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3 07:33:24
Name   사이시옷
Subject   할아버지, 데리버거, 수영장
수영 강습을 마치고 소독약 냄새를 풀풀 풍기며 수영장 입구 쪽으로 내달으면 종종 할아버지가 서 계셨죠.

정통 정장은 아니지만 비스므레한, 하지만 마 같이 얇은 재질의, 약간 탁한 하늘색이었던 재킷에 하늘하늘한 회색 바지를 입으셨던 할아버지. 그리고 분신처럼 쓰고 다니셨던 중절모. 멀리서 봐도 우리 할아버지인걸 한눈에 알아차릴수 있었지요.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곳은 수영장 맞은편 롯데리아. 집에서는 햄버거를 사주지 않았기에 수영장 앞에 할아버지가 서 계신 날이면 너무 기뻐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죠. 할아버지도 아버지께 용돈을 받아 생활하시는 터라 세트 메뉴는 사주시기 힘드셨었죠. 그래도 900원짜리 데리버거 하나면 그날은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되었어요. 가끔 김빠진 500원짜리 콜라까지 시켜주시면 금상첨화였지요. 롯데리아의 콜라는 유난히도 탄산이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수영 후의 나른함에 햄버거의 달콤함이 겹치면 아주 녹아내릴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는 손주 더울까봐 부채를 부쳐주셨죠.

그렇게 소독약 냄새와 햄버거 냄새를 묻히고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지요. 그 때는 백화점 셔틀버스가 있어서 아주 편했어요. 롯데 백화점, 그랜드 백화점, 현대 백화점 셔틀버스들이 한 시간에 두 번씩 일렬로 동네에 들어서던 모습이 기억나요. 돈 한푼 안들이고 이곳 저곳을 갈 수 있어 참 편했죠. 셔틀버스 운행이 중단 되었을때 얼마나 허전했는지 몰라요.

할아버지는 손주 만나러 수영장에 오시기 전엔 근처 석촌호수 경로당에서 시간을 보내셨어요. 늘그막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사시면서 유일하게 마음을 둔 곳이 거기였으리라 생각되요. 경로당만 다녀오시면 퍽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었거든요.

어제는 롯데리아에 가서 와이프꺼, 제꺼 햄버거를 샀어요. 저는 역시 데리버거 세트를 골랐죠. 패티는 종이처럼 얇고 고기맛보다 달달한 데리야키 소스맛이 가득한, 어쩌면 유사 햄버거에 가까운 것이지만 뭐 어때요. 전 좋은 걸요. 여전히 먹으면 행복한걸요.

셔틀버스를 타고 수영장을 다니던 것도 30여년이 지났고 할아버지가 경로당 친구분들을 만나러 하늘나라에 가신지 15년이 되었지만 데리버거의 맛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30년전만큼 할아버지와 롯데리아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제 아들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증손주를 보시면 퍽 행복한 표정을 지으실 것 같아요.



23
  • 훈훈☺️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341 일상/생각눈 가리고 아웅아웅 1 사이시옷 21/01/15 3837 7
11289 꿀팁/강좌[새해맞이] 의지력은 돈으로. beeminder 6 사이시옷 20/12/29 4150 5
11287 꿀팁/강좌[새해맞이] 습관을 게임처럼! Habitica 11 사이시옷 20/12/28 4721 3
11193 일상/생각할아버지, 데리버거, 수영장 2 사이시옷 20/12/03 3868 23
11027 일상/생각나는 순혈 오리지날 코리안인가? 46 사이시옷 20/10/05 5482 22
10580 일상/생각제주도에서의 삶 12 사이시옷 20/05/13 4588 26
10557 일상/생각엄마 4 사이시옷 20/05/07 3727 15
10532 일상/생각왜 또, 매킨토시 21 사이시옷 20/04/27 4632 0
10400 일상/생각툭툭 2 사이시옷 20/03/19 4522 5
10278 일상/생각다른 세계의 내가 준 깨달음 2 사이시옷 20/02/10 4486 10
10143 IT/컴퓨터새해 맞이 랜섬웨어 후기 16 사이시옷 20/01/03 5175 6
10133 일상/생각숫자로 보는 나의 2019년 / 독서 추천 5 사이시옷 19/12/31 5109 9
10067 일상/생각도미노 인생 4 사이시옷 19/12/10 4913 21
10007 일상/생각나이 9 사이시옷 19/11/20 4281 5
9959 일상/생각쭈글쭈글 1 사이시옷 19/11/08 3785 6
9889 일상/생각끌어 안는다는 것, 따뜻함을 느낀다는 것에 대해 3 사이시옷 19/10/25 4519 13
9867 일상/생각소머리국밥 좋아하세요? 7 사이시옷 19/10/20 3852 12
9947 꿀팁/강좌뭉청멍청한 나를 위한 독서 정리법 8 사이시옷 19/11/06 5838 10
10152 일상/생각가습기를 닦다가 2 사이시옷 20/01/06 4784 12
11867 일상/생각보증기간 만료 14 사이시옷 21/07/10 3702 17
11167 IT/컴퓨터pdf 번역하는법 4 사이바팡크 20/11/24 3799 0
12972 일상/생각[회상] R.A.T.M 그리고 틱광득 소신공양 18 사이공 독거 노총각 22/07/06 4356 11
12933 여행[베트남 붕따우 여행] 중장년 분들에게 추천하는 여행지. 긴글주의 17 사이공 독거 노총각 22/06/19 14717 15
12910 일상/생각적당량의 술과 음악이 있음으로 인해 인생은 유쾌한 관심거리다. 알버트킹 50 사이공 독거 노총각 22/06/12 5060 43
12901 도서/문학달의 뒷편으로 간 사람 [마이클 콜린스] 10 사이공 독거 노총각 22/06/08 3749 1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