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23 01:49:28
Name   Velma Kelly
Subject   고양이 이야기
전 대학원에 올때까지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고, 동생이 알러지가 있기도 했고요. 없어서 더 찾게 된건지 아니면 그냥 날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를 눈이 빠져라 본 걸 생각하면 그냥 좋아했던 게 맞는것 같습니다. 아무튼 대학원 자취 아파트를 잡자마자 매의 눈으로 괭이를 찾으러 Humane society (유기동물보호소)로 떠났습니다 +_+


개가 아니라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양이가 더 깨끗하고 키우기 편하다는데 그건 부차적인 이유고요, 개가 사람에게 주는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이 좀 부담됐다고나 할까요? 대학원 때문에 자주 나가야 할텐데 그걸로 스트레스 받을 개 걱정도 됐고요. 반면 괭이는 사람이 나가면 나갔나보다 하고 하루종일 자고, 인간과 주종관계라는 밈이 있지만 사실 룸메이트에 가까운 관계죠.


사실 보호소에 갈 때만 해도 그냥 보기만 하고 올 생각이었읍니다...미국에서 소위 말하는 "Just a look" 함정에 빠진 것이지요. 아파트 규정상 한 살 미만의 고양이는 데려올 수 없었고, 오래오래 함께할 고양이를 원했기에 한 살 정도 된 고양이들을 찾기 시작했고, 우리 안에 있던 하얀 양말의 줄무늬 괭이가 절 보고 애옹거린 순간 결정이 내려졌읍니다(...) 직원분은 얘가 한달쯤 전에 보호소에 왔고, 원래 길냥이었고, 중성화수술을 한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닝겐아 이것도 우리랑 같이 사는거냐??"


보기만 하긴 개뿔. 전 바로 다음날 사료, 모래, 밥그릇, 각종 장난감을 산 다음 얘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름을 뭘로 지을까 생각을 하다가, 롤에서 영감을 받아 "누누"로 하기로 했습니다. 암컷 괭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름이 귀여우니 상관 없읍니다.


아니 근데 이놈의 괭이가 장난감을 안 가지고 놉니다. 심지어 캣닙을 뿌려도 거들떠도 안봐요. 얼마 안 가서 찾은 최적의 장난감은 플라스틱 물병 뚜껑이었읍니다 -_- 그 뒤로도 몇 번 장난감을 사줬지만 한 이틀 놀다가 관심을 끄길래 당장은 장난감을 더 사주지 않고 있읍니다.



애가 혼자라서 그런지 착하게 노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허구헌날 할퀴고 깨물고 별 질알을 다 해요. 사실 이건 제 잘못이긴 한데, 처음 데려왔을 때 너무 귀여워서 뭘 해도 그냥 냅둔 탓입니다. 하지만 키운지 2년쯤 된 지금 시점에선 제가 안 다치게 할큄 당하는 법을 알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 그리고 부모님 집에 데려갔을 때 알게 된건데, 자기가 알아보는 사람은 깨물고 부비부비 하면서 놀아주고, 잘 모르는 사람한테서는 도망을 가는데 멀리는 안 가고 한 1.5미터 거리에 앉아서 지켜만 봐요 ㅋㅋ


근데 그거 말고는 참 착한 고양이인게, 높이 있는 물건을 떨어뜨리지도 않고, 무슨 전선을 물어서 고장내지도 않아요. 똥오줌은 당연히 잘 가리고, 뭘 먹고 토한 적도 한 번도 없어요. 가구 스크래치는 하는데 낡은 의자 두 개 말고는 긁는게 없어서 괜찮습니다. 요즘 자꾸 티비 위로 점프해서 파쿠르(...)를 하는데 이러다가 티비가 한 번 넘어가서 박살날 거 같긴 합니다.


