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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3 15:07:52수정됨
Name   에피타
Subject   토마 피케티 - 자본과 이데올로기 리뷰(아이티 혁명을 중심으로)
  이번에 리뷰할 책은 부, 소득, 불평등에 대해 연구하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최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입니다. 2014년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론'을 인상깊게 읽고 신작이 나온다길래 바로 서점에서 구매했습니다. 1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건네주며 '이런 책을 진짜 사는 사람도 있네' 혼잣말 하는 서점 직원을 보니 처음 홍차넷에 방문하던 뉴비시절이 떠오더라구요. 글 쓰는 관종인 저는 티타임 글을 눈팅하며 이런 커뮤니티에서 어떤 글을 써서 관심을 받을까 연구하다 마침 새롭게 번역발간 되어 읽고 있던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 감상문을 티타임에 올립니다. 그 글로 좋은 반응을 받아 평범한 눈팅러에서 고급 관종으로 진화하였으니 Heil Führer Hitler... 아니 이건 아니고.
  이처럼 다들 한번 쯤 책에 대해 들어봐서 읽어야만 하는 기분이 들어 책을 사지만 결코 끝까지 읽지는 않는 책을 ‘event book'이라고 합니다. 오늘 소개할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 같은 책이 그런 책이라고 한다면 이런 1000페이지가 넘는 벽돌 같은 책을 사서 읽었으면 뭐라도 써서 공유해야 그 값어치는 한다고 생각해서요 . 이 글 읽는 분들은 압축된 티타임 글로 이런 벽돌 같은 책 읽는 시간 절약하여 효율적인 지적 만족감 느끼시길. 여러분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자본과 이데올로기' 책 소개를 시작하기 앞서 고백하자면, 사실 전 이러한 책에 대한 전반적이고 학술적인 리뷰를 쓸 능력이 없습니다. 우선 책 내용도 미국, 유럽, 제 3세계의 정치사, 현대정당운동까지 지나치게 방대하고 각종 통계자료가 많이 인용되어 있어, 대학원도 다니지 않은 저는 이러한 내용을 학술적인 언어로 재해석 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설령 그렇게 분석적인 글을 쓰더라도 정말 재미없을 거라고 제 안의 작은 제제가 속삭이고 있네요. 그래도 책의 제목과 서론을 인용하여 간략하게 소개해 보자면 인간이 잉여생산물을 저장하여 재산, 계급이 발생한 이후로 경제적인 불평등(자본)과 그것을 합리화하는 지배서사(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불평등에 대해 구성원들이 납득 할 수 있는 지배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정치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지배계층은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지배서사를 끊임없이 만들고 시대에 맞추어 바꾸었으며 결국 현대에는 지구상 거의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자본주의'라는 지배서사로 귀결되게 됩니다. 다만 이 책은 그 자본주의의 지배서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과정 중 정치 이데올로기에 주목하여 유럽, 인도지역의 사제, 귀족, 제 3신분으로 구성된 중세의 삼원사회에서 노예, 식민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거쳐 미국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혁명시대를 지나 현대의 포스트식민사회, 하이퍼자본주의 사회로의 진행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관련 학계에 큰 파장을 던진 이전 저서 '21세기 자본론'과는 다르게 논의를 열어가고자 하며 관련 자료를 잔뜩 던져주는, 주춧돌로서 방대하고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는 느낌이구요. 다른 리뷰를 찾아보니 역시 내용에 대한 논의보다 알맹이가 없다는 혹평이 더 눈에 띄네요.

