이 되었나 12 Leeka 20/05/08 5927 2
    10571 일상/생각불나방(하) => 불나방 에세이 전체 합본 4 시뮬라시옹 20/05/10 5144 2
    10902 창작[자작시] 무제 1 Merrlen 20/08/31 5720 2
    10569 일상/생각불나방(중_b) 시뮬라시옹 20/05/09 4896 2
    10568 음악Colorful Han river 3 롤백 20/05/09 5952 2
    10552 일상/생각온라인 수업하는 딸에게 빼앗긴 것들 10 집에가고파요 20/05/05 6397 2
    10526 스포츠시대의 변화를 느끼다 9 안경쓴녀석 20/04/24 5471 2
    10507 도서/문학무라카미 하루키라 쓰고 상실의 시대라 읽는다. 3 렐랴 20/04/17 4712 2
    10504 오프모임칭9랑 싸운 기념 4/17 17:15 서울대입구역 저녁 15 달콤한망고 20/04/17 4748 2
    10503 정치짧은 생각. 25 다키스트서클 20/04/17 5786 2
    10498 일상/생각전격 기숙사 탈출 대작전Z 3 투윗투후산와머니 20/04/15 5211 2
    12150 사회유나바머를 언급한 터커 칼슨 1 mchvp 21/10/09 4246 2
    10467 게임외국인들과 테라포밍마스 4인플한 이야기 18 토비 20/04/07 8088 2
    10461 일상/생각고강도 '선택적' 거리두기 2주 연장확정 소식과 이상한 의문점들 54 호에로펜 20/04/04 7315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