...아주 가끔 이런 짤방이 나오긴 합니다


이 괭이를 표현하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먹성. 사료 간식 가리는 거 없이 주면 주는대로 뚝딱입니다. 광견병 주사 맞히러 동물병원에 갔는데 닭고기 간식을 주니까 수의사 선생님이 주사를 맞혀도 미동도 안하고 쳐묵쳐묵만 하고 있어요. 수의사 선생님이 "세상 모든 고양이가 얘 같으면 내 직업이 100배는 편해질거다"라고...근데 신기하게도 고양이가 먹으면 안되는 음식들(대부분의 사람 음식)은 냄새만 맡고 거들떠도 안 봐요. 그래서 미안해 할 일도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보통 괭이들은 뜨끈뜨끈한 걸 좋아한다는데 얘는 차가운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가끔 환기시키려고 창문 열면 꼭 저렇게 가서 앉아 있어요.


사실 올해 전까지만 해도 쓰다듬는것도 싫어하고 저랑 거리를 좀 두는 편이었는데, 3월 무렵에 셧다운이 시작되고 저랑 하루종일 붙어있어서인지 이제는 자기가 와서 쓰다듬어달라고 하고, 제가 잘 때도 옆에 와서 누워있는 등 갑자기 친한척(?)을 합니다. 여친은 미운 정(...)이 든 게 아니냐고 하네요. 이제 오래오래 같이 살면서 발톱 박고 피 날때까지 엉겨붙는 짓만 고쳐졌으면 좋겠읍니다 :)


이 글 쓰는 동안에도 옆에 앉아 있었음.



23
  • 글에서 느껴지는 애정만큼 아름다운 고양이네요.
  • 이 글을 추천한다옹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003 일상/생각빌려주지도 않고 떼인 돈 8 정중아 20/09/28 3836 0
10999 일상/생각OTT 의 시대에 지출하는 비용 13 Picard 20/09/28 3999 0
10991 일상/생각지식인층에 대한 실망 17 멜로 20/09/25 4232 1
10988 일상/생각회사일기 - 4 "회식" 11 Picard 20/09/24 4840 0
10982 일상/생각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14 에피타 20/09/23 4747 23
10980 일상/생각고양이 이야기 3 Velma Kelly 20/09/23 4607 23
10972 일상/생각가난해야만하는 사람들 51 rustysaber 20/09/20 6049 22
10968 일상/생각BTS의 시대에 성장하는 사람들은 14 순수한글닉 20/09/18 4285 2
10964 일상/생각홍차까페 소정 16 릴리엘 20/09/16 5061 11
10958 일상/생각나의 2년간의 짝사랑기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는) 19 그럼에도불구하고 20/09/15 5904 5
10955 일상/생각회사일기 - 3 '순혈과 혼혈' 15 Picard 20/09/14 5011 0
10954 일상/생각노르웨이 단어: 프리루프츠리브 - 야외생활의 문화 6 풀잎 20/09/14 4619 3
10945 일상/생각정신과를 다녀봐야 할까요..? 17 언년이 20/09/10 4726 0
10943 일상/생각이상형은 직감인가? 신기루인가? 6 순수한글닉 20/09/09 4552 0
10941 일상/생각회사일기 -2 '도둑놈들이 너무 많다' 1 Picard 20/09/08 4277 7
10940 일상/생각반말이 싫습니다. 8 rustysaber 20/09/08 4424 0
10939 일상/생각회사일기 - 1 2 Picard 20/09/08 4635 1
10938 일상/생각차별이 없는 국가 대한민국 62 야수선배 20/09/08 6506 1
10934 일상/생각어른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사람 되지 마세요. 24 Schweigen 20/09/07 6300 63
10924 일상/생각포스트 코로나시대 - 다른 나라의 국가정책 연구자료 1 풀잎 20/09/04 4730 2
10921 일상/생각게임을 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네요. 7 nothing 20/09/03 4500 4
10920 일상/생각술 쫌 취했어요. 27 켈로그김 20/09/03 4905 22
10918 일상/생각건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27 이그나티우스 20/09/03 5182 1
10913 일상/생각한국에 거의 안들어오는 건물주 10 유럽마니아 20/09/01 5393 3
10907 일상/생각ㅗㅜㅑ.... 태풍올라오는데 강심장들이시네... 6 리안 20/09/01 3888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