  책의 전체적인 리뷰는 이 정도로 접어두고, 제가 이 책에서 주목한 부분은 아이티 혁명과 그로 촉발된 서구 국가들의 노예해방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이티는 1804년 혁명으로 해방되기 전까지 사탕수수 생산의 중심지로 프랑스에 커다란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피케티는 프랑스인 정체성을 이 저서에 잘 반영하여 아이티 혁명과 노예해방에 관하여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제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노예해방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기도 하여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피케티는 먼저 노예제가 고대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설명과 더불어 18세기부터 19세기에 일어난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 삼각 노예무역과 노예제가, 1775년 미국 독립 전쟁부터 1789년 프랑스 혁명, 1791년 아이티 혁명, 1861년 미국 남북전쟁까지 어떠한 역사적 흐름에서 폐지되었는지 설명합니다. 그 중 특히 노예해방의 직접적 발단이 되는 아이티 혁명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바, 아이티 혁명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첨부된 지도와 같이 아이티가 있는 히스파니올라 섬은 카리브해 쿠바 남동쪽에 위치한 섬 중 하나입니다. 이 섬의 원주민은 콜롬버스 항해 이후,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의해서 거의 절멸하였지만 황금과 같은 지하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아즈텍, 잉카제국을 상대하던 15, 16세기에는 섬 변두리에서의 소규모 목축업이 전부였습니다. 이 후, 카리브해 섬 중 두번째로 큰 면적에서 운영되는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1800년에 섬의 인구는 50만명에 이르렀습니다(아래 6.2 그래프 참고). 히스파니올라 섬 서부지역(생도맹그)은 프랑스, 동부지역은 에스파냐 농장주들이 운영하는 설탕, 커피 농장으로 본국의 농장주들에게 엄청난 부를 운송하였고 섬 인구의 대부분(약 90%)은 서아프리카에서 끌어온 노예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비슷한 시기 미국은 전체 인구 중 흑인 노예비율이 약 30%, 브라질이 50%, 인근 카리브 해의 자메이카가 약 80%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혁명 또는 반란의 위험이 매우 높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피케티는 설명합니다(아래 6.1 차트 맨 오른쪽 참고).



  1789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으로 국민의회가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프랑스 식민지의 흑인노예가 받는 대우를 돌아보게 만들었고, 노예제는 개혁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당시 혁명 세력 중에서도 급진적이었던 자코뱅파는 지주도 아니었고 노예해방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잃은 것은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노예가 부당한 처부를 받으면 농장주나 관리인을 고소할 수 있는 법안을 입안하는 등 혁명의 씨앗을 뿌리려고 했지만 이는 당연히 농장주들의 극심한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프랑스 본국에서의 소식, 식민지에서의 소란 등으로 흑인노예들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농장주에 저항하여 노예해방을 목표로 한 식민지 노예 우두머리들이 회합을 가지고 봉기하면서 1791년 아이티 혁명이 시작됩니다.


아이티 혁명의 초기 흑인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1803)

  노예반란은 계획했던대로 일거에 봉기하진 못했습니다. 노예 중 누군가는 밀고하고 어떤 농장은 예정보다 일찍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당하기도 하면서 백인 농장주들도 심상치 않다는 낌새는 챘지만 사실 이러한 저항이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처럼 대대적인 봉기를 예상하진 못했습니다. 봉기는 섬 북서부 농장과 항구가 밀집된 지역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 확산되며 섬의 프랑스 식민지역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혁명 발발 당시 아이티의 인구구성은 흑인노예 90%, 백인 농장주 및 그 가족들 5% , 자유흑인 5%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아래 6.2 그래프 참고) 노예들 중 일부는 노예들을 감독하는 상급자 위치에 있었고 이들은 부분적으로 재산 축적이 가능하고 재산을 모아 노예명부를 삭제하여 자유인이 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반란이 시작되자 아직 혁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는 힘들다고 생각될 만큼 흑인노예들은 백인들을 마음껏 살육하였고 파괴, 방화를 저지르는 것으로 진정한 자유를 만끽 하려는 듯 농장들은 불태우고 파괴했습니다. 섬에 거주하던 백인 농장주들은 대부분 혼란속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살아남은 농장주들은 혁명의 단초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혁명을 저주하며 근처 영국, 에스파냐, 또는 미국에 항복하여 그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노예반란의 소식을 접한 영국과 에스파냐는 근처 자메이카와 카리브 해에 주둔하는 자국 병력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반란군에 패퇴하였고, 반란군은 오히려 에스파냐 식민지였던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 일부를 점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앞서 그림으로 소개한 투생 루베르튀르는 흑인 노예들의 지도자로, 투생 루베르튀르의 아버지는 노예로 끌려오기 전 서아프리카 부족의 왕자였으며 그로 인해 노예로 끌려온 후에도 무리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 아들인 투생 루베르튀르도 이에 따라 노예생활을 하는 대신 선교사들로부터 프랑스어, 기하학, 라틴어 등을 조금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섬이 반란군들에게 완전히 점령된 후, 프랑스는 새로운 총독을 본국에서 파견하여 노예해방을 총독부령으로 발표하고 여전히 식민지 지위는 유지하려 했습니다. 루베르튀르 역시 국가독립의 혁명이 아니라 식민지 헌법을 통한 노예제 해방까지만 계획하였고, 반란 세력들도 여러 이해관계로 분열될 조짐을 보였으며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체제를 갖추려면 본국의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보다 프랑스 제국에 남아 자치를 보장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생도맹그(프랑스 식민지 아이티를 당시 부르던 이름)에 농장을 소유했던 프랑스 본국 농장주들은 생도맹그 흑인들이 야만스럽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혁명 정부를 끊임없이 압박했으며 노예해방에서 비롯된 무절제, 무질서는 다시 군대를 파병하여 생도맹그를 점령하고 질서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루베르튀르는 프랑스 혁명의 폭력과 야만을 비유하여 자신들의 폭력이 프랑스 혁명의 폭력과 비교하여 정당하지 않은 점이 무엇인지, 개화된 프랑스 백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폭력과 흑인노예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폭력이 정말 가치 없는 것인지 반문하는 연설문을 써 보내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논박하였습니다.
  흑인들의 해방구가 된 생도맹그는 오래 갈 수 없었으니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을 틈 타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온건 부르주아인 지롱드파의 지원을 받았고, 이들의 요청에 따라 생도맹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전함의 절반인 50척을 동원하여 총 8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는 카리브해나 다른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이와 같은 노예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고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 섬에서 노예가 해방되었다면 이런 움직임이 다른 섬으로 확산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으니까요. 반란군 지도자인 루베르튀르 역시 이런 소문을 접하고 해상 경비를 강화하는 등 대비를 하였지만 본국의 정예 군대에게 차츰 밀리다 협상을 가장한 프랑스 군의 함정에 속아 결국 프랑스군에 잡혀 본국으로 압송됩니다. 반란군 지도자 루베르튀르를 제거했지만 카리브해의 뜨거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프랑스 군대는 황열병으로 차츰 힘이 빠졌고 충원되는 병사보다 사망하는 병사가 많아지는 지경에 이르러 프랑스 본국 병사와 반란군 병사들이 얽혀 살육하는 끊임없는 혼란에 빠지자 결국 1804년 철수하였고 루베리튀르의 뒤를 이은 흑인 지도자 장자크 데살린이 아이티 독립선언을 하여 독립국에 이르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아이티 혁명이 비록 그 혁명의 원산지인 프랑스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식민지를 억압하고 착취한 아이러니는 있지만, 흑인 노예해방과 아이티 독립으로 귀결된 일련의 전쟁, 흐름은 흑인 민중저항운동의 위대한 승리였으며 그들은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and they all lived happily ever after...로 아름다운 동화같이 마무리 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 열강의 관심에서 멀어진 신생 독립국 아이티는 몇 번의 내전과 황제를 참칭하는 군부독재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1834년에는 프랑스가 다시 함대를 몰고 돌아와 무역거래를 차단하고 항구를 봉쇄하며 노예소유주에 대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결국 1억 5000만 금본위프랑, 오늘날 화폐로 환산한다면 400억 유로 이상을 100년 념게 분할하여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는 아이티 경제가 1950년대까지 사실상 발전할 수 없도록 막는 족쇄로 작용하였습니다.

  아이티 혁명 자체는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피케티가 이 책에서 지적하듯 부의 불평등의 경제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안타까운 점은 결국 혁명으로 탄생한 신생독립국이 어마어마한 국채를 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노예해방 역사를 살펴보면, 뒤이어 1807년에는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되었고 노예소유주의 재산권을 보전하면서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점진적 배상방법이 논의되었으며 그 보전 형태는 단순 시세에 따른 노예금액 배상, 노예의 앞으로의 노동수익을 계산한 금액 배상, 아니면  노예해방으로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는 노예가 해방 후 일정기간의 수입을 전 소유주에게 지불하는 방안 등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었고 실제로 1833년 영국은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당시 영국 국내총생산의 약 5%에 해당하는 200만 파운드를 노예소유주에 대한 배상으로 지출하였습니다. 드넓은 농장에서 노예제를 운영하여 수익을 올리던 미국 남부 역시 노예제 존폐 여부를 두고 갈등하였습니다. 링컨은 연방의 분리를 막기 위해 영국의 경우처럼 노예소유주에 대한 점진적 보상을 통한 노예해방을 남부 연합에 제시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결국 1861년 미국 남북전쟁과 패배한 남부 연맹의 노예해방으로 끝맺습니다. 이러한 서구 열강들의 노예해방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노예해방이 마치 과거 구 체제를 덮고 새로운 챕터를 펼치는 것 처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정책 변화로 인한 기존 노예소유주의 재산권을 보전해주는 형태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티 혁명이나 미국 남북 전쟁과 같이 이러한 갈등을 계기로 급격한 변화를 몰고 오기도 하였으나 결국 그와 같은 급격한 변화의 후유증은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노예제 폐지와 이로 인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앞서 설명한 지배구조의 서사로 설명하자면 노예소유주는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으로 획득한 노예라는 노동력을 노예들의 낮은 교육수준과 단체행동 억압, 군사력의 우위 등으로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하는 프랑스 혁명이 퍼져나가는 중에도 억눌렀지만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자유, 인권의 바람에 식민지의 90% 이상이 노예인 인구상황까지 겹치면서 아이티 혁명이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예해방으로 자유인이 된 흑인들도 당장 모든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인의 삶을 만끽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산으로 들어가 약탈행위를 하고 식민지가 아닌 본토 해방노예들은 도시 임노동자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대부분의 해방노예들은 일생을 농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거나 갈 곳이 없었고 농장주들과 노예시절 조건보다 조금 나아진 임금계약을 체결하고 계속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물론 노예해방이 흑인인권신장의 큰 발걸음이 되었고 '덜' 극단적인 지배와 불평등의 형태로 나아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지배서사의 변환이라고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영국이나 에스파냐가 우려한대로 아이티 혁명 이후, 카리브해 섬들에 위치한 열강들의 다른 식민지에서도 아이티 혁명으로 자극받은 흑인노예들이 노예해방을 위한 반란이 몇 차례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미 아이티 혁명을 통해 혁명의 가능성을 인지한 열강들은 본국에서 군대를 추가파병하고 노예들의 회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이 후의 혁명들은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한편, 아이티는 신생 독립국으로 첫 발을 떼었지만 사탕수수 무역을 통해 발전해야 하는데 프랑스가 배상금을 요구하며 무역을 차단하고, 향후 100년 이상 아이티 국민소득의 5% 이상을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등 경제적으로 엄청난 무역적자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도 군사독재와 쿠데타가 반복되면서 약 2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낮은 소득성장률을 기록합니다.

  1904년, 아이티 독립 100주년 기념식에 프랑스 정부는 공식 사절단 파견을 거부하였습니다. 아이티가 1834년 배상금 상환을 시작한 이후, 당시까지 상환속도는 프랑스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스러웠고 이런 불성실한 채무국의 독립기념식에 사절을 파견하는 관대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00년이 더 지난 2004년, 아이티 독립 200주년 기념식이 열렸고 프랑스 정부는 다시 불참했지만 이번 불참의 이유는 아이티가 이번 기회를 통해 100년 넘게 지불한 노예해방 배상금을 프랑스에게 돌려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과 노예제애 대하여 서방 국가들이 사과해야 한다는 국제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1998년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우간다에서 유감을 언급하기도 하고 2007년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가 깊은 유감을 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힘입어 카리브해 공동체나 서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유감이나 사과표명을 넘어, 실질적인 배상금을 요구하기 위한 움직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물론 국제 사회에서 단순한 입장표명을 넘어 배상금을 지급하는 문제는 명분 이상의실질적인 국력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인 만큼 노예제로 피해를 받은 국가들이 실제로 목표를 달성하기는 요원한 것으로 보이지만 노예제 폐지를 통한 부의 불평등 문제는 어디선가는 아직도 현재진행중입니다.

* 참고문헌
- 자본과 이데올로기(Capital and Ideology)/토마 피케티, 안준범 옮김/2020
- 아이티 혁명사(Avengers of the New World: The Story of the Haitian Revolution)/로런트 듀보이스, 박윤덕 옮김/2004
- 자본주의와 노예제도(Capitalism and Slavery)/에릭 윌리엄스, 김성균 옮김/2014

* 본 글에 첨부된 그래프들은 피케티 저서에 첨부된 그래프를 볼 수 있는 http://piketty.pse.ens.fr/ideologie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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